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4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공생애 전도사역 시작(눅 4:1-44)

체데크 2021. 11. 1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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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공생애의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희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어둠에서 고통당하는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셔서 영원한 영생의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도사역 시작(눅 4:1-44)

 

1-13, 마귀의 시험을 받으심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사역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2:2)로 불리며, 이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들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들과 풍조들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이며(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세 가지의 시험을 하였다. 첫 번째는 떡 시험이었다. 마귀는 예수님께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것은 먹는 문제에 관한 시험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문제이다. 사람들은 먹기 위해 일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 첫째로 먹는 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이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옳은 개념이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신적 능력이 있으셨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 몹시 배고프셨으므로 그가 기적을 행하셔도 정당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과 육신적 유익을 위해서 또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였다.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케그랍타이)[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라고 말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라고 말했다(6:17).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하여 먹으며 행복을 위하여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밥은 단지 몸을 위해 필요하다. 밥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평안이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불행이요 죽음이다.

[5-7]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세상 권세와 영광의 시험이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올라가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했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2:2),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성경은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한다(11:36).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시험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4:4), 또 사도 요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2:15). 사람들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얻기 위해 마귀에게 굴복하고 어느 정도 그것을 얻고 누리기도 하지만, 그것의 누림은 일시적이고 곧 그것을 빼앗기고 만다.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단호히 마귀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만 섬기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의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섬김의 대상이 아니다.

[9-11]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 . . .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명예와 기적주의의 시험이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그를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이번에 성경(91:11-12)을 인용하면서 시험하였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바른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지만 그것도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행위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절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큰 잘못이다.

성경은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하고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해야 하고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특히 성경은 참 저자이신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성경을 인용하며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반대된다. 우리는 기적을 구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기적주의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또 사도 바울도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22-24). 기적주의는 바른 신앙사상이 아니다.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했다면, 우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26:41), 사도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도의 삶은 마귀와의 전쟁이다. 본장은 이 전쟁을 위하여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검으로 사용해야 한다(6:17).

둘째로, 우리는 떡 시험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먹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6:31-34).

셋째로,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위해 마귀에서 절해서는 안 된다. 요한일서 2:15, 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의 뜻만 행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기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기적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으나 기적만 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이다. 기적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른 교리 사상과 도덕적인 삶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어떤 은사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그는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피차 복종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또 우리의 삶이 영적인 전투이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진실, , 화평, 믿음,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말씀,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14-30, 회당에서 가르치심

[14-15]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그는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보는데,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배우며 기도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공적인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생활하신 곳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은 바실리카라고 부르는 예배실 앞부분에 베마라고 부르는 강단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치료하며](전통본문)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덱토스)[받으실 만한]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고 본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해 있고 마귀와 죄에 포로 되어 있고 눈멀고 억눌린 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죄의 결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그 불행한 처지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없지 않았지만, 이제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

[20-22]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 . . .

예수께서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글(헤 그라페)[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 곧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 보면,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했다고 증거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 요셉의 아들 예수가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라고 해서 그를 배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이 그를 무시하였고 의심하였고 배척하였다.

[23-2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셨다. 그는 그들이 단지 기적에 대해 관심을 가졌음을 아셨다. 그러나 기적은 단순히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구하거나 행하실 일이 아니었다.

또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는 비록 그들과 똑같이 평범한 어린 시절을 가진 자이지만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된 자이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신 은혜와 직분과 권위를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꼭 믿어야 할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 나라를 버려두시고 이방 나라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 나라의 한 군대장관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 . . .

회당에 있는 자들,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을 가졌던 그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죽어야 할 때가 되지 않으셨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에 죽는 길을 택하실 것이다.

14절부터 3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공예배와 성경 읽기 등의 경건 훈련을 힘쓰자.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는 율법의 규례대로 안식일을 지키셨고 회당 예배에 참석하셨다. 그는 회당 예배의 순서대로 성경말씀과 그 해석을 들으셨고 기도하셨을 것이다. 경건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디모데전서 4:7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훈련하라]”고 말하였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공예배에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또 공적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힘쓰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이심을 믿자. 21,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들의 성취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예언은 그에게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세상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인들을 받으시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렸고 죄사함을 받았고 자유함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늘 하나님께 감사하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인간으로만 생각하고 배척하지 말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로 알고 영접하자.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분이 가득하여 심지어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31-37,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

[31-32]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했다. 그의 말씀은 권위가 있으셨다.

[33-34]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과 행위들을 조장하는 영이다. 오늘날 더욱 심해지는 것 같은 음란의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이다. 그 귀신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귀신은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자신을 멸할 수 있는 자이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특별한 사명을 주셔서 보내신 자임을 알고 있었다.

[35-37]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 . . .

예수께서는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가 그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널리 증거되어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것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않아야 했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가!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니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권세는 확실히 신적 권세이었다. 이에 그의 소문은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는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 시몬은 베드로를 가리킨다. 마태복음 8:14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결혼한 자이었는데(고전 9:5), 그의 장모가 심각한 열병에 걸려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앞에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그 병이 떠나갔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1:31). 예수께서는 그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그때 그 병이 떠났고 여자는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열병도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려고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사건은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 즉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까지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했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이시며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다 통치하시는 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40-41,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때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왔고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며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며 또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히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당사자나 보는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구주로 의지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귀신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신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그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8:49:30에 보면 치료받은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 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더 근원적 문제 곧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단지 외형적인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인 기적, 곧 회개와 믿음과 영혼 구원을 전한다. 그러나 영혼 구원은 가장 복된 일인 몸의 부활과 영생과 천국으로 이어진다.

42-44, 전도하심

[42-44]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말씀하셨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그러시고 그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말씀을 지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전도의 사명을 밝히 증거하셨고 갈릴리 여러 회당들에서 전도하셨다.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또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神性) 곧 그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었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기독교는 사람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육신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문제의 해결 즉 영혼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함께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복된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전도의 사명을 다하자.

[역대상 7장 설교말씀] 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아셀 지파(대상 7:1-40)

 

[역대상 7장 설교말씀] 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아셀 지파(대상 7:1-40)

역대상 7장은 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아셀 지파의 자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분배받아 살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천국을 분배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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