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탕자 비유 설교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반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반란”(눅15:11-16)
● 명제 :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통제를 받고 사는 것이 싫어서 떠났다.
● 목적 :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 행복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보면서 서로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랍비라고 하면서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세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한 부류와 세리와 죄인들의 한 부류를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하신 말씀들을 보면, 첫 번째는 잃어버린 양에 관한 비유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헤매다 찾아서 돌아오는 비유입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을 찾아서 데리고 오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의 비유는 여자가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렸다가 부지런히 찾다가 발견하고 난 후에 기뻐서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즐기는 내용입니다. 이것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비유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오늘 말씀에 잃어버렸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베푸는 내용입니다. 모두가 만세전에 선택받은 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살다가 고생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품이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마지막 잃어버렸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핵심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잃어버렸다가 찾은 아들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을 핵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지만 이 땅에서 살다 보니 죄악 가운데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허랑방탕한 인생을 살다가 고통당하면서 원죄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에게 십자가 생명을 통해서 살려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주님의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둘째 아들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눅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비유를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두 아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비교하여 말씀을 더 명확하게 나타내시려고 하시는 주님의 의도입니다.
눅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에게 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곰곰이 고민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당시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마도 큰 아들도 자신의 분깃을 아버지에게 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체면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분깃을 달라고 하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각각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 때문에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자신의 체면 때문에 말을 못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정욕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내게 돌아올’ επιβαλλω(에피발로 1911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중성, 단수) 손을 대다, 얹어 놓다, 올무를 놓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때가 되면 아버지께서 주시는데 그전에 욕심이 생겨 먼저 아버지의 재산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에 손을 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아직은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을 아버지의 재산에 얹어 놓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이 했던 행동은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올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욕심부리면 결국은 파멸되고 인생이 파탄 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현재 아버지의 집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고민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밑에서 통제받으면서 살기 싫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둘째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목적격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품 안이 너무나 좋은데 하나님으로부터 통제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주시는 십자가 복음의 양식이 맛이 없다고 투덜대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먹는 만나가 맛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이 축복인데 이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 안에 있어도 재산에만 관심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복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서, 어떻게 하면 세상에 나가서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라는 고민만 하게 됩니다.
‘내게 주소서’ διδωμι(디도미 1325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 주다, 하사하다, 허락하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어차피 나에게 주실 재산인데 빨리 나에게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만 끌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나에게 아버지의 재산을 허락하셔서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는 그때 당시의 풍습입니다. 둘째 아들은 불효자라는 소리를 온 동네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동네에 나이가 드신 어른들이라면 둘째 아들을 좋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강 청하면서 빨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인데 명령하여 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명령법을 썼다는 것은 매일같이 아버지에게 요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차피 나의 분깃으로 돌아올 것인데 먼저 주신다고 잘못되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라며 자신이 갖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매일같이 아버지를 괴롭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둘째 아들처럼 아직 자신의 것도 아닌데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명령하여 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말을 들은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요? 억장이 무너질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갖기 위해서 아버지는 빨리 죽어도 된다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나의 정욕을 채워 사업이 잘되고, 부자 되어 잘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아버지의 생각은 상관없습니다. 영혼 구원에 관하여 나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직 나에게 육적인 축복만 주시면 하나님은 하실 일은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단지 내가 정욕의 복을 채워주시는 도구로 사용하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버지가 더 있다가 주겠다고 하면 삐져서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시위하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들을 때 영혼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아버지 품 안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에 못 이겨 자신의 재산을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나눠 주었더니’ διαιρεω(디아이레오 1244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 나눠주다, 나누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말에 못 이겨 결국 각각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지만 아들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요구하지 않았을까요? 큰 아들도 요구했습니다. 그 이유가 각각 나누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 아들도 작은 아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실제로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아들들에게 명의 이전시켜 주었습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히브리어 보겠습니다.
히브리어는 חלק(할라크 2505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나누다, 분배하다, 할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할당하여 그들의 몫으로 분배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에 작정하고 아들들을 불러 즉시 자신의 재산을 그들의 분깃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정확하게 두 사람의 몫을 정하여 아들들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재산을 나누어 챙겨주었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나누어서 아들들에게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챙기고 신났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몫보다 더 많은 분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이 날 때는 언제입니까? 내 영혼이 평안을 얻고 구원받아 주님이 주시는 설레 임과 기쁨이 올 때 신이 나십니까? 아니면 큰 아들과 둘째 아들처럼 세상에서 큰 축복을 받아 분깃이 생겼을 때입니까? 아버지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까요? 큰 분깃이 생기면 자신을 떠날 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이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큰 물질의 분깃이 생기니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그전에는 자신의 재산이 없으니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재산이 생겼기 때문에 자유롭게 아버지를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도 나에게 이것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육적인 권세를 받으니 교회를 떠나고 주님의 품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분깃을 받은 둘째 아들의 행동을 보겠습니다.
