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이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 신앙을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을 말합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율법의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너의 재물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부자인고로 재물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막 10:1-52)
1-12절, 이혼에 대하여
[1-2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전에 하시던 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유로이 궁금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 같다. 본문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비난거리를 찾기 위해 질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배우려는 태도가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가르치시는 데도 그러했다. 교만한 자는 어떤 훌륭한 선생이 와서 가르쳐도 배우려 하지 않으나, 겸손한 자는 평범한 교훈에도 귀를 기울인다. 남에게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고 교만한 사람이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배워야 한다.
[3-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하나님께서]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모세는 사람이 이혼 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을 허용했다. 사람들은 악하여 연약한 아내를 학대하고 울리고 가슴에 큰 상처를 주고 그를 버리기까지 한다. 아내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여자에게는 차라리 이혼이 낫다. 결혼해서 구타당하고 마음과 육체의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혼은 결혼 제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반대된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결혼한 남녀는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그러므로 부부 관계는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이다. 부부 관계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되고 가장 잘 유지되어야 할 관계이며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어서는 안 될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의 관계를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버리든지, 아내가 남편을 버리든지, 버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 결혼한 자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10-12절]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부부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본처에게’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 ‘그에게’라는 말인데, 그것은 본처보다 재혼한 상대를 가리킬 것이다. 잘못된 이혼에 근거한 재혼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우리는 교만한 자처럼 성경 배우는 일을 무시하지 말고 믿고 실천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배우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관계 중에서 부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심을 알고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잘 지키고 유지해야 한다. 부부는 서로를 위하고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옳지 않은 이혼과 재혼을 죄악으로 간주하고 그 행위와 폐해들을 미워하심을 알고 그것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13-16절, 아이들을 용납하심
[13-14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그 데려온 자들을]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것임이니라].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모범대로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영접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순진하여 무엇을 의심할 줄 모른다. 그는 배운 대로 믿고 행한다. 그러므로 어릴 때 바른 교육이 매우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15-1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 같이 영접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우리 어른들은 성경말씀을 복잡하게 생각하여 의심하지만, 어린아이는 성경에 증거 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순진하게 믿고 따른다. 우리는 어린아이들 같이 하나님의 말씀, 천국 복음을 순진한 마음으로 받고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천국 백성의 모습을 지닌 자들로 알고 주님의 모범대로 어린아이들을 사랑으로 영접하며 귀하게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말씀을 복잡하게 생각하여 의심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듣고 받고 믿고 신구약 성경에 증거 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그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17-22절, 한 부자가 영생의 길을 질문함
[17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달려온 것을 보면 그는 열심이 있었고, 꿇어앉은 것을 보면 그는 겸손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생의 방법에 대해 물은 것을 보면, 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실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18-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선하지 않으셔서가 아니고 사람들 중에는 선한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 함이었다. 세상에는 의인이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다(롬 3:10, 23).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선하시고 죄가 없으시다(히 4:15; 요일 3:5).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들을 열거하셨다. 그것은 계명들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사람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이다(요 3:16). 주께서 그에게 계명을 말하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을 것이다.
[20-21절]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전통본문)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는 경건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 같다. 그는 상당히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의 문제점이 재산의 많음에 있었음을 보셨다. 그는 영생을 사모하지만, 재물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참으로 영생을 원한다면 그는 재물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영생은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재물은 결코 영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깜짝 놀라서, 혹은 어두운 기색을 띠고](BDAG) 근심하며 가니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영생을 원했지만, 그것을 위해서 그의 많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 대신에 재물을 택했다.
우리는 재물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방해함을 알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영생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단지 백 년 동안 유용한 재물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23-31절, 재물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움
[23-27절]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이](전통본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들은 흔히 가난보다 재물의 많음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난보다 부요가 복인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것은 아마, 부자가 그가 지금 누리는 물질의 유익들, 즉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등을, 그가 현재 실감하지 못하는 천국의 영원한 복을 위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고 부자 되기를 좋아하는 세상에 구원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신다.
[28-31절]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아내나](전통사본)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어부였던 그들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그를 따랐다(마 4:20, 2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가족이나 재산을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헌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인 신약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또 참된 헌신은 믿음의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믿은 유대인 신자들 중에 이방인 신자보다 나중 될 자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재물이 많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이 세상이냐 영생이냐,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마 6:24).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9-10).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에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세상 사랑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자.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겼고 배설물로 여겼다(빌 3:7-8). 우리는 이 세상 대신 천국과 영생을, 그리고 돈 대신 하나님을 택하자.
32-34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언하심
[32-34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決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주 부르셨다. 이것은 그의 인성(人性) 즉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자기 비하(自己卑下)[자신을 낮추심]이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나라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 곧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들과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것은 심히 모순된 일이었다. ‘능욕하다’는 말은 ‘조롱하다’는 말이다. 주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3일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 일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증거 된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될 일을 정확히 예언하셨고 그 예언대로 그 일이 정확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또 하나의 증거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셨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들의 죄를 담당한 대속(代贖)의 죽음이셨다. 우리는 그의 죽음 때문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성령으로 오셔서 오늘날도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주의 백성과 늘 함께하신다. 그는 우리의 성화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능력을 주신다.
