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22장 설교문] 닭이 울기 전에(눅 22:31-34)

체데크 2020. 9. 22.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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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22장 설교문 중에서 닭이 울기 전에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눅 22:31-34)

 

명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목적: 나는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고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선택받은 자들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죽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한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믿음은 하늘을 찌를 듯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옥에도 들어가고 죽는 데에도 들어가기를 각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너도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어떠한 태도로 나오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어느 곳에 가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스스로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부인할 것이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루기 위하여 선택받아 배신한 사람입니다. 결국 악역으로 쓰임 받고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께서 미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믿음이 떨어지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절대적으로 주님께서 지켜주고 있습니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는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들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까부르듯 하려고’는 σινιαζω(시니아조 4617 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소유격) 체로 치다, 체질하다, 라는 뜻입니다. 시골에서 곡식을 탈곡하고 나서 쭉정이와 알곡을 가려내기 위하여 체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고 알곡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이 시험을 하여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쭉정이는 사탄에게 넘어가고 알곡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밀을 까부르듯이 시험을 주는데 장소와 시간과 공간에 제약 없이 시험을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사탄의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이 시험을 주는 것은 이미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며 지금도 똑같이 사탄의 시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사탄이 밀을 까부르듯 시험을 주고 있는데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넘어지게 하는 시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믿음의 연단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사탄이 넘어지게 하려는 시험이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사탄의 시험을 모두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요구하였으나’는 εξαιτεω(엑사이테오 1809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단수, 3인칭) 요구하다, 청구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εκ(에크 1537)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라는 뜻과 αιτεω(아이테오 154) 구하다, 요구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사탄은 선택받은 백성들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욥기에도 사탄은 하나님께 욥을 시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여 청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여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려고 청구서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들고 멀리 떨어져서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지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탄이 선택받은 자들을 요구한 사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욥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구한 것은 자신의 수하로 집어넣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하나님의 백성들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과 시험을 주어 믿음을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는 회개하고 너의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떨어지지 않기를’은 εκλειπω(1587, 엑클레이포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 단수, 3인칭) 잊다, 쇠하다, 없어지다, 그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믿음이 쇠약하여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시는데 지금 현재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기도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였노니’는 δεομαι(데오마이 1189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1인칭) 요청하다, 기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어근은 δεω(데오 1210) 묶다, 동여매다, 차꼬를 채우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하나님께 요청의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도 하나님께 청구하여 시험을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 요청하여 주님과 함께 묶이기를 원하고 십자가 복음의 끈으로 동여매어 차꼬를 차듯이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인도한 자들은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차꼬로 주님과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주님이 기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의 의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의지로 겟세마네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바로 누가 기도하셨습니까? 주님이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인칭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금도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니 이미 사탄이 밀을 까부르듯이 하지 못하도록 기도가 끝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한 자들이 사탄의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아선 다음에는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님과 같이 원죄에 빠진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님께로 나오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먼저 신앙생활을 하면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 덕분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중보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눅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 장소에도 가기를 각오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주님의 심문받는 장소에 갔습니다. 하지만 이때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는 κυριος(퀴리오스 2962 명사, 호격, 남성, 단수) 주인, 주님,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즉시 주님과 함께 옥에도 가고 죽음을 각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베드로의 비장함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호격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제가 섭섭합니다.라는 의도입니다.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도 않고 믿음도 떨어뜨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걱정하셔도 저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주님을 부른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너를 위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러니 사탄의 시험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저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만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믿음을 자만하여 결국 세 번 부인하고 닭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아니면 절대 사탄의 시험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내가 사탄을 이긴 것이지 내 믿음이 좋아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눅22: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의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야’는 Πετρος(페트로스 4074 명사, 호격, 남성, 단수) 돌, 바위, 반석,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베드로는 자신이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고난의 시험이 오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말씀하지만 베드로는 자신 스스로의 믿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측은하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는 절대 너의 힘으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표정으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호격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나를 부를 때에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거나 자만하면 측은한 마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의 힘으로는 절대 믿음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인하리라’는 απαρνεομαι(아파르네오마이 533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디포, 단수, 2인칭) 부인하다, 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다, 포기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απο(아포 575) ~에서부터, 라는 뜻과 αρνεομαι(아르네오마이 720) 거절하다, 부인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 받고 있는 현장에서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주님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더라도 절대 주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이 실제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실 때에 어린 여종의 말에 부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도 바로 오늘 밤에 반드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고통의 결과가 돌아올 것 같은 마음에서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심문을 당할지 몰랐을 때에는 죽음에까지 함께 가겠다고 고백했지만 실제 눈으로 보고 나니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중간 디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고통이 오기 전과 오고 난 후의 신앙과 믿음이 다르지는 않습니까? 베드로가 자신만만하게 주님께 죽음을 각오했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나도 교만하게 고백해 놓고 막상 고통의 자리에 가니 주님을 욕하면서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가 언제 회개합니까? 세 번 주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입니다.

눅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아시고 주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유월절 만찬 때에 말씀하신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한다는 말씀이 생각이 나서 통곡을 했던 것입니다.

‘돌이켜’는 στρεφω(스트레포 4762 동사, 분사, 과거, 수동, 주격, 남성, 단수) 돌아서다, 변하다, 바꾸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와 심문을 당하시고 있는 모습을 베드로가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 부인한 것을 아시고 닭이 울었을 때에 주님은 베드로의 눈을 바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빛을 통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아섰습니다. 또한 마음을 바꾸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뉘우쳤습니다. 오직 주님이 아니면 믿음을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게 된 것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베드로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회개할 기회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구원시키고 회개시키기 위하여 돌아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잘난 맛에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최고인 줄 알고 까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 현재 저와 여러분들에게 닭이 울 때가 언제입니까? 주님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칠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나의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 닭이 우는 소리를 기점으로 회개하십시오. 강단에서 떨어지는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닭이 우는 소리입니다. 내 멋대로 신앙생활했던 것을 고백하시고 참회해야 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주님만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기뻐합니다. 지금도 불꽃과 같은 주님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참회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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