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산 강해설교 중에서 갈멜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갈멜산은 우상숭배자들과 엘리야가 싸웠던 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하셨던 산이기도 합니다.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시켰습니다. 아합과 이세벨 때문에 영적으로 타락했던 북이스라엘의 거짓 제사장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 시대도 이런 거짓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이런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처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만을 들어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갈멜 산 הר כרמל(하르 카르멜)
♣명제: 갈멜 산은 하나님께서 우상을 심판하시는 산이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는 지도자들과 대적하는 날이 온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때에 나라가 쪼개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라가 쪼개지면서 북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아합 왕 때입니다.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면서 우상도 함께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도 이세벨 때문에 호강을 하면서 살던 시대가 아합 왕 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굴에 숨어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왕상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두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세벨의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을 따르는 자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세벨’ איזבל(이제벨 348) 이세벨,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י(이 336) 아니다, 라는 뜻과 זבל(자발 2082) 거주하다, 함께 거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더러운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거주하게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종들을 죽인 자가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지 않는 자입니다. 복음이 없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자들은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책망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의 교리들을 두아디라 교회가 받아들여 우상과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입니다. 이세벨과 같은 자들은 지금도 교회에 침투하여 거짓된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과 거주하지 않는 자들이며 우상과 함께 먹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런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오바댜’ עבדיה(오바드야 5662) 오바댜,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יה(야흐 3050) 하나님, 이라는 뜻과 עבד(아바드 5647) 봉사하다, 섬기다, 수고하다, 라는 뜻입니다. 오바댜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오바댜는 이세벨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일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굴에 50명씩 나누어서 떡과 물을 먹였던 자입니다. 이 사람은 3년 동안 가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을 떡과 물로 먹였다는 것은 엄청난 봉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있던 선지자들을 살린 것입니다. 오바댜는 왕궁에서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가뭄이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봉사를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자신만 호의호식하는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데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큰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힘들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오바댜와 같은 성도들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도와주고 교회를 도와주므로 하나님은 큰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바댜와 같은 신앙과 은혜가 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먹였더라’ כול(쿨 3557 동사, 피엘,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봉양하다, 공급하다, 보호하다, 라는 뜻입니다. 오바댜는 자신의 권세와 지위를 가지고 이세벨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일 때에 선지자 100명을 봉양하고 있습니다. 떡과 물을 굴에 공급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오바댜는 잘못하면 이세벨에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바댜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시니 가능한 것입니다. 오바댜가 선지자 100명을 가뭄 속에서 먹인 것은 절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도록 공급해 준 것을 의미합니다. 굴에 숨어 있으면 답답하고 배가 고플 수도 있지만 오바댜는 자신의 재산을 소비하면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이 오바댜의 마음에 감동을 준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에 십브라와 부아처럼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큰 은혜의 복을 주셨습니다. 오바댜도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땅에 기근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상18:17-18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아합이 엘리야 선지자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아합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바알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는 자여’ עכר(아카르 5916 동사, 분사능동, 남성, 단수) 화를 당하게 하다, 괴롭다, 곤란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만들고 더 나아가 가뭄이라는 화를 당하게 만든 자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적반하장의 말을 아합은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우상을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화를 당한 것인데 이것을 엘리야에게 덮어 씌우고 있습니다. 거짓된 복음을 따라가는 자들은 절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남의 탓을 하면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나의 잘못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실수를 인정해야 합니다. 아합은 자신의 실수로 이스라엘 전체가 가뭄이라는 저주를 받았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남에게 피해를 돌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따랐음이라’ ילך(얄라크 3212 와우계속, 동사, 칼, 미완료, 남성, 2인칭, 단수) 따르다, 섬기다, 청종하다, 동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합 왕은 아세라와 바알의 우상을 따르기 위하여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상의 신에게 절을 하면서 섬기고 청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우상은 잘 따랐습니다. 이렇게 아합은 하나님과는 동행하지 않고 우상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아합이 이렇게 영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은 이세벨 때문입니다. 이세벨이 결혼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바알과 우상의 선지자들의 말을 즉시로 따랐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이세벨이 죽이는데도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고 결국은 진노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을 놓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통하여 이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 산으로 모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왕상18:19-20 그런즉 사람을 보내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사람을 보내 우상의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갈멜’ כרמל(카르멜 3760) 갈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כרם(케렘 3754) 고귀하다, 귀한 식물을 가꾸는 정원, 포도원, 이라는 뜻입니다. 