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성경 인물 설교문]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눅10:38-42)

체데크 2020. 9. 2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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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 인물 설교문 중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눅10:38-42)

 

명제: 마리아는 선택된 백성을 말하고 마르다는 선택받지 못한 백성을 의미한다.

목적: 교회 안에도 마리아와 같은 신앙 자와 마르다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가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예수님께서 방문하게 됩니다. 마르다가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하신 것은 말씀의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영접한 사람은 마르다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밑에 앉아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분주하게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혼자 분주하게 일을 하는 자신이 화가 났습니다. 마르다의 생각에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놀고 있는데 자신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서 마리아도 나와 함께 일을 하게 하라고 명령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마르다의 봉사와 마리아의 말씀을 듣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선택 자와 불택자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내가 마리아의 신앙인지 마르다의 신앙인지를 깨닫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눅 10: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이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3.2Km 떨어진 베다니라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게 됩니다.

‘마을에’ כפר(코페르 3724) 마을, 속죄금, 속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כפר(카파르 3722) 속죄하다, 속량하다, 용서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신 것은 대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들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용서하시고 대신 속량 하셔서 속죄해 주시기 위해 가셨던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마르다의 집이었습니다.

 

‘마르다’ מריא(메리 4806) 살찐, 뚱뚱한, 기름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מרא(마라 4754) 배반하다, 반역하다, 패역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이미 하나님 앞에 배반하고 주님의 뜻을 반역하여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패역무도한 자라는 것을 이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의 이름에서처럼 욕심이 많고 뚱뚱하며 기름진 것을 좋아하는 것은 세상의 욕심이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더라’ ύποδεχομαι(휘포데코마이 5264) 영접하다, 환영하다, 접대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시자 마르다는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영접하여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접대하려고 모셨습니다. 이렇게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한 사실이 있으며 마르다가 영접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날 것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한 것은 순수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무엇인가 유익을 챙기기 위해 모신 것입니다. 우리도 나의 유익을 위해 마르다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업을 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육신적 유익을 위해 주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가셨는데 그 집에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 집에서 전파하실 때에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מרים(미르얌 4813)입니다. 이 단어는 מרי(메리 4805) 반역함, 반항하는 마음, 불순종, 저항,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리아도 마르다와 같이 반항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여 주님을 저항하던 죄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반항하고 불순종했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밑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죄인이 먼저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우선순위는 자신의 일보다는 복음의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듣더니’ ακουω(아쿠오 191) 경청하다, 들어서 깨닫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했던 죄인인 마리아는 자신의 집에 오신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신중하게 경청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믿고 받아들이면서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열심히 복음의 말씀을 들은 사실이 있고 이 말씀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면서 마리아가 직접 자발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그런데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먼저 영접한 사람은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는 현재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합니다. 결국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고 자신의 생각에 마음이 바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경청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때 가능합니다. 마르다도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입니다. 현재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로 바쁩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일로 바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무엇으로 나는 바쁩니까? 마르다와 같이 세상적 일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영적인 것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분주한지라’ περισπαω(페리스파오 4049) 끌리다, 끌려가다, 마음이 어수선하다, 라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집에 오시자마자 마음이 분주하기 시작합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은데 이 일에 자신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일에 치어 마음이 혼잡하고 어수선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하던 일도 멈추고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을 영접했음에도 일이 더 바쁩니다. 완전한 영접이 아니라 잠시 기쁨으로 맞이한 영접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행위로 주님께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율법의 의로 주님 앞에 나가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분주하게 열심히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일에 심취되어 율법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상황과 환경이 자신의 의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상태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바로 눈앞에 있어도 주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의만 나타내고 있는 자들입니다. 현재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의를 나타내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마르다와 같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같은 죄인이지만 자신의 공로가 아닌 십자가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가는 자입니다.

 

히브리어로 마음이 분주하다는 단어는 געה(가아 1600) 울다, 라는 뜻입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분주함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고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분주함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를 갈며 울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쫓겨나 울게 됩니다.

 

‘도와주라’ συναντιλαμβανομαι(쉬난틸람바노마이 4878) ~가담하다, 도와주다, 라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행위에 마리아도 함께 도와주기를 예수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리아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잘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율법의 행위의 의를 나타내는 마르다는 복음의 십자가의 의를 나타내고 있는 마리아를 자신과 같이 율법의 의에 가담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일하는 것을 혼자 하게 놔두지 말고 마리아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르다와 같은 자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가담하게 만들어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담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복음의 말씀에서 벗어나 마르다와 같은 자들과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마르다와 같은 자들은 마리아와 같은 자들을 불러낼 것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주님께 접근하여 영혼을 달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영혼을 죽이기 위해 주님께 접근하여 십자가의 의를 부인하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바로 마르다와 같은 신앙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복음의 말씀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주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μεριμναω(메림나오 3309) 걱정하다, 근심하다, 라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많은 일 때문에 근심하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하려 하기 때문에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에 대해서는 항상 불안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는 일이 실제로 있으며 현재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주님을 버리고 가버리며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근심하나’ θορυβαζω(도뤼바조 2350) 야단법석하다, 소동을 일으키다, 라는 뜻입니다. 마르다가 근심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와 야단법석을 떨면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주님께서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현재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구원에서 멀어진 자들은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와 자신을 알아달라고 야단하면서 소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야단법석하면서 떠드는 자들이 실제로 있고 이들은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지 않고 이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니 주님 앞에 나와 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폭동을 일으켜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부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마르다와 같은 행위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자들이 있으면 안 됩니다.

 

(눅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말에 대답하시면서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 가지만이라도 잘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더 좋은 편을 택하였는데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절대 빼앗길 수 없고 구원받은 것도 절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택하였으니’ εκλεγω(에클레고 1586) 선택하다, 골라내다, 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선택하여 골랐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백성들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 실제적으로 있고 이것을 선택한 사람은 아무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로 돌아가 구원을 받게 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לקח(라카흐 3947) 택하다, 빼어내다, 끌어내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죄인인 마리아를 택하여 불러 주셨으며 죄악에서 빼어내주시고 끌어내어 구원을 시킨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선택한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은 절대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복음을 취하게 된 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절대 빼앗길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완전하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고 순종하며 철저하게 주님의 공로만을 받아들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사람의 모델이고 마리아는 선택받은 자의 모델입니다. 모두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영접했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주님께 칭찬을 받으려고 했으며 자신의 세상적 지위를 위해 주님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마르다와 같이 온전하게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무시하고 스스로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하여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찾아오신 이유는 바로 죄인들의 죄를 구속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려고 찾아왔습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의 집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리아보다 더 먼저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발밑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있어도 마르다와 같은 신앙은 주님을 만나도 금방 잊어버리고 떠나게 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서 마리아와 같은 신앙을 소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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