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자료

성경의 겸손에 관한 설교예화

체데크 2022. 12. 17. 08:27
반응형

사람이 살아가면서 겸손하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사람은 일이 잘되고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하게 됩니다. 우월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지만 육체의 몸으로 오셔서 겸손하셨습니다. 겸손의 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겸손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겸손에 관한 설교예화자료

 

나의 나 된 것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인간은 누구나 다 제 잘난 맛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는 누구나 자존심을 갖고 사는 인생이란 뜻일 것입니다. 이런 자존심을 갖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물질이 부족하고 부귀와 명예가 떨어진다 해도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자존심은 어느 정도 우리를 버티게 하는 큰 바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이 나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떳떳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좋은 점도 있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심으로 바뀌고 고집과 완고로 변해버릴 경우가 종종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마도 자존심과 자만심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를 잡아들이는 데 쓰임을 받았지만, 자신에게 직접 나타나신 주님을 뵈온 후에 이제는 겸손해져서 맨 나중에 만삭 되지 못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부르게 되고 자기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자기가 아니요,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사도 바울의 간증과 같이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힐 수 있을 것인지, 다시 한번 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나 됐다고 믿고 간증할 수 있는 자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것이고 남은 여생은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기를 잘 지키면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이 사회에 빛을 발하고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밀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고요함이 다. 그것은 기대하는 것도 없고, 내게 일어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내게 해로운 일들을 느끼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을 때와 내가 비난받고 힐책받을 때의 편안함이며,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어려울 때 내가 문을 닫고 들어가 혼자 나의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어느 깊은 침묵의 바다와 같은 평화로움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안에 축복받은 보금자리를 갖는 것이다. 」- 엔드류 머레이 -

칠장이 학장

작은 신학교의 이야기입니다. 그 학교의 학문적인 수준은 매우 놀랄만했으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부자가 학교를 찾아와 벽에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백발의 한 남자에게 학장실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 백발의 남자는 학교 안의 한 건물을 가리키면서 정오쯤 돼야 거기에 학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방문객이 그 시간에 맞춰 학장실을 방문했더니 비록 의상은 다르지만 조금 전에 운동장에서 페인트 칠을 하면서 자신과 말을 나눈 바로 그 사람이 문을 열었습니다 방문객은 초대를 받아들여 칠장이 학장과 점심을 하며 대학의 필요한 것들에 대해 묻고 작은 헌금을 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방문이 지난 이틀 후 5만 달러에 해당하는 수표가 담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대학 학장의 지위에도 거만하지 않고 작업복을 입고 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하는 한 인간의 겸손한 모습은 부자의 돈 주머니의 끈을 풀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성자가 된다는 것

옛날 어떤 곳에 성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경건하고 덕망스러워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까지도 이 성자의 생활에 감동을 받아서 땅으로 그를 찾아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 " 그러자 성자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들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인간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그대가 말한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 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성자는 대답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 천사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 성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예, 한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

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믿음

"내가 이 우주에 대한 진리, 우주의 진리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저 바닷가에서 자갈돌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보다 너 적거나, 혹 비슷할 것이다."라고 뉴우턴은 말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겸손합니다.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이다. " 또한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첫째는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겸손은 모든 생활의 뿌리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늙은 신학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자만심을 깨뜨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을 그저 그대로 읽었다. 그러다가 대학과 신학교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 종교학을 배우고 성경 비판 서적을 배우게 될 때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다.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이제는 그저 성경 그대로를 믿는다."

겸허한 마음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기는 좋아하되 듣기는 싫어합니다. 자기주장을 내 세우는 데는 열을 올리면서도 남의 의견을 듣는 데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사정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보면 인간다운 훈훈함과 친근감을 느낍니다.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흥미와 열심을 가지고 들어주시는 선배 목사님을 대할 때는 훈훈한 애정을 느끼며 마음으로부터의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신학적인 입장은 전혀 다르면서도 때때로 전화를 걸고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모 교수의 모습에서 훈훈한 인간미를 느낍니다.

