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느헤미야 6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역사에 새벽을 가져온 사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방해꾼도 있었지만 성벽을 52일 만에 완공하게 됩니다. 느헤미야의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유다 백성들이 함께 동참했기 때문에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함께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열정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역사에 새벽을 가져온 사람(느 6:1-19)
세 가지 시험과 극복
본문은 예루살렘 성의 건축이,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서 실로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끝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성 역사가 오십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더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5,16절). 예루살렘 성 건축을 방해하던 대적들까지도 이 기적적인 사역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이루셨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또한 이 성의 건축이 완성되기 바로 직전에 느헤미야에게 닥쳐온 시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성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습니다. 이제 문짝만 달면 됩니다. 느헤미야는 성을 건축하던 중 유다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이제 성 건축이 거의 완성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척척 진해되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는데 위기가 찾아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는 가장 중대한 위기는 그들의 승리 이후, 그들의 축복 이후, 그들의 부흥 이후, 일이 잘 진행되어 가던 중에 닥쳐오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의 450 대 1의 극적인 결전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승리를 거두어 바알의 선지자들을 물리친 사건 직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왕상 19:4). 엘리야의 이런 좌절은 성공 바로 다음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인생 최대의 위기는 그가 사방의 모든 적들을 평정하고 그 자신이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능히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군대를 이루고 있을 때 다가왔습니다. 자기 부하들을 전쟁터에 다 내보낸 후, 오래간 만에 느긋하게 궁중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삶 전체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던 도덕적인 위기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위기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이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계속되다가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공한 다음에, 우리가 축복을 누린 다음에, 모든 것이 잘 진행되던 바로 그 다음 순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무서운 위기의 시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느헤미야에게도 성벽 건축의 완성을 이룰 무렵,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넘어지지 않고 그러한 위기들을 슬기롭게 극복했습니다. 그는 어떤 시험을 당했으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본문에서 살펴봅시다.
1. 첫째 시험과 그 극복
1절에서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라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
적들이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요청합니다. 어떤 이유로 만나자고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성을 쌓느라고 수고해서 이제 성이 거의 완성되어 가니 이제는 우리가 오노 평지에서 만나서 마음을 풀고 함께 휴식을 취하자고 한 것인지, 혹은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테니 오노 평지에서 만나서 평화를 맺자고 하며 평화의 회담을 제의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보았듯이 적들이 그렇게 한 것은 느헤미야를 도우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를 헤치려는 저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음모였습니다. 만일 적의 이런 저의를 깨닫지 못한 느헤미야가 오노 평지를 갔더라면 성 역사가 완성 단계에 있는 이 중요한 순간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니, 느헤미야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러한 음모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첫째로, 그는 분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적들의 저의가 어디에 있다는가를 분별했습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산발랏과 게셈이 만나자고 하는 것은 실상은 자기를 해치고자 함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삶을 멍청하게 살아야 할 거야. 그래서 당신 자신의 의견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할걸. 사람들에게 쉽게 잘도 속아 넘어갈 거야.}
이런 생각이 그리스도인에게 은근한 압력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결코 멍청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는 적의 음모를 알았습니다. 성경에서도 분별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1장 10절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고린도전서 12장 7-10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요한일서 4장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진해되고 있으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를 알고 분별해야 합니다. 그는 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어 복수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일 복수에 몰두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그들을 오히려 함정에 몰아넣을 기회를 가지고 일터를 떠났다면 성 역사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수하려는 마음은 그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복수는 복수하는 자와 복수받는 두 사람을 꼭 같이 비참하게 만듭니다. 둘 다 치사해지며 둘 다 성품이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롬 12:19).
성경은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합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에 속합니다. 하나님만이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가장 정확하게 시비를 가리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국에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직접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 되며 복수하는 동안 비참해지는 것은 오히려 나 자신입니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성을 건축하는 일이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우선순위를 알았던 것입니다. 성을 지어야 합니다. 복수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현재 자기가 당면한 문제임을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첫 번째 시험이 닥쳤을 때 그 의미를 분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사십니까? 나를 중심으로 일단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때, 내 삶이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고통 속으로 빠져들려 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느헤미야의 태도에서 배웁시다. 그 상황을 잘 분별하십시오. 그 상황이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이라도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이 해야 할 일에 계속 몰두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그 상황에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2. 둘째 시험과 그 극복
이번 시험은 좀 더 악랄한 시험입니다.
