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다윗의 법궤 2차 이동 설교문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다윗의 2차 법궤 이동(대상 15:25-29)
♣명제: 다윗의 2차 법궤 이동은 십자가 복음의 운반을 상징한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2차 부르심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다윗의 소원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왕궁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천막에 있는 것이 항상 죄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 위하여 율법에 규정되어있는 말씀대로 하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방법대로 수레에 법궤를 운반하다가 웃사가 죽는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두려워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이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무르면서 여호와의 복을 오벧에돔이 받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이 다시 2차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법궤 운반 1차는 자신의 의로 복음을 운반하다가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차 운반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운반하여 복을 받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를 나 자신의 의로 수레에 싣고 운반하면 결국 웃사처럼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의 옷을 입고 어깨에 메고 가면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2차로 법궤를 운반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운반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율법의 의로 운반했더니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다윗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운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여호와의 법궤를 2차로 운반하여 성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수레에 싣지 않고 어깨에 메었기 때문입니다.
대상15:25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 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오벧에돔에 있는 법궤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 부장들이 언약궤를 즐거이 어깨에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메고 올라왔는데’ עלה(알라 5927) 메다, 나타내다, 사무치다, 새김질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1차 법궤 운반에서 실패한 전적이 있습니다. 이 실패가 다윗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남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법궤를 운반해야 된다는 것을 날마다 새김질하며 말씀을 되새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법궤를 2차로 운반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를 철저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수레에 싣지 않고 어깨에 메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궤를 어깨에 메고 올라오는 것은 자신의 전적인 헌신이며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올라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법궤를 어깨에 메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내 마음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믿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속죄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대상15:26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법궤를 운반하는데 레위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기뻐하시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속을 의미합니다. 법궤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모든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죄인들은 십자가 복음을 메고 운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제사는 바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모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깨에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셔서 자신의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속죄의 은혜를 나에게 주시고 나도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깨에 형식적으로 법궤만 메고 진정한 속죄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형식적으로 나와서 말씀은 듣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의 말씀에 체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지 성도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법궤를 메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세마포 겉옷을 반드시 입었기 때문입니다.
대상15:27 다윗과 및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다윗과 법궤를 멘 레위 사람들이 세마포 겉옷을 입었기 때문에 법궤를 무사히 예루살렘까지 운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받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항상 주님의 세마포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 복음을 어디에 가든지 전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나냐’ כנניה(케난야 3663) 그나냐이며 ‘여호와께서 지켜주신다’ 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כנן(카난 3661) 덮다, 가리다, 보호하다, 지키다, 라는 뜻과 יהוה(아도나이 3068) 여호와,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다윗의 1차 법궤 운반의 우두머리는 아비나답이었습니다. 아비나답의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고귀하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비나답은 하나님은 고귀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수레를 이용하여 법궤를 운반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나냐는 2차 법궤 운반의 지도자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철저하게 준비하여 법궤를 레위지파들이 어깨에 메고 가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들의 행렬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법궤 행렬에 덮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כרבל(카르벨 3736) 허리를 졸라매다, 긴장하다,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כבל(케벨 3525) 차꼬, 족쇄, 구속, 단단히 묶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윗과 레위지파들이 세마포 겉옷을 입었다는 것은 법궤를 운반하면서 긴장을 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최선을 다해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족쇄로 하나가 되어 묶여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로 단단히 묶여있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지 않으면 법궤를 운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구속의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십자가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옳은 행위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레위지파들도 세마포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행위가 되어 법궤를 멜 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계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세마포 옷을 입고 옳은 행실을 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세마포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옷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옷을 입고 옳은 행실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레위지파들이 입은 세마포 옷은 자신들이 입고 싶다고 해서 입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푸알 동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마포 옷을 내가 벗고 싶다고 해서 벗을 수도 없는 옷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들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옳은 행실로 나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현재 나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옷이 입혀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구원의 확신을 받은 성도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목청껏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대상15:28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 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 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무리들이 크게 하나님 앞에서 뿔 나팔과 제금을 치고 비파와 수금을 힘 있게 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크게 부르며’ תרועה(테루아 8643) 나팔을 붐, 외치는 소리, 즐거움, 이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רוע(루아 7321) 소리치다, 노래하다, 승리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2차 법궤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쁘고 즐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크게 소리를 외치며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궤를 온전히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승리의 함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자신들이 진노를 당하지 않고 운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크게 외치고 나팔을 부는 것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원죄와 사탄들을 무찌르고 운명하시고 승리하신 사건을 나도 기뻐서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속죄의 사건을 외치고 전파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2차의 법궤 운반에 동참하고 있는 자라면 십자가 승리를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 때에 미갈은 창으로 다윗의 모습을 보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했던 영적인 의미를 우리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상15:29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다윗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왕이지만 행렬의 맨 앞에서 즐겁게 하나님께 춤을 추고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이것을 보고 마음에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미갈의 평생에 생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미갈’ מיכל(미칼 4324) 미갈이며, 작은 시내,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라는 뜻입니다. 미갈은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마음이 좁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시내처럼 물이 조금만 불어도 감당이 되지 않아 넘쳐버리는 것처럼 다윗이 이렇게 기분이 좋아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경거망동(輕擧妄動)하고 있다는 것으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어떻게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느냐고 속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미갈은 구원받지 못 한자의 표상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을 미쳤다고 보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보는 자들입니다.
‘창으로’ חלון(할론 2474) 창, 창문, 이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חלל(할랄 2490) 구멍을 내다, 꿰뚫다, 수치를 당하다, 더럽히다, 배반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미갈이 창문을 통해서 다윗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이 창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더러운 죄와 배반한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셔서 대못에 박혀 구멍이 나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갈은 다윗의 행동이 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미갈의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십자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은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허락된 백성에게만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내다보다가’ שקף(샤카프 8259) 엿보다, 내다보다, 내려다보이다, 라는 뜻입니다. 미갈이 다윗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다윗을 엿보면서 왕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불택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미갈 자신이 창문을 통해서 보고 있는데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갈은 아무리 보아도 다윗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볼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본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아무리 본다고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깨닫게 해 주실 때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운반할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대로 운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의 옷을 입고 주님을 찬양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운반하여 세상에 죽어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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