눅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두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재산을 모두 낭비했습니다.
‘모아 가지고’ συναγω(쉬나고 4863 동사,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모으다, 쌓다, 모아 가지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며칠이 못 되어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팔아서 현금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의 품을 떠날 수 있는 현금을 차곡차곡 모아서 쌓아두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이런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들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확연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갑자기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도 전혀 들어가지 않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축복이 גשם(게쎔 1653) 비, 소나기,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소나기 축복입니다.
창7: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 하늘에서 비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비’ 라는 단어가 גשם(게쎔 1653)입니다. 이때의 비는 축복의 소나기가 아니라 저주의 소나기입니다. 40 주야를 하늘에서 내리니 모든 것이 물에 잠겨 사라지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받은 재산의 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소나기는 요란하게 내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 모여들어 결국은 흥청망청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축복은 이전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축복을 받아야 할까요?
은혜의 단비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רביב(라비브 7241) 많은 비, 풍부한 소나기, 라는 뜻입니다.
신32: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혀서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단비’라는 단어가 רביב(라비브 7241)입니다. 이 ‘라비브’의 축복은 은혜의 단비로서 가뭄이 있을 때 촉촉이 적셔주시는 비입니다. 소나기는 모든 것을 쓸고 지나가지만 ‘라비브’의 비는 있는 그대로 남기고 더 촉촉하게 적셔주셔서 식물들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비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라비브’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낭비하더니’ διασκορπιζω(디아스코르피조 1287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 흩뿌리다, 분산시키다, 낭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유롭게 살게 됩니다. 많은 재산을 팔아서 현금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 만만 합니다. 그러면서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쓰면서 낭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돈을 뿌리고 다니면서 자신을 자랑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이 돈을 함부로 낭비하면서 인생을 산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예상대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모두 탕진할 것이 이미 예견되었던 상황입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히브리어 보겠습니다.
신약 히브리어는 פזר(파자르 6340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흩뜨리다, 흩뿌리다, 아낌없이 주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힘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에 가서 부자라고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함부로 이방인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씨를 뿌릴 때 씨를 뿌리듯이 흩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들은 돈을 씨를 뿌리듯이 온 동네에 매일같이 뿌려대고 있습니다. 자신이 벌지 않은 돈은 이렇게 쉽게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매일같이 술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니고 씨를 뿌리듯이 뿌리면서 다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신약 히브리어에는 술을 마시면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단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하나도 남김없이 펑펑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 능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돈을 걱정하지 않고 앞날의 계획도 없이 계속해서 탕진될 때까지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대로 가다가 파산되어 거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눅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없앤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가 비로소 궁핍해졌습니다.
‘비로소’ αρχομαι(아르코마이 756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단수, 3인칭) 시작하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큰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이렇게 탕진되었던 시점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아들은 그때부터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궁핍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궁핍한 생활의 시작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입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생활이 자신을 비참하고 궁핍한 생활로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것이 이제는 자신에게 독이 되어 고통을 주는 인생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중간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버리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게 되면 결국 그 행동 때문에 영혼은 곤핍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를 떠났던 삶이 결국 영혼은 피폐해져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신약 히브리어로 보면 더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신약히브리어는 חלל(할랄 2490 와우접속사. 동사, 히필,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꿰뚫다, 꿰찌르다, 관통하다, 피리를 불다, 더럽히다, 시작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둘째 아들은 궁핍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 못에 꿰뚫려 관통되어 죽으신 복음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들은 지금까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날마다 피리를 불면서 베짱이처럼 살았습니다. 결국 이것이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결과가 되었고 복음이 사리지고 고달파지는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의 복을 가지고 둘째 아들처럼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 물질이 나에게 독이 되어 결국 영혼은 더럽혀지고 피폐해지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둘째 아들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궁핍한지라’ υστερεω(휘스테레오 5302 동사, 부정사, 현재, 수동태) 너무 늦게 오다, 부족하다, ~보다 못하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나서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 늦게 왔습니다. 더 빨리 왔다면 둘째 아들은 빨리 정신을 차렸을 것입니다. 현재 둘째 아들의 환경과 상황은 전보다 아주 못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먹을 양식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고 싶지만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먹을 양식을 찾아 돌아다녀도 주는 사람도 없고 구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아무데서나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굶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 굶주리지 않고 십자가 복음의 양식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축복이 나에게는 독이 되어 결국은 영혼이 굶주리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현재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입니까? 둘째 아들처럼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재산을 챙겨 세상으로 돌아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영혼이 피폐해져 죽을 지경에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재산을 달라고 반란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이것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둘째 아들은 어떠한 환경으로 전락이 됩니까?
