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비극에 대한 예레미야 탄식(애 1:6-2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되어 황폐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합니다. 화려했던 도시는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을 때는 복을 받아 화려하게 누리면서 살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면서 이방 나라를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바벨론 족속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켜버렸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섬기면서 나가야 합니다.
애1: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모든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1:6
목백 - 에 해당하는 '사르'는 영역 성경에서 주로 '군주'(princes)로 번역되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온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듯하다(왕하 25:4; 렘 39:4). 그리고 목초지를 찾지 못하는 '사슴' 예화는 시 23편에 묘사되고 있는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목자가 되사 그들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양 떼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선한 목자로 묘사된 바 있다(요 10 :11 이하). 시인은 여기서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비참한 지경을 대조시킴으로써 포로로 잡혀 가는 비애와 슬픔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다(Harrison).
애1: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1:7
예루살렘이 정복자의 먹이가 되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과거의 영광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비참하였다. 아마 이 시는 이 성이 함락된 이후 오래지 않은 그 어느 시기에 구성되었던 것 같다. 설상 가상으로 그 대적들을 이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성경에서 대부분 비웃음은 조롱이나 비난과 연결되어 쓰였다. 한편, '군박'의 히브리어 '마루드'는 그 어원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약간 다르게 번역될 수 있다. 즉 '루드'(이주하다)에서 유래되었다면 '추방'을 그리고 '마라드'(반항하다)에서 유래되었다면 '핍박'을 각각 가리킨다.
애1: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1:8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 이곳에서 5절에서 언급되었던 예루살렘의 범죄에 대한 주제가 보다 더 상세하게 지적된다. 그리고 이 주제는 본서의 주요 신학적 문제들 중에 하난가 된다. 시인은 여기서도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여인을 예화로 사용하여서 설명하고 있다.
애1: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9
여호와여...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 선지자는 여호와께 호소하며 환난을 감찰해 줄 것을 간구하는데, 이 간구는 스스로 큰 체하는 적들의 무례에 근거해 있다. 아마 유다 백성은 그들의 운명을 다시 역전시켜 달라고 간청할 수도 없었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그 근본적 원인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상반절). 따라서 적들의 오만불손한 승리의 자부심을 징벌할 것을 요구하며, 백성들의고난을 제거해 줄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그 두드러진 예로서 앗수르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사 10;12의 내용을 들 수 있다. 한편 '스스로 큰 체하오니'란 말을 영역 성경 NIV, RSV 등은 '적이 승리했사오니'(the enemy has triumphed)라고 번역하였는데, 문자적으로 틀린 번역은 아니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적들의 승리로 인한 보응이 아니라, 승리 후에 보여준 오만불손한 교만으로 인해서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애1: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0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 '보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하마데하'는 여기서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드문 용례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그녀의 가치 있는 것들'로서, B.C. 586년 바벨론인들의 공격으로 성전에 있는 값비싼 장식품들이 모조리 강탈당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렘 52:17-23). 이스라엘 자손들조차도 제사장 신분이 아닌 이상 성소에 입실하는 것에 금지된 상황인데, 이교도들이 그 거록한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회중에 들 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았던 것이다.
애1: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1:11
보물로 식물들로 바꾸었더니 - 여기서 '보물'은 양식을 사기 위해 내주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을 말한다. 아마 이것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값비싼 보물이라 해도 양식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애1: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12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1) 한글 개역 성경이나 KJV, NIV, RSV 등의 영역 성경들처럼 의문문으로 옮기는 견해, (2)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혹은 '나의 슬픔이 너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등과 같이 평서문으로 번역하는 견해. (3) '너희에게 슬픔이 임하지 않게 하라'와 같이 명령문으로 옮기는 견해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들 중에서 첫 번째의 견해, 즉 의문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우리는 의문형을 가리키는 '헤'가 생략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Calvin).
애1: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13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 본 구절은 '그가 불을 내려보내시고 그것으로 내 뼈를 관통하게 하셨나이다'라고도 읽을 수 있다. 시인은 '그물'과 '곤비', '불'이란 개념을 사용하여서, 예루살렘을 뒤흔들었던 그 공포와 혼란상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은 예루살렘 성 깊숙이 번져 들어갔으며, 또한 그물이 쳐져 있어서 아무도 거기서 달아나지 못하게 되었었다. 한편, '이기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는 '짓밟다', '정복하다'는 뜻으로 바벨론 군대의 침탈을 암시하는 듯하다.
