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아하스 왕 설교] “물두멍의 훼손”(왕하16:17-18)

체데크 2020. 8. 6. 22:45
반응형

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하스 왕이 물두멍을 훼손한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물두멍의 훼손”(왕하16:17-18)

 

명제 : 아하스가 물두멍을 훼손한 것은 성령 훼방 죄를 의미한다.

목적 : 성령을 훼방한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성전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며 죄인이 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허락하셔서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장소이며 영광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솔로몬 이후에 후대의 왕들이 나오면서 우상을 섬기고 성전에 있는 금과 기구들을 이방인들에게 공물로 바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왕들이 섬겼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왕은 아하스입니다.

 

아하스는 20세에 왕위에 올라서 예루살렘에서 16년간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다윗이 같던 길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왕은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자신의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고 산당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하스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의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바쳤습니다. 우리들은 인생 가운데 어려움이 찾아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간구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께 예물을 드려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인간을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제단을 보고 제단의 구조와, 제도와, 양식을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어 만들라고 했습니다. 아하스는 자신의 명령대로 만들어진 새로운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만든 놋 제단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우상을 섬길 때 사용하던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우상의 신전을 만들어 놓고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형식적인 의로운 예배를 더 중요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치워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도 자신의 생각대로 받을 수 있다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허락한 놋 제단을 북쪽으로 옮겨버리고 우상의 형식대로 만든 새 제단으로 대치시켰습니다.

 

놋 제단은 죄인들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죄 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신약으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기구입니다. 이것을 자신 마음대로 바꿔치기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인간의 의로도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을 의미합니다. 아하스의 생각은 놋 제단은 솔로몬 때 만들어져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구식이고 유행도 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새롭게 고안한 깨끗하고 좋은 신식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오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 번에 이루신 구원은 이제 구식이 되었고, 내가 의롭고 거룩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신식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놋 제단은 자신이 여호와께 여쭐 일에만 사용한다고 공포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기구이며 가끔 내가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더 이상의 구원받을 이름은 필요가 없습니다. 아하스처럼 새로운 구원의 기구를 만들어 거룩한 행위를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는 북쪽 끝에 갖다 놓고 자신의 거룩한 행위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한다면 결국 이런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대하28:24-25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구들을 모아서 부수었습니다.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우상 신에게 분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모두 부정하고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퍼뜨린 것과 같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전의 모든 기구들을 부서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전의 기구들을 통해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내세워 여호와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럼 아하스 왕이 성전의 기구를 부서트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하16:17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 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냈습니다.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 바다를 놋 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었습니다.

‘물두멍 받침의’ מכונה(메코나 4350) 기초, 받침, 이라는 뜻이며 כון(쿤 3559) 견고하다, 든든히 서다, 성취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기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물두멍을 받치고 있는 받침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물두멍은 받침이 없기 때문에 홀로는 설 수 없습니다. 받침이 반드시 있어야 만이 세울 수 있습니다. 물두멍은 어떤 곳입니까?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역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는 곳입니다. 물두멍에는 물이 항상 담겨있습니다.

 

이 물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선택받은 자들의 믿음과 신앙을 든든히 세워주고 견고하게 하여 모든 죄를 대신 갚아주심으로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물두멍의 옆판을 떼어냄으로 물두멍이 제대로 서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사역을 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손과 발을 제대로 씻지 못해서 죄악 된 몸으로 나가서 죽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하스와 같은 자들은 자신이 가진 세상의 권력을 이용하여 교회를 흔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앗수르 왕이 섬겼던 우상의 제단을 만들고 물두멍을 없애버려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창세전에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어야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역사입니다. 아하스와 같은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지 못하게 하려고 물두멍의 받침의 옆판을 뜯어내어 망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원죄에서 영원히 죽게 만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마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일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하스 왕이 한 짓입니다. 하나님의 기구를 자신 마음대로 망가뜨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해야 되는데 성령 하나님이 사역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성령 훼방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께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성령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성령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부인하고 거룩한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주장하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선택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을 못하게 기구를 부셔버렸습니다. 거짓 복음을 전하여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자는 절대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돌판 위에’ מרצפת(마르체페트 4837) 포장바닥, 돌로 깔아 놓은 곳, 이라는 뜻이며 רצף(라차프 7528) 바둑판 무늬로 깔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돌 판은 뾰쪽하게 나온 돌들을 깔아 놓은 땅을 말합니다. 아하스는 물두멍을 옮기고 놋 소 위에서 놋 바다를 내려다가 돌판 위에 놓았습니다. 아하스 왕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며 영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하스 왕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물두멍의 받침을 부서트렸습니다. 놋 바다를 내려 돌판 위에 세운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전의 기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성전의 기구를 자신 마음대로 놋 바다를 내려 돌 판에 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고난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요19: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있더라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주기를 원했지만 유대인들은 반대했습니다.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끌고 나갔는데 바닥에 돌을 깐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릎으로 뾰쪽하게 나온 돌들을 기면서 재판 석에 끌려 나왔습니다. 엄청난 고통과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돌을 깐 뜰’ רצפה(리츠파 7531) 새빨갛게 단 돌, 숯, 박석 깔린 돌,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רצף(라차프 7528)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하스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 전에 심문을 당하실 때에 박석에 깔린 돌밭에서 무릎으로 기어서 가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빨갛게 달궈진 돌 위를 걸어가는 고통과 같은 심문을 예수 그리스도는 나 때문에 받으셨습니다. 아하스와 같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준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십자가의 의를 모두 부셔버리고 성령 하나님을 훼방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아하스 왕이 놋 바다를 돌판 위에 놓은 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입니다. 거짓 복음을 선포하면 성령 하나님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됨으로 원죄 가운데 계속해서 있게 됩니다.