눅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둘째 아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어살게 됩니다. 이방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아버지 품에서 깨끗하게 살다가 이방 나라로 가서 이제는 부정한 것을 만지고 살아야 하는 인생으로 전락되었습니다.
‘붙여 사니’ κολλαω(콜라오 285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결합하다, 부착하다, 달라붙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큰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으니 이방 사람에게 가서 붙어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과 결합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자신 만만하여 호령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재산을 탕진하니 부정한 이방 사람에게 붙어서 빌어먹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이런 모든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탕진하고 부정한 자들과 함께하여 빌어먹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될 것이 뻔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미리 예견을 합니다. 르호보암 왕도 노인의 말을 듣지 않고 젊은 자들의 말을 들어 낭패를 보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부정한 자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리 이곳을 탈피하려고 해도 절대 탈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께 큰 물질의 복을 받고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영혼은 피폐해지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 부정한 사람들과 살 수밖에 없는 상황과 환경에 처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면 과거 시제처럼 고통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둘째 아들은 무엇을 먹고살게 됩니까?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살게 됩니다.
눅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배가 너무나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이것도 주는 자가 없습니다. 둘째 아들의 비참한 생활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인생은 둘째 아들처럼 부정한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우려고 해도 이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습니다.
‘쥐엄 열매’ κερατιον(케라티온 2769 명사, 소유격, 중성, 복수) 작은 뿔, 캐롭나무의 열매, 라는 뜻입니다. 쥐엄 열매는 콩과 비슷한 열매입니다. 평소에는 죽을 쑤어서 돼지나 동물들을 주었는데 가뭄이 심하게 들어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들도 먹었습니다. 쥐엄 열매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가뭄과 고통과 애달픔이 섞여있습니다. 그 이유가 소유격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배고픔에 고통을 당하는 자가 먹어야 하는 서민의 애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보면 더 확실합니다.
신약 히브리어는 חרב(하라브 2717 동사, 칼, 분사수동, 남성, 복수) 마르다, 황폐하다, 죽이다, 라는 뜻입니다. 큰 가뭄이 들 때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쥐엄 열매를 먹게 됩니다. 나라에 전쟁이 터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땅은 황폐해져 먹을 것이 없을 때 이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것이라도 먹으면 다행입니다. 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바싹 메말라 죽게 됩니다. 쥐엄 열매는 가난해지면 반드시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영적인 기근이 왔을 때 사람들은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아우성을 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먹지 못해서 영혼이 황폐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어느 누가 주는 자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돌아다니지만 먹을 양식이 없고 주지도 않습니다. 현재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육적인 축복에 휩싸여 영혼은 메말라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아들처럼 영혼이 피폐해져 고통을 당하기 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고 주님을 축복의 도구로 삼는 이런 기도와 신앙은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명령하여 자신의 분깃을 달라고 생떼를 쓰면서 말하듯이, 내가 하나님께 물질의 축복을 달라고 생떼를 부리면서 기도하면서, 안 주시면 안 된다고 하여,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놓고, 육적인 문제 해결을 받고 나서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서 물질을 낭비하는 이런 반란의 신앙을 이제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게셈’의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 ‘라비브’의 축복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축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더 좋아지고 영육으로 복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축복입니다. 둘째 아들의 반란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셔서 나는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신앙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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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인물 설교문]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눅10:38-42) (0) | 2020.09.23 |
[탕자 비유 설교문] “큰 아들의 반란”(눅15:25-32) (0) | 2020.09.23 |
[탕자 비유 설교문]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옴”(눅 15:17-24) (0) | 2020.09.23 |
[누가복음 24장 강해 설교문] 복음의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눅 24:44-49) (0) | 2020.09.23 |
[누가복음 17장 설교문]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눅17:11-19) (0) | 2020.09.22 |
[누가복음 22장 설교문] 닭이 울기 전에(눅 22:31-34) (0) | 2020.09.22 |
[누가복음 19장 강해 설교문] 잃어버린 자(눅 19:1-10) (0) | 2020.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