애1: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 맛소라 사본은 해석하기 어렵다. '묶고'로 번역된 '니쉬카드'란 말이 구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쓰였으며, 그 의미 또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70인 역(LXX)과 수많은 사본들은 자음들을 변형시켜서 '솨카드'란 동사로 읽고 있다. 이것은 '주의하다', '지키다'란 뜻인데, 이를 받아들여 본절 상반절을 다시 번역하면, '내 죄악이 주시되어 왔었다'(Watch has been kept over my transgressions)이다. 이 번역은 '멍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 마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알'로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이 말은 '무겁다'란 뜻을 가진 어근 '카쉐'에서 파생된 말로 읽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내 범죄의 멍에가 무겁다'로 번역될 수 있다. 아무튼 가 구절의 취지는 예루살렘의 죄악이 복합적이므로 마치 동물 목에 걸린 무거운 멍에처럼 그들을 짓누른다는 의미이다.
애1: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15
성회(모에드) - 는 일반적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모임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적군이 여호와의 호출을 받아 유다 용사들을 쳐부수는 축하 행사를 위해 모인 것을 가리킨다.
술틀 - 은 예루살렘의 저항이 분쇄되고 그 방어자들의 피가 마치 술틀에서 포도즙이 으깨져 나오는 것과 같다는 회화적 표현 수법이다.
애1: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16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 본절에는 예루살렘 함락에 따른 쓰라린 심정이 표현되고 있는데, 이들 침략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 그 고통을 더욱 쓰라리게 한 것이다. 원문에는 '내 눈에'(에니)란 말이 반복되고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은 초기의 역본들을 따라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
애1: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1: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 본절은 시인이 파괴된 이 도시 대신에 애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손을 펴는 것'은 슬픔과 탄원의 몸짓을 나타낸다.
애1: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거역하였도다 -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이런 참혹한 심판으로 몰아 넣었던 죄악에 대한 한탄의 노래가 나타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한다거나 또는 그 공의로우신 처사에 반발하는 듯한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오랜 반역을 꾀하던 이들 하나님의 백성은 마침내 처벌당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종교의 퇴폐적인 제사 의식에 빠져들음으로써, 이미 오염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심판에 대한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었던 것이다.
애1: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1:19
사랑하는 자 - 란 동맹국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바벨론 군대가 이 땅을 파괴시키고 있었을 때 유다를 도우러 오지 못했다. 특히 기대를 걸고 있었던 애굽도 갈대아군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 거짓 선지자들의 그럴듯한 거짓말에 현혹되어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했던 바로 그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포위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긴 하였으나 결국 양식을 찾지 못해서 죽어갔다.
애1: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1:20
예루살렘의 유일한 희망은 여호와께서 그 대적들을 심판해 주시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한편, 예레미야는 70년이 지난 다음에야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고 그 반면에 갈대아인들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했었다(25:12-14).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은 이 예언을 믿는 경건한 자들에게까지도 엄청난 충격이 될 정도로 처절했음이 분명하다.
마음이 괴롭고 - 이의 히브리어 '메아 하마르'는 문자적으로 '창자가 뒤틀린다'는 뜻으로서 극도로 괴로운 심경을 나타낸다.
애1: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1:21
여기서는 전날 선택된 백성을 위해 대적을 무찔러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이 언급되면서, 대적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즐거워한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본절 끝부분의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헤베타욤 카라타)라는 표현은 난해한 구문이다. 어떤 학자는 '반포하신 날'을 유다의 재앙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하나 거만한 이스라엘 대적들이 처벌을 받아 낮아지는 대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RSV 영역 성경은 페쉬타(Peshitta)역을 따라 이를 명령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NIV 영역본은 미래의 소망을 나타내는 희구적 가정법(optative suvjunctive)으로 이해하고서 이를 '그 날이 이르도록 하시기를'(May you bring the day)이라 번역하였다. 그런가 하면 KJV, ASV는 이를 예언적 완료형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대적들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처벌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이 처벌되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공의의 실현이 바로 심판이었다는 내용은 뒤에 이어지는 몇 장의 주제로 등장한다. 본절은 이런 의미에서 본서의 기본적인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 민족이 바라보고 기대를 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애1: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1:22
본절은 본장의 결론에 해당되는데,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즉 온 세계의 심판주 되신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처벌하였던 것과 같이 악하고 죄 많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그와 같은 심판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이런 탄원은 전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거한 것으로서, 사도바울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주의 약속을 상기 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롬 12:19).
[요한계시록 신약 히브리어성경] 종말에 일어날 지각 변동(계 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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