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열왕기상 17장 주석 성경말씀 중에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하나님은 가뭄을 주셔서 비가 내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니 하나님이 심판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하셨고 사르밧 과부도 엘리야를 만나서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왕상 17:1-24)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17:1
길르앗 - '길르앗'은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으로 여겨진다(Guthrie Jr.). 그렇다면 신앙의 암흑기인 아합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증거자 엘리야가 이 지방에서 배출된 점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한편 길르앗(Gilead)이라는 지명은 넓게는 남쪽 아르논 강에서 북쪽 야르묵 강에 이르는 요단 동편 일대를 가리킨다(Cohen). 이곳은 곡창 지대와 목축지로 유명하였는바 일찍이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이곳을 자신들의 기업(基業)으로 요구할 정도였다(민 32:1-5).
디셉 - 디셉(Tisheb)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여섯 번이나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21:17, 28; 왕하 1:3, 8; 9:36). 다만 길르앗 북방 산악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리스팁(Listib)일 가능성이 있다(Cohen). 한편 외경 토빗서 1:2에는 납달리에 있는 게데스(Kedesh)의 남쪽 한 지역이 '디셉'으로 언급되고 있다. 만일 '디셉 사람'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엘리야는 디셉에서 출생하여 길르앗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N. Glueck, 'Explorations in Eastern Palestine IV).
엘리야 - '엘리야'( 또는 엘리야후)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엘리야의 생애는 그 같은 이름의 뜻을 구현하는 데 바쳐진다. 한편 성경에는 엘리야(Elijah)의 가계(家系)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B.C. 9세기의 유명한 선지자로서 아합 왕(B.C. 874-853) 때부터 아하시야 왕(B.C. 853-852)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가 엘리야인지 물어볼 정도였다(요 1:21).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 짧은 어구에 함축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즉 본절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참 신은 여호와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말이다. (2) 그리고 그 여호와가 바로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다수인 당시의 형편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현주소와 입장을 밝히는 신앙 고백인 동시에 자신이 여호와께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大使)의 자격임을 밝히는 말이라 하겠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러한 표현은 구약 시대 당시 일반적인 맹세의 형식이긴 하다(18:10; 렘 5:2; 16:14; 호 4:15). 그러나 단지 상투적 어구만이 아니고 당시 상황하에서의 진솔한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절실해진다. 즉 바알 및 우상 숭배 세력이 지배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있는 참 신은 여호와'라는 이 어구의 한자는 담대한 도전의 성격을 띤 것이라 볼 수 있다.
내 말이 없으면...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단비는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로 언급되고 있다(신 11:11, 14; 욥 5:10; 28:26; 36:27; 시 147:8). 그리고 그 반면에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하늘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아 생명을 쇠약하게 하며 땅을 메마르게 하리라는 경고도 아울러 언급되어 있다(신 11:17; 28:24). 그런데 수년간 비가 없으리라는 본절의 가뭄 예언 역시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다(16:26-33).
더욱이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한 가뭄이 가시지 않으리라는 엘리야의 선언은 바알 숭배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왜냐하면 당시 바알(Baal)은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 주관하는 신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같은 능력조차도 여호와의 장중에 있다는 이 예언은 곧 바알이 생명 없는 거짓 신임을 폭로하는 것이다(Lange).
왕상17: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7:2
여호와의 말씀이...임(臨)하여 - '임하여'에 해당하는 '하야'는 원래 '되다', '존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정적(靜的)인 상태를 의미하기보다는 대단히 역동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기에 본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 그저 '있다'라고 하지 않고 '오다', '임하다' 등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편 한 시대의 다수를 홀로 상대해야 할 신앙의 용사 엘리야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수시로 말씀을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지시하셨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소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은혜 가운데 주셨음을 의미한다.
왕상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17:3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 앞서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경고했을 것이다(1절).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합의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성경에서 '동으로'는 일반적으로 요단 강 동편을 말한다.