학생들의 소리에는 귀를 막아 버리고 배우기만 하라고 호통치는 권위주의적인 교수는 학생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결국 학생들의 불신과 배척을 받게 됩니다. 교인들의 사정에는 아랑곳없고 일방적으로 강단에서 설교만 하는 목사는 교인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는 결과를 빚고 맙니다. 아내의 사정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남편, 남편의 사정을 들어주지 못하는 아내는 불만과 불편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그 가정을 불행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설득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하는 겸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는 사마리아인의 열린 마음이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그의 사정과 소원에 귀를 기울이던 깨어진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범죄의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된 한 여인의 호소와 죽은 아들의 시체를 메고 무덤을 향해 통곡하며 걸어가던 한 과부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불쌍히 여기시던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와 나는 하나

옛날 러시아에 니콜라이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애로운 선정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평민복으로 갈아입고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는 중에 어느 두 갈래길 앞에서 지나가던 군인 하나를 붙들고 길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군인이 황제 인지도 모르고 어찌나 거만한 자세로 대답을 하는지 황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당신의 계급은 어떻게 되지요?" 물었더니 이 군인은 산이 나서 배를 내어 밀면서 "자네가 한번 맞춰 보겠나?" 그때 황제는 겸손하게 군인을 향하여 "상사이신가요?" "아니, 그 윌쎄." "그러면 소위이십니까?" "아니, 그 위야." "그러면 대위입니까?" 그때에야 이 군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 내가 대위야." 하면서 더욱 배를 내밀었습니다. 그때서야 황제는 "네? 대위세요?" 하면서 돌아서려고 하자 "아니 자네도 군급이 있나 보지?" "네 대위님이 한번 맞춰보세요?" "그러면 자네 일병인가?" "아니 그 월세." "그러면 중위인가? " "아닙니다. " 이때 대위는 피우던 담배를 뽑아 던져 버리고 경례를 붙이면서 "그럼 소령이십니까?" "아니, 그 위요." "아이고, 중령이십니까?" "그보다 썩 위요." "아니 그러면 대장 각하십니까?" "아니, 그 위요." "아니, 그러면 원수이십니까?" "아니, 그 위요." 원수보다 위라면 니콜라이 황제뿐이니 "폐하여!" 하면서 부들부들 떨 때 니콜라이 황제는 그를 일으키면서 "일어나라! 너나 나나 한 가지야! 우리 위에 하나님이 보고 계셔."하고 말했습니다. 겸허한 왕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갈멜산의 소나기」 中-

겸손한 성직자

노예 상인이었다가 설교자이며 기독교 시인이 된 존 뉴튼(John Newton)의 임종 때 젊은 목사가 그를 방문해서 하나님의 포도원의 훌륭한 일꾼을 잃게 됐다고 깊은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러자 그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대답하기를 "맞소, 내가 먼저 가지만 당신도 곧 올 것이오, 당신이 오면 우리들의 우정으로 당신은 분명 나를 찾을 것인데 내가 어디에 있게 될는지 미리 말해 두겠소!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구원하신 도둑의 발아래 앉아 있을 것이오! " 위대한 그도 바울처럼, 놀랄 만한 축복으로 구원받은 큰 도둑의 부류에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사람이 설교하지만 아무도 실천하지 않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하나의 미덕이다. 주인은 그의 하인에게, 속인은 성직에게, 그리고 성직자는 겸손이란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한다(J. 셀든)."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한 유서 깊은 교회는 문이 매우 작고 들어가는 입구가 낮아 이곳을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낮게 숙여야만 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주의 전에 들어갈 때 갖추어야 할 성도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겸손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가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주의 전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겸손의 의미를 표현할 유익한 이야기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웃집에 갔었는데 그의 방문이 끝난 후 그 이웃 사람이 집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나가는 길엔 천장보다 낮은 대들보 하나가 중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이 "머리를 숙이세요! " 하고 외쳤지만 너무 늦어서 프랭클린은 그만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이웃 사람이 프랭클린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머리를 자주 숙이면 숙일수록 그만큼 부딪치는 일이 없을 걸세." 이 말이 프랭클린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자만심이 그의 심중에 떠오를 때에는 항상 말을 기억하고 머리를 숙일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과대평가는 죄(?)

