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부활 주일 설교말씀] 엠마오의 식탁(눅 24:25-36)

체데크 2022. 4. 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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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고 무덤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 목: 엠마오의 식탁

 

설 교 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말씀:  눅 24:25-36

 

요    절: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6)

주 제: 엠마오 식탁에서 부활의 주님의 임재를 재발견 하자

지난 한 주간 동안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사셨습니까?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오직 성신님께서 너희들에게 강림하시면 너희들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너희들은 나의 증인들이 되리라 하시니라 But ye shall receive power, after that the Holy Ghost is come upon you: and ye shall be witnesses unto me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aea, and in Samaria, and unto the uttermost part of the earth.” (행 1:8)입니다. 오늘도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땅끝까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뿐 아니라 2000년간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 왔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 부활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He has risen!”을 선포하며 세상에 광고하고 부활의 주님을 위해 순교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증인(Martyres μαρτυρες)이란 단어와 순교자(Martyr)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좌우명으로 여기신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For whether we live, we live unto the Lord; and whether we die, we die unto the Lord: whether we live therefore, or die, we are the Lord's.” 이 말씀은 목사안수 받는 분, 선교사로 파송 받는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말씀의 실현입니다. 뱀의 후손이라 표현된 사탄은 여자의 후손이라 표현된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형을 말합니다. 그러나 메시야께서는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마침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종말 전쟁에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주님의 부활은 소생(다시 살아남)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살아나심’ 보다는 ‘다시 일어나심’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에 가보면 그렇게 인사합니다. 믿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따라 합시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일어나셨습니다! The Lord is risen. Our Lord is indeed risen!”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주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면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부터 시작하여 땅끝까지 우리는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부활의 증인으로 여생을 바쳐야 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시 23:3) 다윗은 부활 신앙으로 승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주님의 시신을 처리할 것을 허락받고 정한 세마포에 싸서 바위 속에 판 새 가족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그 문을 막아두었습니다(마 27:57~60). 정식 장례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사실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람의 장례는 금지되어 있었고, 해서는 안되는 분위기였는데 빌라도의 이런 결정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주님께서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름 아침[주일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께 바르기 위해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을 때 돌이 이미 굴려졌고 천사가 앉은 것을 만나게 됩니다(막 16:1~5).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He is not here, but is risen.(눅 24:5~6)” 우리도 이 여인들처럼 다시 일어나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지 않는지요?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캐톨릭의 십자가처럼 죽은 예수님을 매달고 있지 않는지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셨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의 상징(symbol)은 달걀이 아니라 “빈 무덤 Empty tomb”입니다.

 

천사들이 주님의 부활을 처음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실 때도 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천사들이 처음 전해주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0~11). 부활의 기쁜 소식도 빈 무덤에 나타난 천사들이 전해주었습니다. 말세에 주님께서 재림할 소식도 천사들이 전할 것입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6~7).

 

빈 무덤에서 천사들은 예수님 생전에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수난과 부활의 말씀을 상기시켰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일어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눅 24:6~7, 눅 24:44~46, 눅 9:22, 눅 18:31~33; 마 12:40, 마 16:21, 마 17:22~23, 마 20:18~19, 마 27:63, 마 28:6; 막 8:31, 막 9:9~10, 막 9:31~32, 막 10:33-34) 그제서야 여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빈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전했습니다(눅 24:9~10). 그랬더니 베드로는 속히 달려와 무덤 안까지 들어와 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무덤에 남아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니 마리아는 대답하기를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 20:11~13).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부활의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나 예수님이신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Rabboni” 하니 (이 뜻은 이대하신 랍비 즉 ‘최고의 선생님’이라)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고 헤어집니다(요 20:14~1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변모되어 있어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으신 옷도 마 17장에서 변모산에서 옷이 변화되어 어떤 세탁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빛과 같이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마 17:2, 막 9:3). 우리도 다시 부활할 때 그런 옷을 입기를 원합니다. 찬송 87장에

 

1)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되도다

(후렴)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 오신 예수님 참 내 구세주

2)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셨도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3)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보았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4) 내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열어 주실 때 나 주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겠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요 20:11~18). 그녀는 이후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배우게 됩니다.

첫째, 주님께서는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무덤은 빈무덤(The empty tomb)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무덤 안에는 세마포와 수건만 있었고 예수님의 몸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두었던 무덤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다메섹 문 200미터 직진하면 오른편에 “정원무덤 The Garden Tomb”이 나옵니다. 지금도 영국교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성묘 Holy Sepulcher는 캐톨릭과 정교회가 만든 기념묘일 뿐입니다.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무덤이 없습니다. 골고다 언덕 옆에 있는 정원 무덤이 바로 부활의 장소입니다. 부활의 정신은 어둠이 있는 곳에 홀연히 광채가 비췹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최악의 상태라 생각하는 곳에서 최상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망을 넘어 영생이 시작됩니다. 무궁화처럼 죽었다가 다시 피어납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고 성취가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값이 속량되었고, 주님의 부활로 영생의 문이 활짝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정신으로 우리는 오늘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과 위기 속에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패 안에 성공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눈물 속에 위로가 있고, 심령이 가난한 속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팔복의 교훈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가 1963년에 워싱톤에서 행한 명연설문에도 이런 부활신앙이 나옵니다. “I have a dream.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산들 작은 언덕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한 길이 평지가 되며,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나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남부로 갈 것입니다. 이 신앙으로 우리는 절망의 산으로부터 희망의 조약돌을 캐낼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불협화의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형제애의 심포니를 연주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고, 자유를 위해 일어설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둘째, 부활의 주님께서는 외롭게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셨고,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고, 의심 많던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확신을 주셨고,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던 제자들을 심방하셔서 사랑의 모닥불로 따뜻하게 해 주셨고, 떡과 고기를 준비하셔서 먹여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의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세상의 일에는 비늘이 가렸고, 신령한 눈이 열려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다. 이 부활의 주님을 오늘 만나서 우리 심령 가운데 영원히 모시기 바랍니다.

