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갈라디아서 4장 성경 좋은 말씀]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갈 4:1-31)

체데크 2021. 12. 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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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하갈과 사라를 비교하면서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자유함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종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죄악 가운데 고난당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의 삶을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입니다.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는 이 땅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갈 4:1-31)

1-11,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과 율법의 관계를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 아들과 그의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의 관계로 설명한다.

[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원어(타 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는 ‘이 세상의 초보적인 것들이라는 뜻으로 율법을 가리킨다. 상속받을 아들은 장차 아버지의 모든 유산의 주인이 될 것이지만, 어릴 때는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며 그의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의 법이 정한 나이가 되면 그 아들은 자기의 권리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즉 구약시대에는 율법 아래 복종해야 했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곧 그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1:1; 17:5).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이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3:15).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또한 예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영혼과 몸을 가진 참 사람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또한 율법 아래 나셨다. 그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다. 그것은 그가 언약의 백성이며 율법을 다 지킬 의무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과연 율법을 다 지키셨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가 율법 아래 나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이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모든 사람들을 다 가리킨다. ‘속량(贖良)한다는 말은 값을 주고 사셔서 건져내시며 자유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셨다. ‘아들의 명분이라는 원어(휘오데시아)는 ‘양자 됨 즉 양자의 자격을 뜻한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 아래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그들은 장성하여 더 이상 후견인과 재산 관리인 아래 있지 않는 아들과 같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이다(8:9; 1:19). ‘그 아들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영이 아니고 그의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 속에 오신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이시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사실이다. 아바[아빠]는 아람어로서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친근히 부르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의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신약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을 자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아들로서의 자유와 권리, 즉 상속자의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8-9]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바울은 신약 성도가 또 다시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방종교의 종교의식이나 도덕적 규례들)에 종노릇하였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무지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즉 율법으로 돌아가서 그것에게 종노릇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에 대해 바로 안다면, 신약 성도가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율법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신약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의 예이다. 깨끗하고 부정한 음식이나 할례의 규례를 지키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가 구약의 의식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건져내어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믿어 구원받게 한 일을 말한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음이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율법주의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의 복음의 바른 사역이 헛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진리를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기를 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진리를 증거한다. 구약시대는 교회의 어린 시절과 같았으나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이것이 신약시대이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 구속 사역으로 예수 믿는 우리를 율법의 멍에와 정죄(定罪)와 공포로부터 속량(贖良)하셨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보내어주심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은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율법의 멍에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12-20, 바울의 염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율법적 생활을 버리고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되었듯이 갈라디아 교인들도 율법에 대해 자유하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씀은 도덕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율법 제도로부터 자유하라는 뜻이며, 도덕법을 지킬 때에도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가 아니고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참으로 위했지만,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복음 진리에서 이탈함으로써 지금 바울에게 마음의 큰 고통을 주고 있다.

[13-15]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 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 했을 때 여러 가지 육체적인 핍박과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든지(고후 11:23-30), 혹은 그가 어떤 몸의 질병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에 머물게 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은 몸의 약함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일들이 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셨거나 그를 징벌하시는 표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멸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혹은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핍박하였지만,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고 영접하였던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은 증거이었다. 그러나 주의 종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러한 처음의 태도가 변하고 있었다. 이전에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자신들의 눈까지도 빼어주려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간의 간격은 그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겼다. 그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쳤다는 사실이 그와 그들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때문에 원수가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미혹되어 복음 진리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이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원수 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바른 복음 진리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교회의 참된 일치와 연합은 성경 진리와 바른 교훈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저희는 거짓 교사들, 즉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좋은 열심이 아니고 나쁜 열심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열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 자기중심의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봉사자들의 열심은 인간 중심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복음 진리 중심적이어야 한다. 본문에 이간 붙인다는 원어(엑클레이오)분리시킨다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열심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자기들에게 속하게 하기 위한 열심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참된 종과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성도들은 목사의 기쁨이며 자랑이고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교회에서 아무도 그를 필요한 인물로 아껴주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요긴한 인물이 되고 다른 성도들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나의 자녀들아라는 원어(테크니아 무)는 매우 친근감 있는 호칭이다. 이 말(테크니온)은 문자적으로는 어린 자녀를 가리키며 보통 자녀라는 말(테크논)보다 ‘사랑하는 자녀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본 서신에서 여러 번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던(1:11; 3:15; 4:12, 28, 31; 5:11, 13; 6:1, 18) 사도 바울은 오직 이 곳에서 그들을 나의 어린 자녀들아[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진심의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복음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 사람에게 전도하고 그를 구원하여 복음 진리 위에 바로 세우는 일은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일 못지않게 수고로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지도록 수고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약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도 얻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의 생명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나는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죄인, 아무 가치가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굳게 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살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한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음성을 변하려 한다는 것은 사랑과 위로의 음성을 책망의 음성으로 변하려 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음성을 변하려 하는 까닭은 그들을 향해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이 있다는 원어(아포레오)는 ‘당황하다는 뜻도 가진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진실히 믿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토록 속히 변한 일 때문에,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헛되게 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 때문에, 그리고 마치 마귀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보다 더 강하게 보이는 상황 때문에, 그들을 향해 의심이 생겼고 당황케 되어 그의 음성을 변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교훈의 목표는 분명하였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가 전한 복음대로 복음 안에서 의와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며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 안에 거하며 그 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그의 교훈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21-31, 두 언약

[21-23]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곧 사탄의 미혹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예를 들어 복음에 속한 자와 율법에 속한 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난 이삭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었다. 한 사람은 자유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종이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자손이 크게 번창할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지날 때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의 제안으로 그의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하신 아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하기를 원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후 15년이 지나 그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이삭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었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24-28]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모두의](전통사본)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劬勞)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그의 여종 하가[하갈]과 그의 아내 사라를 비유로 사용한다. 하갈과 사라는 두 언약과 같다.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 곧 지상의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구약 교회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을 통해 영혼들이 구원받고 또 구원받은 영혼들이 교회에서 양육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는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이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요 복음의 자유를 가진 자유자들이다. 우리에게는 성령 안에서 받은 의()와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가 있다. 구약 교회는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을 교인들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많은 자들, 곧 아브라함의 수많은 영적 자녀들, 약속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이다.

[29-31]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이스마엘과 이삭은 14살 가량의 차이가 났었다.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고 기록한다(21:9). 그가 어린 이삭을 괴롭혔던 것 같다. 자기 아들을 희롱하는 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했다(21:11).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었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난 자이었다. 신약교회 안에서도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어떤 육신적 관계 때문에 몸만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있다. 자기 자신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부모가 믿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다. 구원의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나 이유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자들이 있다. 중생하지 못한 이런 교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된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었던 율법주의 이단자들도 그런 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전파했던 바울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핍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교회의 회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참 교회의 회중에서 제외되고 제명되어야 할 자들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두 언약에 대해 말하며 두 종류의 교인들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율법 아래 있는 교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 안에 있는 교인들이다. 전자는 구약 교회이고 후자는 신약교회이다. 율법주의 이단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소식이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와 자유를 얻은 자들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이 서신이 증거 하는 핵심적 진리이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성경적 복음의 진수요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의()는 죄인을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참 평안과 기쁨을 준다.

[시편 3편 히브리어 좋은 성경말씀] 주는 나의 방패시요 영광이시요(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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