요단 앞 - '앞'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 페네'는 창 16:12에서 '동방'으로 번역되었는데 여기서도 '동쪽'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할 듯하다(Keil & Delitzsch, Pulit Commentary). RSV 등 대다수 영역본과 한글 공동 번역도 이를 '동쪽'(east)로 번역하고 있다.
그릿 시냇가 - '그릿'(게리트)은 '분리', '잔절'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내는 어떠한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 구실을 했던 것 같다(Hammond). 한편 이 시내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입증되지 않고 있으나 엘리야가 길르앗 사람인 점(1절)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요단 동편 길르앗의 동굴 지대에 있는 시내 중 하나일 것이다(Cohen).
숨고 - '숨고'는 문자 그대로 '피하다', '감추다'는 뜻의 '사타르'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동사에서 엘리야의 심판 예언(1절)이 있은 후 아합과 이세벨의 즉각적인 위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입장에서 엘리야의 선포는 민심을 교란하는 유언비어요 반 정부적인 도전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위협만이 피신의 원인은 아니다. 아직은 여호와 신봉자와 이방신 숭배자 간의 정면 대결(18장)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엘리야에게 몸을 숨기도록 명하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R.D. Patterson).
왕상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17:4
까마귀들을 명하여 - 혹자는 까마귀가 부정한 조류(레 11:5)라 하여 '까마귀'(오르빔)를 '아랍인들'(아르빔)이나 '상인들'(오리빔) 또는 '오렙 사람들'(오레빔)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Hammond, Kimchi).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오히려 본문은 까마귀로 읽어야 할 강조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온통 바알 숭배로 돌아선 시점에 여호와 신앙의 용사 엘리야를 지탱해 준 것은 까마귀, 이방인 과부(9-16절) 등이라는 역설의 강조점을 본문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Lange, H. Austel,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37). 즉, 이스라엘이 부정한 것들로 여긴 요소들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정화에 한몫 기여한 것이다.
왕상17: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17:5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 엘리야가 예언 선포 이후(1절) 이처럼 잠적해버린 사실을 놓고 그 당시 비웃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피신을 수치로 꺼리지 않고 즉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사람의 취향과 기질에 영합하여 영웅이 되기보다 자신을 잊은 듯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갈 1:10).
왕상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17:6
까마귀들이...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 까마귀는 본래 매우 게걸스러운 날짐승으로 시체와 썩을 것들을 즐겨 먹어치운다. 그런데 그런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고스란히 날라주었다는 데에서 기적적인 성격이 한층 더 강조된다. 한편 이처럼 까마귀도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엘리야에게 깊은 감명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즉 여호와 신앙의 열의가 대단한 엘리야의 눈에는 당시 우상 숭배에 열중하는 백성의 모습이 마치 부패한 시체를 탐하는 까마귀 떼처럼 가망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까마귀조차도 순종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의 강권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엘리야의 심령에 선지자적 소명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왕상17: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 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17: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 18:1과 야고보서 5:17에 의하면 당시 이 같은 가뭄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상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7:8
엘리야의 식수(食水)였던 그릿 시냇물(3절)이 말라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를 위하여 새로운 공궤지(供饋地)를 일러주신다. 그곳은 곧 사르밧(Zarephath)으로 (9절) 엘리야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엘리야가 그릿 시내에서 물을 찾아 사르밧으로 이동한 길을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갈다.
왕상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7:9
사르밧 - '사르밧'(차르파트)은 '염색하다'는 뜻에서 온 명칭이다. 따라서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등과 마찬가지로 베니게(Phoenicia)의 명물인 염료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읍은 헬라어로는 '사렙다'( )로 불리는데(눅 4:26) 오늘날의 수라펜드(Surafend)로서 두로와 시돈 가운데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37). 그런데 이곳은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 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이다(16:31). 결국 이세벨이 여호와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이 숨어버린 셈이다. 이 점은 마치 바로(Pharaoh)의 궁전에서 온전히 양육받은 모세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대적자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기막힌 역설이다(출 2:10).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한 과부에게서 찾아졌다는 것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크나큰 수치이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증거해 준다. 한편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알마나)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적 지위가 형편없는 존재였다(신 24: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약한 자를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인바(고전 1:26-31)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할 것이다(Matthew Henry).
