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7장 설교문 중에서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눅17:11-19)
♣명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은 적다.
♣목적: 나는 청함을 받은 자인지 아니면 택함을 받은 자인지 신앙을 점검하라.
성경은 항상 선택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보아야 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인본주의 관점에서 해석해 나가면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청함을 받은 자들이 있고 선택을 받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청함을 받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선택을 받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됩니다. 그럼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눅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부정하지 않은 분입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은 선민이라고 생각하여 부정한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다가 갑자기 북쪽으로 올라가셔서 부정한 땅인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신다는 것은 십자가 구속을 위하여 제물이 되어주시는 최종 목적지입니다. 십자가 구속의 완성을 하러 가시다가 부정한 땅인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부정한 땅을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하시는 목적이 바로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부정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눅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예수님이 부정한 땅에 들어가셔서 한 마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멀리 서 있습니다. 이 만남은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이 마을로 들어가시는 것은 현재시제를 사용했고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난 것과 서 있는 것은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지금 마을로 들어가시지만 나병환자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병환자’ צרע(차라 6879 동사, 푸알, 분사수동, 남성, 복수) 몹시 괴롭다, 나병에 걸리다, 라는 뜻입니다. 부정한 지역에 있는 나병환자는 이 병 때문에 몹시 괴로운 상태입니다. 나병은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하는 피부질환입니다. 나병이 걸렸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에 나병에 걸렸습니다. 미리암도 모세에게 도전했을 때에 나병이 걸려진 밖으로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는 피부질환에 걸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너무나 큰 악성 종기의 피부질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푸알 분사수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고쳐보려고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열 명의 나병환자는 누구를 의미하고 있습니까? 원죄에 빠진 나를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나도 원죄에 빠지고 싶어서 빠진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가 있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고통 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계획하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눅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했던 행동이 무엇입니까? 소리를 높여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이미 듣고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도 고쳐달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ελεεω(엘레에오 1653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 단수, 2인칭) 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자비하심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절대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신들의 나병을 고칠 수 있으니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호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명령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 외에는 할 수 없으니 제발 고쳐달라는 강청의 호소입니다. 지금까지 내 힘대로 했지만 나병을 고칠 수가 없었으니 이제는 주님이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들은 주님께 강청하도록 하나님의 의도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아담의 후손으로 온 모든 죄인들은 주님을 통하여 원죄가 해결되기를 강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이 병은 고침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죄의 해결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 받을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과거 시제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눅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보면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가던 중에 이들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나병에 걸리면 대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시는 분이 아니라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던 중에 나병이 치료된 것입니다.
‘깨끗함을 받은 지라’ καθαριζω(카다리조 2511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 복수, 3인칭) 깨끗하게 하다, 정화하다, 정결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려고 가는 중간에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부정한 사람에서 정결한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이들이 나병의 치료함을 받은 사건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병을 치료하시기로 계획하셔서 그것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병 환자의 주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셔서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주권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고쳐주신 것입니다.
눅17: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나병 환자 열 명이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중에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주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지만 주님께 돌아온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자기가 나은’ ιαομαι(이아오마이 2390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고침 받다, 나음을 얻다, 치료하다, 라는 뜻입니다.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주님께서 치료해 주심으로 고침을 받아 병에서 나음을 얻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도 다른 나병 환자와 같이 구약의 율법의 대제사장에게로 가던 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의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나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들도 나병 환자처럼 원죄에 빠진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홉 명의 나병 환자처럼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원죄에서 완전하게 고침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정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원죄에서 나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홉 명의 나병 환자처럼 율법으로 돌아가는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율법의 의로 돌아가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인 아홉 명의 나병 환자는 주님의 복음으로 고침을 받아놓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돌아온 사마리아인은 복음으로 돌아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죄에서 고침을 받았다고 해 놓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눅17: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나병을 고침 받고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 사람이 모두 깨끗함을 받았는데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아홉 명이 고침을 받고 깨끗해졌다면 이들이 예수님께 와야 정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음의 대제사장인 예수님께 오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육적인 대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이런 자들은 완전하게 원죄가 치료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나병만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영혼의 나병을 고침 받으려면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해 주신 복음의 대제사장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눅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병 환자 아홉 명은 육적인 치료만 받고 영혼의 구원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원하였느니라’ σωζω(소조 4982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 단수, 3인칭) 구원하다, 보존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돌아와 영혼도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이 보존되고 육적으로는 더 이상 나병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백성에게 더 이상 해 받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침 받은 사실이 실제로 있었으며 이 구원은 행동 자체가 끝난 것이며 다시 나병으로 돌아가거나 원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설법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은 한 명밖에 없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들은 아홉 명이 됩니다. 모두 불렀다고 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녀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처럼 선택받은 자녀입니다. 나병과 같은 악독한 종기의 원죄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원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모든 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께 영광만 돌리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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