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요단강으로 나와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때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요한이 보았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율법주의 신앙을 하면 안 됩니다. 오직 복음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마 3:5-12)
5절 토테 엑세포류에토 프로스 아우톤 헤에로솔뤼마 카이 파사 헤 이우다이아 카이 파사 헤 페리코로스 투 이오르다누
성 경: [마3: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아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 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6절 카이 에밥티존토 엔 토 이오르다네 휘프 아우투 엑소몰로구메노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성 경: [마3: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 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막 1:4와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아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요단강 - 히브리어 '야라드'(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훗(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중 한 여울에 자리 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세례를 받더니(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써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 받음으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 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7절 이돈 데 폴뤼스 톤 파리사이온 카이 사드두카이온 에르코메누스 에피 토 밥티스마 아우투 에이펜 아우토이스 겐네마타 에키드논 티스 휘포데익센 휘민 퓌게인 아포 테스 멜루세스 오르게스
성 경: [마3: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바리새인(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운동 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B.C. 159-143) 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이며, '바리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 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 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 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대 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 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사두개인(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 '체디크',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오는 것을(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 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러운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 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계 6:16, 17).
8절 포이에사테 운 카르푸스 악시온 테스 메타노이아스
성 경: [마3:8]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운) 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악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 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칼푸스)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9절 카이 메 독세테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 파테라 에코멘 톤 아브라암 레고 가르 휘민 호티 뒤나타이 호 데오스 에크 톤 리돈 투톤 에게이라이 테크나 토 아브라암
성 경: [마3:9]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 신학(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 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 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 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돌들로도(에크 톤 리돈투톤) - 이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 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10절 에데 데 카이 헤 악시네 프로스 텐 리잔 톤 덴드론 케이타이 판 운 덴드론 메 포이운 카르폰 칼론 엑콥테타이 카이 에이스 퓌르 발레타이
성 경: [마3:10]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이미...놓였으니 - 메시아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 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11절 에고 멘 밥티조 휘마스 엔 휘다티 에이스 메타노이안 호 데 오피소 무 에르코메노스 이스퀴로테로스 무 에스틴 후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 타 휘포데마타 바스타사이 아우토스 휘마스 밥티세이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
성 경: [마3:1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 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와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 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 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아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아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아의 전구(前驅) 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 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감당치 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실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 가고 그 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 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사인 '엔'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12절 후 토 프튀온 엔 테 케이리 아우투 카이 디아카다리에이 텐 할로나 아우투 카이 쉬낙세이 톤 시톤 아우투 에이스 텐 아포데켄 토 데 아퀴론 카타카우세이 퓌리 아스베스토
성 경: [마3:1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아는 '타작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 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 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디아카다리에이)의 '디아'와 '태우시리아라'(카타카우세이)의 '카타'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신명기 2장 강해설교말씀] 가데스부터 헤스본까지(신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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