공궤하게 - '공궤'(供饋)란 문자 그대로 '음식을 제공함'(providing with food)을 말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공궤하게'에 해당하는 원어 '카르케레카'는 '간직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단순한 음식 제공을 넘어서 '정성을 다해 보살핌'에 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왕상17: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7:10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 이는 거리에 흩어져 있는 모든 나뭇가지를 주워 땔감을 삼을 수밖에 없는 과부의 극빈을 나타낸다. 만일 과부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종을 부려 땔감을 해오게 하였거나 아니면 시장에서 땔감을 구입하였을 것이다(Matthew Henry).
물을...나로 마시게 하라 -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낯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여간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시험(test)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붓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창 24:17; 요 4:7).
왕상17: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7:11
청컨대...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 앞서의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좀 더 당돌한 부탁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더욱 식량란 열악한 형편인 과부에게 떡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의 다소 무리한 부탁은 자신을 공궤 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으니(9절) 사르밧 과부는 이 두 번째 시험마저도 통과하여야 했다(Bahr).
왕상17: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7:12
당신의 하나님 - 어떤 주석가들은 과부의 이 같은 말에서 그녀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ange). 그러나 도리어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즉 우리는 그녀가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이라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Pulpit Commentary).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전통적으로 교류가 많던 베니게의 한 여인으로서 이 과부는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 신을 호칭한 것뿐이다. 사실 이 과부가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엘리야의 말을 청종한 그 순간이다(14, 15절). 아무튼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치 않은 반면 이방인 과부는 선뜻 그 말씀을 받아들인 점이 주목된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봉사자가 누군지 분명히 확인하였을 것이다.
나는...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까닭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는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떡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과부에게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눅 4:24-26; 21:2).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포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역사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사 42:16; 마 4:16; 골 1:13).
왕상17: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7:13
두려워 말고 - '두려워'에 해당하는 '야레'는 '무서워하다' 외에도 '존경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지혜의 토대로서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이라는 이상적(理想的)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단순한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전환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이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본절에서 엘리야가 지적하는 과부의 두려움은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서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서의 극복이란 이성이나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이 높은 정서의 대체로서 완결된다. 즉 과부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될 때 비로소 온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먼저...그 후에 - 장차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에의 두려움으로 이행, 즉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개재된다. 엘리야의 말속에서 그러한 결단의 촉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이다. 최후의 양식,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치라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왕상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처럼 엘리야가 '너의 하나님'이 아닌 객관 서술형의 '이스라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르밧 과부가 이방인이며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종한 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시사해 준다(Ham-mond).
왕상17: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7:15
저와 엘리야와 식구 - 12, 13절에 의하면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본절에서 '식구'(바이트), 즉 권속(眷屬)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축복의 소식을 듣고 온 그녀의 친척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Lange, Pulpit Commentary).
여러 날 - '여러 날'(야밈)은 며칠 정도가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14절에 따르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시기는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적어도 2년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은 3년 6개월 간이나 지속되었으니(약 5:17) 그동안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기간(2-7절)을 빼더라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2년 이상 공궤(供饋)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이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으로써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마 10:41)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쳤다.
왕상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16
통의 기루가...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혹자는 본절에 묘사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익한 노릇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말씀을 확실히 이루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 현상 자체의 건조한 설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본절의 기적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왕하 4:1-7)과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한다(막 6:41-43).
[여호수아 6장 히브리어 성경말씀] 여리고성 정복 명령(수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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