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산상수훈 예수님 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에 염려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의 일들을 위해서 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먼저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위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마 6:30-34)
30절 에이 데 톤 코르톤 투 아그루 세메론 온타 카이 아위리온 에이스 클리바논 발로메논 호 데오스 후포스 암피엔뉘신 우 폴로 말론 휘마스 올리고피스토이
성 경: [마6:3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오늘 있다가(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아궁이에(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 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들풀(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 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31절 메 운 메림네세테 레곤테스 티 파고멘 에 티 피오멘 에 티 페리발로메다
성 경: [마6:3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무엇을 먹을까...입을까 하지 말라 - 25절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으로서 특히 본문의 '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어 '조그만치도 염려하지 말라'는 절대 금지(禁止)를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무가치해 보이는 극히 작은 것이라도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이상의 말할 수 없는 풍부하신 관심으로 신자들을 돌보고 계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굶지나 않을까 헐벗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을 온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염려는 당신 백성들의 요구를 미리 아시며(8절)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32절 판타 가르 타우타 타 에드네 에피제테이 오이덴 가르 호 파테르 휘몬 호 우라니오스 호티 크레제테 투톤 하판톤
성 경: [마6:3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 '이방인들'이란 하나님 나라의 의(義)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면서 오직 먹고 마실 것만 추구하는 자들을 통칭한 맡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 또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세상적 염려와 근심에 쫓기고 있다.
천부께서...아시느니라 - 신자가 세상일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될 이유가 본절에서 몇 가지로 제시되었다. 그 첫 번째는 앞에서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크나큰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아심'은 단순한 지적 인식(recognition)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를 채워주되 넉넉히 채워주시는 데까지 미치는 완전하고도 전인적인 인식을 뜻한다(8절).
33절 제테이테 데 프로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카이 텐 디카이오쉬넨 아우투 카이 타우타 판타 프로스테데세타이 휘민
성 경: [마6:3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아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 프로톤)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이다. 제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Stott, Sermon on the mount, p. 172).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이 모든 것(타우타 판타) - 이 어구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판타'에 놓여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peace)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조건을 충분히 채우시겠다는 의미이다.
더하시리라(프로스테쎄세타이) - 오리겐(Origen)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딤전 4:8).
34절 메 운 메림네세테 에이스 텐 아우리온 헤 가르 아우리온 메림네세이 타 헤아우테스 아르케톤 테 헤메라 헤 카키아 아우테스
성 경: [마6:3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내일 일을 위하여(에이스 텐 아우리온) -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언제나 다시 다가오며 따라서 내일의 문제는 결코 오늘 다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은혜는 오늘에 족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면 새로운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암시(hint)하셨다. 즉 내일의 염려는 내일의 새 은혜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한 날 괴로움 - 여기서 '괴로움'(카키아)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적 견지에서 본 '악'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윤리적 측면의 '죄악'을 뜻하지 않고 인간이 감내(堪耐) 하기 힘든 고초, 역경 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말은 가끔 우박으로 인해 수확물을 몽땅 잃어버리는 등의 절망적 재해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70인 역(LXX)은 히브리어 '라아'를 '카키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라아'는 '악한', '불운한', '곤고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 날 괴로움'이란 우리의 현실에서 각 날(日)들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움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족하니라(알케톤) - 그날에 주어진 것은 그날의 고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같은 원리, 즉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하는 내일에 대한 원리는 결국 염려의 근원적 치유(healing)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넘치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내일 일의 염려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기울여야 할 관심은 오늘로서 끝나야 할 것이며 내일의 불행과 고난(distress)은 오늘 앞당겨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b. Sanhedrin 100b;b. Berakoth 9a). 한편 본문의 교훈적 말씀을 살전 5:16-18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단순한 권면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염려 자체가 불신앙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 '내일'의 주인은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 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유다서 강해설교말씀] 진리를 위한 싸움(유 1:1-25)
'신약성경 원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모데전서 6장 은혜로운 말씀] 자족하는 생활(딤전 6:1-21) (0) | 2022.04.29 |
---|---|
[성령강림주일 설교말씀] 예수님의 가정(마태복음 12:46~50) (0) | 2022.04.29 |
[누가복음 새벽예배 기도 설교말씀] 삭개오의 회개(눅 19:1-10) (0) | 2022.04.27 |
[새벽예배 10분 설교문] 자녀 됨의 권세(요 1:12) (0) | 2022.04.27 |
[유다서 강해설교말씀] 진리를 위한 싸움(유 1:1-25) (0) | 2022.04.25 |
[베드로전서 4장 설교말씀] 그리스도인다운 생활(벧전 4:1-19) (0) | 2022.04.25 |
[골로새 성경지명 설교말씀] 골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골 1:9) (0) | 2022.04.17 |
[헬라어성경 마태복음] 산상수훈 용서에 대한 예수님 말씀(마 6:14-15) (0) | 2022.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