전한의 손보가 문관 시험에 급제하여 지방 관리가 되었던 때입니다. 상사인 장충은 그의 재간과 학문을 인정해서 자기 자식의 가정교사가 되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손보는 아무래도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의 결점을 들추어 말하고는 자기가 얻었던 관직마저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있다가 다시 관직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충은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하여 가까운 사람을 보내 사유를 물었습니다. "자네는 장충 씨가 모처럼 집까지 마련하였는 데도 스스로의 결점을 말하고 그 자리를 사임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것은 자네의 결벽증에서 온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랬더니 손보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지금 내가 복직한 직위는 속된 직업 중에 속된 직업입니다. 그것을 기꺼이 맡은 제가 어떠한 인간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시겠죠. 이러한 저에게 장충 씨는 자제분의 공부를 시켜 달라고 저에게 편리한 주택까지 준비하시려 하였으니 제가 어찌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를 과대평가하시면 안 됩니다." 진정으로 익은 벼는 이렇게 머리를 숙이는 법입니다. 손보의 이 일화는 외형적 자만심에 빠져 자신을 과대평가하길 좋아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겨줍니다.

겸허

주(周) 나라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성왕이 즉위하였습니다. 무왕의 동생 주공은 노나라 영주의 지위를 사양하고, 성왕의 보좌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나라에는 자신의 아들 백금을 봉하였습니다. 백금이 임지로 떠날 때 주공은 백금에게 이러한 교훈을 하였습니다.

"나는 문창의 아들이요, 무왕의 동생이며, 현재 왕 성왕에게는 숙부가 되는 사람이므로 나의 지위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찾아오면 이를테면 얼굴을 씻고 있다가도 머리카락을 쥔 채 몇 번이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식사 중이라도 몇 번이고 입 속의 음식물을 뱉으면서 그 사람을 맞이한다. 그 까닭은 그만한 사람들을 언제나 측근에 두고 싶은 일념 때문이다. "

이러한 현명한 자에게 어찌 사람들이 안 모이겠으며 현자라 아니하겠는가?

헌신의 뿌리는 겸손

전에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 옆엔 흑인 청년이 하나 그저 서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저 서 있을 것이 아니라 나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이 흑인이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 합니다. 일은 공부 안 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하는 말이 "나도 학생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학식에 따라 하는 일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박사 학위가 몇 개씩이나 있었던 슈바이처 박사는 어떻게 그 오지의 땅 아프리카에서 헌신적인 선교 생활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배운 게 없어 선가요? 아닙니다.

여러분!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도리어 열매 없는 가라지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열매 맺은 만큼 고개를 숙여 헌신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됩시다.

구라도스돈과 마부

영국의 대 정치가인 구라도스돈은 높은 학벌과 지위로 그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는 타고난 달변으로서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유명해졌습니다. 그가 영국 내각 수반으로 있을 때 그를 태워가지고 다니던 마부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바쁜 틈을 쪼개어 마부에게 문병을 가고 그의 병의 차도를 수시로 알아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정부의 중대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의논하던 때에 마부가 임종을 맞게 되었다는 급보가 왔습니다. 그는 하던 일을 제치고 마부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바쁜 중에도 마부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면서 그의 임종을 지켜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늙은 마부는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늙은 마부의 임종을 지킨 정치가의 모습이 겸손하다 못해 겸허스럽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평신도 성경공부 설교말씀]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무엇인가?

 

[평신도 성경공부 설교말씀]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무엇인가?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 용어가 많이 나온다. 교회에 처음 나온 평신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저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가 있

cdk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