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이단과 이단 사상에 대한 경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 율법을 전파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자들의 말을 들으면 인간의 의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의를 없애버립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인간의 의는 구원 얻는데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바른 교훈(딤전 1:1-20)
1-2절, 문안
[1절] 우리 구주 하나님과.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11).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자주 표현하지만, 그를 보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주이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밖에 참 구주가 없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만, 그것들은 참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에스겔 7:19는 환난 날에 금과 은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며 인간은 죄의 결과로 온갖 불행한 일들과 사망과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 죄와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다른 그 어떤 이도 우리를 죄에서 건져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친히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우리를 죄와 형벌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바울은 예수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실히 증거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께서 재림하실 때 악인들은 공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고 변화되어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골 1:28)이시며 ‘복스러운 소망’이시다(딛 2:13).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빨리 흘러간다. 누구에게나 늙고 병들고 쇠약한 시간이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거나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자신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인데(롬 1:1) 하나님께서 ‘너는 사도가 되어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곧 순종하였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한 것처럼(사 6:8),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 그를 따른 것처럼(마 4:19-20), 바울도 그를 사도로 부르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2절]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한다”고 말한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엡 2:8).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 아들이었다. 그것은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든지, 혹은 단순히 믿음 안에서 아들처럼 여겼다는 뜻일 것이다. 육신적인 아들보다 영적인 아들은 더 귀하다. 육신적 가족관계보다 영적 가족관계는 더 귀하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고 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3:33, 35). 교회는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아름다운 영적 가족들의 모임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 . . .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날마다 부족과 실수를 씻음받고 신앙생활을 하며 성화되어 간다. ‘평안’은 죄씻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이며 또 거기에 더하여 주시는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 그리고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항상 필요로 한다. 사도의 축도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복이며 우리 모두가 항상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바이다.
1절부터 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자. 둘째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주 안에서 영적인 한 가족임을 인식하고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3-11절, 다른 교훈을 경계함
[3-4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목적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려 함이었다. 여기에 어떤 사람들은 교사로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했던 자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다른 교훈은 금지되어야 했다. 세상에서는 별별 말들이 많아도, 교회 안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교훈에 있다.
교회는 교훈의 통일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의 일치를 말한다. 그것은 2천년 교회역사의 정통적 흐름과의 일치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만 바른 교훈의 기준이다.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규범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의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객관성 있는 해석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신화나 족보 이야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것, 즉 지어낸 이야기를 말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과 사실의 말씀이다. 그것은 신화나 허구가 아니고 사실이다. 족보는 육신적 혈통을 말한다. 그것이 귀한 유산일 경우도 있으나, 진리와 생명의 보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육신적 족보로 말하면 천주교회가 사도들의 후예일지 모르지만, 진리 사상으로 말하면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탈하였고 변질되었다. 그러므로 육신적 족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 사상의 계대이다. 사실상, 육신적 족보는 헛되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는 성경적 사상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사도들의 참 계승자이다.
바울은 신화나 족보 이야기 같은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계획]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죄인들을 향한 그의 구원계획을 가리킨다. 그 계획이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진행됨을 말한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 안에서 성화되어 간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의 충만과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것이다. 참된 교훈은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한다. 그러나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은 믿음을 위하지 않고 변론만 일으키는 자들이다. 변론은 말만 무성한 것을 말한다. 그런 변론은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으며 참된 믿음의 성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5-7절]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경계의 목적’ 즉 바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다. 청결한 마음이란 회개하고 죄를 씻음 받은 마음을 가리킨다. 죄가 우리 마음을 더럽혔고 지금도 더럽힌다. 그러나 회개와 죄씻음을 통해 마음이 깨끗함을 얻었고 또 계속 씻음 받음으로 깨끗해진다. 선한 양심이란 바른 도덕적 분별력을 가리킨다. 양심은 고의적 범죄로 더러워져서는 안 되며 성실한 순종생활로 선한 양심을 간직해야 한다. 거짓 없는 믿음이란 모양만이 아니고 작을지라도 진실하게 믿기 시작한 믿음을 가리킨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참 사랑이 나온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함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웃사랑은 도덕법의 완성이다. 구원받은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와 교훈의 목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헛된 말에 빠져 있다. 그들은 바른 말에서 떠나 허탄한 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니고 잘못된 교사들이었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니다.
[8-11절]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법 있게 쓴다’는 말은 ‘정당하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율법을 잘못 해석하면 저 율법교사들처럼 허무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율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의도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 진리에 맞게 그것을 적용한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유익을 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다 유익하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의인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위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롬 3:20). 바울은 15가지의 죄악의 목록을 열거한다: 불법한 자 즉 율법을 거슬러 행하는 자, 복종치 않는 자 즉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 죄인, 거룩하지 않은 자, 망령된 자 즉 세속적인 자,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 즉 부모를 구타할 뿐 아니라 죽이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즉 동성애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즉 인신매매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죄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죄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바른 교훈’이라는 원어(휘기아이누사 디다스칼리아)는 ‘건전한 교훈’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이다. 그러나 불건전한 율법 선생들이 나타나 다른 교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했다. 그러나 율법을 복음과 충돌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의의 표준으로서 또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직접적 수단이거나 성화의 효력 있는 수단도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 의를 통해 왔고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성취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을 따라 섬긴다.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은 구원의 복음의 목표가 죄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부활과 천국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를 이해하고 오직 죄를 버리고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감사하자.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오직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을 가지자.