 

셋째, 궤도 수정하여 바른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변화(change)라는 말도 보면 부정적인데서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잘 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변화라는 말보다는 열정(passion)과 역동(dynamics)으로 날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하는 변화(transformation)을 해야 합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바른 방향을 잡았으면 열정을 다해 부지런히 나아가야 합니다.

 

첫 부활절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무덤을 다녀온 여인들이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니 온 예루살렘에 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도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 둘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돌아가면서 지난 한 주간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눅 24:13-15) 엠마오(Emmaus)가 정확히 어디인지 찾기는 어려우나 고고학적인 정황에 의해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12km 가면 엘 쿠베이베(El Qubeibeh)를 엠마오 마을과 가장 유사한 곳으로 추정합니다. 1901년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글로바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내부에는 크레오파스라는 고대 가정집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라트룬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 자리가 엠마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부활의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저희들과 동행하셨지만 저들은 이 분이 한 나그네 정도로만 알고 그냥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몸과 옷이 변형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했습니다. (눅 24:16) 두 제자 중 한 명은 글로바(Cleopas)였습니다(눅 24:18).

 

나머지 한 사람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도들의 모인 곳을 알 정도로 사도들을 도왔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집에서 사는 것으로 추정하여 부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는 이들이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꼭 같은 집에 살았다는 근거는 희박합니다. 나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엔 이미 열한 사도가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주님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눅 24:33). 주님께서는 모르는 척하시면서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니 저들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섭니다. 그 중 한 사람인 글로바가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 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십니까 ?”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 계시는데도 그들의 눈이 어두워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을 주님께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당하지 않는지 잘 살펴 보십시다. 주님 앞에 주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심정으로 바르게 성경을 읽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믿고 있는가 아시기 위해 일단 먼저 들어보셨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력 많으신 대언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이 분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계시다 (he was alive, 눅 24:23)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전했습니다.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눅 24:19~24) 이 두 제자들은 구약의 말씀을 100% 믿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주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미련하고 대언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질책하시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눅 24:25~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대언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 하셨습니다. (눅 24:26~27) 그때에 제자들은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Did not our heart burn within us?(눅 24:32)”고 후에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십니다(그리스어로 카이오메네 καιομενη, 뜨거움 on fire, consume). 영생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실 때 우리 몸이 불 붙는 것 같이, 전기가 강하게 흐르는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더 이상 사역을 하지 않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in mine heart)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100% 예언의 성취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데, 초점을 다른 데 맞추면 냉냉하고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을 전적으로 믿지 않으니 말씀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성경공부에 늘 참여합시다. 엠마오 도상의 길은 성경공부의 장이 된 것입니다.

 

저희 세 명이 엠마오에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은 더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희 두 사람이 강권하여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눅 24:29) 하며 주님을 가정집으로 모셨습니다. 우리도 은혜 받으려면 주님을 우리 가정에 모셔야 합니다. 강권해서라도 은혜 충만,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한 분을 모셔다가 말씀을 계속 듣고 함께 유하고 식사하는 것도 축복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믿음 좋은 분들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식사 준비가 되어 식탁에 앉으실 때 보통 주인이 감사기도하고 손님들에게 떡을 떼어 주는데 이들은 주님께 기도 부탁을 했더니, 주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주님께서는 더이상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고 창피했을까요? 한편으로는 너무 기뻐 부활의 주님께서 자기들과 동행하시고 자기들과 식사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당장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도들이 모여 있던 곳에 이르니 사도들도 서로 간증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눅 24:34)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그리고 엠마오에 살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돌아온 저희들도 길에서 된 일과 주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고 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Shalom Aleykem!) (눅 24:36)

저희들은 모두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부활의 주님 모습이 변형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며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사도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공부할 때 이 기도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소서”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38-49)

 

우리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시다. 우리 교회는, 우리 선교회는 매 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까? 왜 여리고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마리아와 요셉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예배가 죽은 곳에서 예배가 살아 움직이는 곳으로 방향전환을 하십시다. 부활신앙은 우리를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전환시킵니다. 엠마오로 갈때는 슬픔, 불안, 절망의 분위기였으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생동력이 있고 뜨거웠고 기뻤고 소망이 넘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으로 갈 때는 불안, 초조, 슬픔이었으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갈 때는 발걸음이 가볍고 기쁨에 충만했습니다.

 

김두완 장로님의 복음송가를 부를 때마다 새소망이 솟아납니다.

 

1)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그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2)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근심이 앞 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방향 전환하시기를 바랍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엠마오 식탁에서 주님을 만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듯이, 부정적인데서 긍정적으로, 부분적인데서 완전으로, 소극적인데서 적극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지금 방향전환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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