갈멜 산은 이스라엘 땅 가운데 가장 비옥한 곳입니다. 강수량이 많아 물이 풍성한 곳입니다. 이곳에 가뭄이 들었다는 것은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척박한 땅으로 변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 우상을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모으라고 아합에게 말했습니다. 이때에 갈멜 산에 온 자들은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만 왔습니다. 아세라 선지자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세라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심판을 받는 장소라는 것을 아마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우상의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불러 모은 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갈멜 산은 물이 풍성한 곳입니다. 또한 기름진 땅입니다. 이런 땅을 바알의 선지자들이 더럽혀 놓은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신앙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좋은 포도원과 같은 여호와 신앙을 우상의 신앙으로 변질시켜 놓은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들을 갈멜 산에서 심판하기 위하여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신이 진정한 여호와의 신인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우상을 따르지는 않습니까? 물질이 나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나의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언제까지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갈멜 산은 흐트러진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을 바로 잡아주는 곳입니다.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믿음을 새롭게 붙잡아 주는 장소입니다. 나의 갈멜 산은 어디입니까?
왕상18:22-24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싸우게 됩니다. 제사를 통하여 여호와의 신과 바알의 신의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과 신과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제단에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야도 이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각자 자신의 신의 이름을 불러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라고 대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선 듯 대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알의 신은 번개의 신입니다. 불을 내려주는 신이 바알의 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분야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는 너무나 신났습니다. 가장 잘하는 전공으로 엘리야가 대결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싸움에 응답했던 것입니다.
왕상18:26-29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불로 응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알이 불로 응답하지 않자 이들은 제단 주위에서 뛰 놀기 시작합니다. 정오에는 엘리야가 조롱까지 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칼로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기 시작합니다. 정오가 지나 저녁에 이를 때에도 바알의 신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뛰놀더라’ פסח(파사흐 6452 와우계속,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절다, 뛰 놀다, 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바알이 불로 응답하지 않자 응답해 달라고 열심히 뛰놀고 있습니다. 너무나 정신없이 뛰 놀다가 걸음이 절뚝거릴 정도로 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유월절과 연관이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으면 저주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진노가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죽음의 저주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 바알의 선지자 450명은 유월절의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도 못하는 바알의 우상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간절히 즉시로 바알에게 응답을 원하고 있습니다. 죽어있는 신에게 응답을 원하니 결국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알의 신이 얼마나 응답하지 않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로 응답받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으면 절대 응답은 내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는 능력입니다. 갈멜 산에서 엘리야가 우상의 선지자들과 싸우는 것은 이 시대 거짓 그리스도들과 싸우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왕상 18:30-31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엘리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지금까지 바알을 섬기기 위해 쌓았던 제단을 허물고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야곱의 12 아들들의 지파를 따라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제단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돌 제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도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수축하되’ רפא(라파 7495 와우계속,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고치다, 치료하다, 되살아나다, 완전하다, 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현재까지 여호와의 제단은 풀이 무성하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런 제단을 다시 새롭게 단을 수축하고 있습니다. 이 제단을 다시 쌓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다시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어있는 영혼들이 말씀으로 치료를 받아 온전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데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무너져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즉시로 돌 12개를 가지고 와서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이 단을 쌓으면서 엘리야는 절대 이 제단은 우상의 제단으로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이 우상을 섬기는 제단으로 변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갈멜 산에서 다시는 여호와의 제단이 무너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단은 지금까지 완전하게 무너져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하게 복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장소로 만든 것입니다. 12의 숫자적 의미는 통치의 완전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통치하셔야 만이 승리할 수 있는 민족인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니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해 주시고 인도해 주셔야 만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 여호와의 제단은 무너지고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한 심령이 되었다면 이곳에 다시 여호와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해 주시고, 영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기도의 제단을 쌓고, 예배를 회복하는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왕상 18:32-34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엘리야는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고 제단에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곡식을 둘 수 있는 도랑을 파고 나무를 벌여 놓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으라고 합니다. 