"산발랏이...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잇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망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5-9절).
적들은 이제 악성 루머(rumor)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음모에 말려들지 않으니까 적들은 두 번째 음모를 꾸며 느헤미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사람들을 선동해서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한다.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자기의 세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그가 직접 왕이 되려고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엄청난 소문을 유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악한 소문에 휘말려 본 경험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당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이유로 헛소문을 퍼뜨려 당신을 난처한 궁지에 몰아넣어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밤새 뒤척이던 경험이 당신에게도 있었는지요? 그렇다면 이 느헤미야의 사건을 당신은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성서적인 속담인가 봅니다. 느헤미야의 경우는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니까요. 느헤미야에게는 왕이 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오로시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는 의도로 이런 모략을 꾸몄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혀를 가지고 저지하려는 범죄에 대하여 신랄한 경고를 합니다.
"...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약 3:5,6).
작은 불씨가 온 나무와 숲을 태우듯이 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준다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의 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짓말과 거짓 선전, 중상모략을 통해서 상처를 입고 가슴이 찢어지고 공동체가 파괴되고 가정이 더럽혀지고 교회의 질서가 유린되고 한 나라가 파괴되는 어려움을 얼마나 겪었습니까?
수년 전에 읽었던 모르간 블레이크의 글 중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갖고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눌러 이길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한다. 나는 어떤 건장한 사람의 건강도 파괴할 수 있다. 나는 어떤 담대한 사람의 인생도 파괴할 수 있다. 나는 날개를 타고 바다를 여행한다. 순결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며 정의로운 사람도 내개는 무력하다. 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경멸한다. 나는 나의 희생자를 전 역사에, 전 나라에, 전 세계에 갖고 있다. 나는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용서하지도 않는다. 내 이름은 중상모략이다." 이 모략으로, 이 혀의 범죄로 우리는 얼마나 시달려 왔습니까? 아니, 우리들 자신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사단의 도구가 되어 남을 중상하고 모략한 적은 없습니까?
청교도는 자신이 중상모략의 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어떤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을 때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 자기 행동의 원칙을 결정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남이 잘못되었다는 소문이나 소식을 들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청교도는 자기 행동의 원칙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남에 관한 나쁜 소문을 듣게 되면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로 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소문인가?'
둘째로, '내가 이것을 본인에게 확인했는가?'
셋째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들은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내 형제들에게 유익한가?' 그는 이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자기의 혀와 언어생활을 조정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학생 하나가 자기 어머니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도둑질과 거짓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죄예요?" 그의 어머니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아마 도둑질이 더 무서운 죄겠지.} 그러자 아이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엄마,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도둑질한 물건은 다시 돌려줄 수가 있지만 남에 관해서 잘못 말한 거짓말은 다시 돌려줄 수가 없잖아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명예를 더럽힌 다음에 그것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소위 저어널리즘의 이름으로 이런 행패가 가해질 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인생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비판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에 덕을 끼치는 비판을 얼마나 정확하게 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충고합니까?
에베소서 4장 29절
"무릇 더러운 말을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장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더러운 말에 대한 경고를 하고 난 바로 직후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언어생활, 남을 해하는 언어생활이 성령을 근심케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6장 16절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시편 141편 3절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골로새서 4장 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을 고르게 함같이 하라." 자기를 둘러싸고 날조된 헛소문이 돌아다니고 잇었을 때에 느헤미야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며 마침내 이 시험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첫째로, 그는 사실을 밝히고 지나친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희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8절). 그 일은 사실이 아니라고 그는 사실을 사실대로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아우성치며 긴 소리로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변명이나 해명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 문제로 기도했습니다.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9절).
느헤미야는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기도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장황한 해명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방어나 변명 또는 해명보다 더 위대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나를 아시는 하나님, 나의 결백을 아시는 하나님, 내 마음과 이 사건의 진상을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기의 마음을 쏟아 놓고 기도했습니다.