 

왕하16: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아하스 왕은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습니다.

‘낭실과’ מיסך(메사크 4329) 낭실, 혈관, 숨는 곳, 이라는 뜻이며 סכך(사카크 5526) 덮다, 가두다, 둘러싸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하스는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을 덮어 버리고 폐쇄시켜버렸습니다. 이 낭실은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모이던 장소입니다. 안식일에는 많은 제사장들이 모이게 됩니다. 당번을 세워서 성전을 섬겼기 때문에 비번과 섬기는 제사장들이 모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왕하11:9 백부장들이 이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여 각기 관할하는 바 안식일에 들어오는 자와 안식일에 나가는 자를 거느리고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나아오매

 

아달랴로부터 여호야다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에 성전에서 섬기던 제사장들과 함께 아달랴를 처단하는데 동참했습니다. 이때에 안식일에 들어오는 자와 안식일에 나가는 자가 함께 모일 때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때는 두 배의 인원들이 모이기 때문에 쿠데타가 가능했습니다. 성전의 낭실은 안식일에 들어오는 자와 나가는 자가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아하스는 이런 장소를 폐쇄시켰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의 휴식 공간을 없애버렸습니다. 제사장들의 공간을 없애버리면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소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아하스와 같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싫어하여 목사들이 마음껏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공간에 제약을 두고 물질을 축소시켜서 복음에 전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혈관을 막아버려 살이 썩어져 가는 것처럼 병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교회는 목사들이 마음껏 십자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영적인 혈관도 건강하게 됩니다. 늘 새로운 십자가 복음의 생수를 마시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는 낭실을’ מבוא(마보 3996) 출구, 들어가다, 나가다, 라는 뜻입니다. 이 낭실은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는 문입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직접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만들었습니다. 이방 민족의 왕을 두려워한 것은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앗수르 왕에게 잘 보이려고 여호와의 성전에 직접 들어가는 문의 입구를 바꾸어 뒤로 돌려버렸습니다.

 

아하스와 같은 자들은 세상의 권세 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들의 생각과 뜻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 올까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를 나온다는 말을 못 하고 직장에서도 상사의 비유를 맞추면서 세상 사람처럼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하스 왕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관하여 말씀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아하스는 첫째, 우상을 섬기면서 자신의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녀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우상의 희생 제물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들은 자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을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것이 올무가 되어 공물을 바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우상의 제단을 답습하여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제단은 치워버리고 자신이 만든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는 무시한 채 자신의 거룩한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만으로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전 기구들을 부셔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물두멍의 기초를 부셔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모독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의를 무시하거나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제사장의 낭실을 폐쇄시키고 자신의 출입문을 다른 곳으로 바꾸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권한을 제약하고 고통을 주면서 자신이 직접 여호와의 성전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닫아버렸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권한을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세상의 권세 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돌려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훼방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성령 훼방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께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아하스 왕처럼 성령을 훼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아스 왕 설교] “요아스의 믿음의 행위”(왕하13:14-19)

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요아스 왕의 믿음 행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요아스의 믿음의 행위”(왕하13:14-19) 명제 : 요아스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행위

cdk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