또한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했는데 12번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랑을’ תעלה(테알라 8585) 수로, 도랑,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לה(알라 5927) 올라가다, 치료받다, 이끌어 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도랑을 파는 것은 곡식을 놓기 위해서입니다. 곡식은 소제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 이유는 맷돌에서 곡식이 갈려져야 만이 고운 가루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제를 통해 하나님께 제사가 올라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영혼이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서 회복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재 죄악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의로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각을 떠서’ נתח(나타흐 5408 와우계속,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조각조각으로 끊다, 나누다, 쪼개다, 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있습니다. 송아지의 제물은 번제에 드리게 됩니다. 송아지의 제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송아지에게 안수하여 인간의 모든 죄들을 전가시키고 송아지는 죽음으로 불태워져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각을 뜨는 것은 송아지의 모든 부분들을 조각조각 내서 구분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이 있어야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송아지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고 우상에게 드려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즉시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면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송아지의 모든 가죽을 벗기고 뼈를 추리며 내장과 정강이와 머리를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각을 뜨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았던 제물과 제사장의 역할이 없었던 것을 완전하게 회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면서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하게 송아지의 각을 떴습니다.
우리도 내 안에 우상으로 채워졌던 제단을 허물고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제물이 없으면 하나님은 나의 제사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릴 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제단에 예수그리스도의 제물이 없는 것은 모두가 우상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하니’ שלש(샬라쉬 8027 와우계속,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세 번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난 후에 소제와 번제를 드릴 제물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물을 부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통 네 개를 가지고 세 번 행하라고 명령했더니 사람들이 번제물에 물을 세 번째 붓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물을 부으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불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바알의 신은 번개의 신이면서도 불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많은 거짓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사람들 몰래 번제물 밑에서 불을 피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작은 의심도 갖지 못하도록 물을 갖다 부으라고 했는데 총 12번의 물을 쏟아붓게 됩니다. 12는 통치의 완전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12라는 숫자를 계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행동에 옮겨 통 네 개로 세 번씩 제물과 나무에 물을 붓고 있습니다. 명령에 온전하게 반응한 것이며 이 세 번의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기적을 믿게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 물로 깨끗하게 씻어 온전하게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내 안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이 씻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에 여호와의 불이 내리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제단이 수축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이 있으면 성령의 불이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왕상 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붓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불로 제단에 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불로 응답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의 제물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모두 마르게 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두려워 엎드리면서 여호와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기손’ קישון(키숀 7028) 기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קוש(코쉬 6983) 덫을 놓다, 미끼를 놓다, 올무로 잡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나서 바알 선지자들을 붙잡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서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죽이고 있습니다.
기손 시내는 갈멜 산 아래에 있는 강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것에 대한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엘리야를 통해 갈멜 산에서 대결을 벌이게 한 것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기 위한 덫을 쳐 놓은 것입니다. 사냥꾼이 덫을 놓고 동물들을 잡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상의 선지자들을 불을 내리는 제사라는 미끼로 유인하여 올무로 잡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거나 좋아하면 우상입니다. 내 안에 조그마한 우상이 있다면 완전하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알의 선지자들을 한 명도 남겨두지 않고 죽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우상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보혈이 내 심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무너진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을 새롭게 쌓아야 합니다. 무너진 십자가 예배를 회복하고 사라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안 되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상담과, 심리학과, 문학과, 과학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강단들도 이런 것들로 물들어 간다면 죽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기쁘게 하는 제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제단이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갈멜 산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비 복음을 전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드는 자들도 이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고 음행 하게 하는 자들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엘리야처럼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바알의 우상 숭배자들과 같은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그들에게 전파하여 거짓된 우상들이 파괴되고 거짓된 생각들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나갈 때에 가능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자신의 힘으로 나갔다면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하나님이 맞서 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갈멜 산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앞서 나가셔서 우상숭배자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룻기 1장 원어성경 설교말씀]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룻 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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