12-17절,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
[12-14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 . . .
바울은 말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暴行者)[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불신앙 중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가 거룩한 직분까지 받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다.
바울은 과거에 ‘훼방자, 핍박자, 폭행자’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불신앙 중에 무지함으로 그런 악을 행하였다. 비록 그 죄악이 심히 컸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바울을 불쌍히 여겨주셨다. 주의 긍휼과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하였다. 주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주셨다. 구원의 은혜는 구원에 이를 참된 믿음과 또 예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비록 무지함으로 믿는 이들을 핍박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을 가졌었다. 주께서는 충성된 마음을 좋게 여기시는 것 같다. 주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신 후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는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충성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직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자기의 직분을 잘 이해하고 겸손히 충성하는 것이다.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라고 번역한 원어(파세스 아포도케스 악시오스)는 영어성경들(KJV, NASB, NIV)의 번역대로 ‘전적으로 받을 만한’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신실한 말씀이요 사람이 전적으로 받을 만한 말씀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복된 소식이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은 역사적 인물, 유대인 청년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메시아] 곧 구주이심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신적 구주를 약속하였다(사 9:6; 미 5:2). 바로 그 약속된 신적 구주께서 오셨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셔서, 그 몸에 찔림과 상함을 받으실 것이라는 예언대로(사 53:5) 고난을 받으셨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비방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해쳤기 때문이었다. 모든 죄가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만, 특히 예수님과 그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는 죄 중에도 큰 죄이다. 하나님과 그의 복음 진리를 대적하는 것은 실상 매우 심각하게 큰 죄이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내가 이 때문에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때문에’라는 말은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에’라는 뜻 같다. 구주 예수께서 죄인의 우두머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가 그에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죄인의 괴수 같은 큰 죄인이 주의 긍휼을 입어 구원받았으므로,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주의 긍휼을 입을 수 있음이 증거되었다. 어떤 크고 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구주 예수께로 나와 그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받을 수 있다.
[17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세의[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전통사본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울은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섭리자 곧 통치자이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가 모든 일을 행하신다. 그는 영원하신 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썩지 않으신다. 모든 피조물은 다 죽고 썩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고 썩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또 보이지 않으신다. 그는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존재 세계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은 또한 ‘홀로 하나이시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한 분뿐이시다. 다른 신들은 모두 헛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 가짜이다. 또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그의 지혜는 무한하시다.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열거한 후에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송영이다.
12절부터 1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다. 그는 만세의 왕, 영원하신 왕,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썩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나 홀로 하나이시며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며 순종하자.
둘째로, 그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주이시다. 큰 죄인 바울을 구원하신 그는 그가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실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과 능력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일꾼으로 들어 쓰신다.
18-20절, 선한 싸움을 싸우라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 . . .
바울은 말한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그것들로’라는 말은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로’라는 뜻이다. ‘예언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교훈들을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진리와 의를 위한 싸움, 교회를 위한 싸움이다. 우리 몸에 있는 죄악성(갈 5:17)은 성령의 생각과 대립되며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이다. 또 우리는 세상의 죄악된 풍조들은 싸운다.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도 받는다(요 16:33; 딤후 3:12). 더욱이, 사탄과 악령들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대적한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으로 무장해야 한다. 에베소서 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검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마 4:4, 7, 10).
[19-20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선한 싸움은 실상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 싸움에 지면 불신앙과 죄에 떨어진다. 이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 그것이 개인적 배교와 변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 복음 신앙, 성경 신앙을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양심이 무디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말씀 묵상과 기도로 깨어 있음으로써 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영적 싸움에서의 실패자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었다. 이렇게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인신 공격이 아니다. 이미 시행된 권징을 알리며 우리에게 그것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제명 출교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지만, 교회 밖은 사탄의 세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요일 5:19).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사도의 권위를 보이며 권징을 집행한 자가 그 자신임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목사와 당회는 하나님께서 지교회의 성도들을 통해 위탁하신 영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고 이 권위를 가지고 권징을 시행하게 된다.
권징의 목적은 저희로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징계를 받다’는 원어(파이듀도시)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는 뜻일 것이다(KJV, NASB, NIV). 저들은 바른 진리를 비난하고 참된 믿음을 비방했다. 그와 함께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좁은 길보다 포용주의를 좋아하고 타협적인 종들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제명 출교의 권징을 통하여 그 훼방과 비난이 중지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배교와 변절을 본받지 말고, 영적인 싸움에서 실패하여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잃어버리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자.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간직하자. 특히 이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순수한 신앙, 성경적 신앙을 지키고 착한 양심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자.
[요엘 3장 주일 설교말씀] 만국을 심판하심(욜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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