셋째로, 그는 자기 자신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건이 닥쳐왔다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할까요? 나를 억울하게 하는 잘못된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 나의 이 억울한 누명을 속히 벗겨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대항해서 음모를 꾀하고 있는 저들을 멸하소서." 이런 기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의 손을 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즉, 자기의 손을 힘 있게 해서 예루살렘 성 건축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의 인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가 만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면, 자기의 명성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세우려는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궁지에 빠진 자기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예루살렘 성의 건축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게 하옵소서."
그의 기도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대해서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사역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다면, 주의 이름 앞에 찬미와 존귀와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퍼뜨리는 모든 소문을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자기의 삶을 철저하게 형성했던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그래서 자기가 조롱당하고 비웃음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주신 그 일에 온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가 할 일을 다하게 하옵소서. 맡겨 주신 그 일을 다하여 주 앞에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서 느헤미야는 이 두 번째 시험도 훌륭하게 극복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3. 셋째 시험과 그 극복
좀 더 간교하고 사특한 시험이 느헤미야에게 다가왔습니다.
"이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10절). 스마야라는 선지자 한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적들이 너를 죽이려 하니 성전 안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머물자.}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전에 머물러 있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일을 하고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들뿐입니다. 민수기 18장 7절 이하에서 여호와께서는 레위 자손인 제사장들에게 직임을 맡기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거기 가까이하는 외인은 죽일지니라." 적들은 예언자를 통해서 함정을 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깨달은 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그는 스미야가 적들에게 뇌물을 받고 이런 가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만일 성전에 들어가서 은신하게 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성전에 머무는 느헤미야를 죽여라!} 느헤미야는 이 마지막 시험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첫째로, 그는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깨달은즉"이라고 말씀합니다. 그에게는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분별력을 요구하십니다. 분별력을 얻기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명철을 구하십시오. 분별력을 구하십시오. 우리는 삶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예지가 필요합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예언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록 하는 것을 보고 이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회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는 명령이 들려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이런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전하거든 이것을 단순한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이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그가 주의 이름으로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이나 인간의 말을 전파한다면 "아니오!"라고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만일 종교 개혁가 루터가 사람의 말보다 성경 말씀에 더 커다란 권위를 부여하는 그런,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로마 가톨릭의 교권을 향해서 그가 어떻게 "아니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주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사람에게서 진리를 구하기보다는 성경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이 말씀에서 삶의 표준을 구하고, 이 말씀에서 결단을 구하고 이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종교의 이름으로 거짓이 난무할 때 그리고 종교의 가면을 쓴 사람들을 통해서 거짓된 것들이 나를 미혹할 때 나는 이것들 앞에 서서 강력하게 '아니오'라고 선언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렵니까? 느헤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려 했기 때문에 세 번째 시험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그는 이 문제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14절).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느헤미야서의 곳곳에서 보이는 느헤미야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는 얼마나 철저하게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느헤미야도 인간이므로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오해와 박해,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면서 느헤미야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예언자를 몰아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다시 그 문제를 가지고 문제의 해결사이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상처와 괴로움과 연민과 고통과 분노를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와서 자기 마음에 응어리진 그 모든 아픔과 상처와 분노들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마음을 쏟으십니까?
넷째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계속했습니다.
"성 역사가 오십이일만에 엘룰월 이십오 일에 끝나매" (15절).
처음에 그가 성 역사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폐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을 복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거의 불가능했던 역사가 마침내 끝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잇습니다. 느헤미야는 세 가지 시험을 거치는 동안에도 계속 성 쌓는 일에 열중했던 것입니다.
4. 결론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예루살렘 성의 건축이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랐을 무렵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의 시험이 닥칩니다.
첫째 시험은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하는 적의 음모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지혜롭게도 적의 요청에서 숨은 뜻을 분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관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단지 자신이 맡은 일만을 열심히 하여 이 첫째 시험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둘째 시험은 느헤미야에 대한 중상모략입니다. 그리고 그는 적의 중상모략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사실만을 밝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셋째 시험은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 또한 속임수라는 것을 분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더 원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꾸준하게 일해 왔기 때문에 마침내 성벽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 주석 성경말씀]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왕상 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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