35-45절,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구함
[35-37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의 영광의 보좌 좌우에 앉기를 탐내었다. 그것은 순전히 세상적 욕심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어야 했다.
[38-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예비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나의 마시는 잔,’ ‘나의 받는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킨다. 그런 고난을 그들이 과연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고난에 참여케 될 것을 암시하셨다.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목베임을 당하였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요한은 로마에서 끓는 가마솥에 던지웠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그는 그 후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에베소로 돌아와 늙도록 생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성도가 소원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준비된 자들 즉 예정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될 것이며 작정된 자는 그것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자리가 작정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말씀 나눔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음을 보인다. 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속에도 비슷한 세속적 욕심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교회 안에서 높은 자리를 구하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42-44절]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린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섬김의 정신이, 이론적으로는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없다. 세상은 힘과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것이 인간의 죄성의 한 면모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의 것과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섬김의 원리이다. 세상은 보통 지배의 원리로 운영되지만, 교회는 오직 섬김의 원리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가 역사상 로마 천주교회처럼 세속 정치와 결탁되어 교인들을 강압한 때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단종파들은 교인들에게 폭력과 강압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타락한 교회의 모습일 뿐이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자발적 모임이며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사랑과 섬김의 원리가 지배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기는 데는 실상 직분도 필요치 않다. 섬기는 것은 그냥 섬기면 된다. 그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를 몰라주어도 섭섭해하지 않는다.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교회는 아름다운 모임이 되고 이 세상에서 벌써 천국의 모습을 이룰 것이다.
[45절] 인자(人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방금 주께서 하신 교훈의 근거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서로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까닭은 주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몇 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는 영광의 천국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둘째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代贖物)로 주신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자신의 죗값으로 죽어야 하든지, 아니면 대속물을 필요로 하였다. 왜 대속물이 필요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죄에 대한 형벌이 없어도 죄가 용서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가 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이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 이치인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의 종이 되셨다. 여기에 섬김의 모범이 있고 교훈이 있다.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고 오직 봉사의 직무와 책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은 존귀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 직분을 존중히 여기고 그 직분자를 존경해야 하지만, 그 명예는 실상 그 직분에 대한 그의 충성과 열매에 달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내세의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명예심은 버려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허무하고 모든 육체는 풀같이 마르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전 1:2; 벧전 1:24). 사도 바울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갈 5:26).
교회 안에서는 큰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서로 높아지려고 할지라도, 교회는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교훈하신 바이며 본을 보이신 바이다.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무엇보다, 모든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 죽음은 몸의 죽음뿐 아니라, 정신적, 신체적, 환경적 불행과 특히 지옥의 형벌을 포함한다.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길은 구주 예수를 믿는 것뿐이다(요 3:36).
46-52절,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주심
[46-48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절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 바디매오는 구걸하며 살았던 불쌍한 거지이었다. 그는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렀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지방의 한 마을 나사렛 출신이셨다. 그는 사람이 지어낸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셨다. 그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 소경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병 고치심과 기적 행하심을 보지 못했으나 소문을 통해 알고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을 주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지금은 자존심을 논할 때가 아니고, 자기 형편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때이다. 그는 겸손해졌고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자비를 믿었고 그를 향해 소리질렀다.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했으나 그는 더욱 소리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지 않았고 무례한 자로만 여겼으나, 그는 낙심치 않고 더욱 소리 지른 것이다. 그의 믿음은 간절히 부르짖는 믿음, 사람들의 방해에도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49-50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지나쳐 버리시는 듯하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도 처음엔 응답지 않으시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낙망치 않고 믿음으로 부르짖을 때 그는 머물러 서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간절히 그리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소경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 겉옷은 거지에게 중요한 소유물이었다. 그것은 몸을 가리고 밤에 추위로부터 지켜주는 필수품이었다. 지금 그 중요한 겉옷을 내어버리면 아마 그것을 다시 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의 겉옷도 팽개쳐 버리고 주께서 나아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예수께로 가면 그의 소경이 고침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51-52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 소경은 보기를 원하였다. 그 소경에게는 돈 몇 푼보다 시력의 회복이 필요하였다. 영적 소경인 모든 죄인들이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비참함과 구주 예수님과 내세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물질적인 소득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고 값진 일이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소경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 소경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 첫째로, 그것은 지식 있는 믿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심을 알았고 그의 신적 능력과 자비를 믿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은 간절한 기도로 표현되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셋째로, 그의 믿음은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꾸중 속에서도 낙심치 않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요구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자비의 구주이심을 인정하고 확신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크고 작은 영적, 육적 문제를 낱낱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되 여러 가지 환경적 시험들 중에도 낙심치 말아야 한다.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시력의 회복을 가리킨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소경은 그의 시력의 회복을 얻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는 병고침들에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받는다.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하였다. 성경에 증거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확신해야 한다.
고침을 받은 바디매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더 이상 소경도, 거지도 아니다. 그는 육신의 병만 고침 받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어 영혼의 구원도 받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시다. 오늘날도 영적 소경인 죄인들은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영안(靈眼)이 열려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계획을 알고 인간의 본분과 목적과 정로를 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영광과 영생의 복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이미 구원받은 우리의 영안도 날마다 더욱 밝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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