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자와 나사로 설교문 중에서 바라의 삶과 야차르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ברא(바라)의 삶과 יצר(야차르)의 삶”(눅16:19-31)
♠명제 : 바라의 삶은 거지의 삶이고 야차르의 삶은 부자의 삶이다.
♠목적 : 바라의 삶은 속사람의 삶이고 야차르의 삶은 겉 사람의 삶이다.
우리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왜 나왔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에 관하여 말씀을 하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욕심이 많고 율법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돈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바로 부자는 바리새인들을 상징하고 있고 나사로는 돈 없고 질병에 걸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자는 율법주의자들을 말하고 나사로는 복음주의자들을 말합니다.
그럼 ‘바라’의 삶과 ‘야차르’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바라’ 라는 단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할 때에 무에서 유로 창조되어 순간적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한 자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어주신 새 사람을 입은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지으심을 받은’ 이라는 단어가 ברא(바라)입니다. 모든 원죄가 순간에 사라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사람이 새롭게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원죄가 사라져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런 자가 바로 나사로입니다. 겉모습은 병들고 가난하여 고통 중에 살았지만 속사람은 모든 원죄가 사라져 ברא(바라)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야차르’ 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 ‘야차르’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셔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지으시고’ 라는 단어가 יצר(야차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에 영혼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흙으로 빚은 인간이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오늘 말씀에서 부자입니다. 부자는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겉모습으로만 호화롭게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야차르’의 삶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뜻대로 율법의 행위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나사로의 ‘바라’의 삶과 부자의 ‘야차르’의 삶을 비교하여 나는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야차르’의 삶을 살았던 부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첫째, 겉 사람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부자는 성경에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 매일같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차르’의 흙으로 빚은 겉 사람만 치장하고 흥에 겨워 살았습니다.
‘자색 옷’ πορφυρα(포르퓌라 4209 명사, 목적격, 여성, 단수) 자주 빛 의복, 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자색은 왕을 상징합니다. 자색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갑각류를 빻아서 염색하여 만들었습니다. 자색은 많은 양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당시에 왕족만 입을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당시에 귀족들도 입었지만 왕의 특권을 내세우기 위해서 귀족들도 입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색은 귀하고 특권층이 입었던 옷입니다. 부자가 자색 옷을 입고 있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자신을 드러내 놓고 싶은 목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우월감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더 나타내고 싶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자색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색입니다. 행위주의자들은 자신이 왕이 되려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앉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부자입니다.
‘고운 베옷’ βυσσος(뷧소스 1040 명사, 목적격, 여성, 단수) 삼베, 베옷, 이라는 뜻입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 입는 옷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고운 베옷은 왜 입고 있는 것일까요? 구약에 베옷은 성막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휘장을 짤 때에 가늘게 꼰 베실이 있는데 그것이 고운 베옷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한 거룩 성을 의미합니다.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이것을 입고 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서 자기는 원죄가 없는 자라는 것을 스스로 보이기 위해 입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행위주의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썩어질 겉 사람만 높이다가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
‘호화롭게’ λαμπρως(람프로스 2988) 화려하게, 찬란하게, 사치스럽게,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λαμπας(람파스 2985) 횃불, 등불,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자신의 집에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인생을 즐겼습니다. 이렇게 지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이렇게 화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등불이 된다는 착각에서 자신을 들러내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횃불과 같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인생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묵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의 삶이 바로 ‘야차르’의 삶입니다. 겉 사람만 기분이 좋으면 되고 겉 사람만 화려하게 치장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둘째,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눅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게 됩니다. 그랬더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부자와 나사로는 모두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야차르’의 인생은 죽게 되어있다고 말씀합니다. 죽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음부’ άδης(하데스 86) 죽은 자의 거처, 음부,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통상 음부를 지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부는 지옥이 아닙니다. ‘야차르’의 몸이 죽고 난 후에 부활될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히브리어로는 שאול(쉐올 7585) 죽은 자의 거처입니다. 음부는 이 세상에서 원죄가 해결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 음부입니다.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심판의 부활로 나와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지옥이 확정된 자들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야차르’의 겉 사람만 화려하게 치장하면서 살았으며 자신의 의를 높이는 데만 신경 쓰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음부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셋째, 부자는 죽어 음부에 있고 불꽃가운데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눅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현재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음부가 지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부는 지옥이 아니라 대기 장소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질 것이 확정된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둘째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음부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계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첫째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고 난 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데 부자처럼 ‘야차르’의 삶을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천 년이 차기까지 음부에서 죽은 상태로 대기하게 됩니다.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면서 고통 중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부자와 나사로가 있는 곳은 어떻습니까? 구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오고 갈 수 없습니다.
눅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말합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우리가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음부에서 이리로 건너올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상태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연옥은 서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음부는 절대 왔다 갔다 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부자처럼 겉 사람으로만 열심히 거룩하게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체험하지 못하고 가는 곳입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지옥의 심판 때까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넷째, 부자는 자신이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고 나서 나사로를 자신의 형제에게 보내달라고 합니다.
눅16:27-28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자신의 집에 보내서 자신의 형제 다섯 명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이렇게 고통받는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야차르’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음부에 와보니 그때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자신의 의만 높였던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자신의 형제 다섯 명에게 나사로를 보내 복음을 증거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해야 그때서 회개합니다. 하지만 흙으로 빚은 ‘야차르’의 몸으로 살아 있을 때에만 구원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이 몸이 죽고 난 후에는 음부로 가서 지옥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주님의 의를 나타내야 합니다. 원죄가 사라지지 않으면 인간은 모두가 음부에 떨어져 지옥의 불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자는 겉 사람인 ‘야차르’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살았습니다.
그럼 ‘바라’의 삶을 살았던 나사로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첫째, 나사로는 병들은 거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눅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는 성경에 이름도 없지만 거지의 삶을 살았던 나사로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빚은 ‘야차르’의 삶을 살지 않고 속사람이 변화되어 원죄에서 회복한 ‘바라’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억하게 됩니다. 나사로의 이름은 עזר(에제르 5828) 도움, 원조, 돕는 자, 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라는 이름입니다.
‘헌데 투성이로’ έλκοω(헬코오 1669 동사,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남성, 단수) 종기가 나다, 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야차르’의 몸은 남들이 볼 때에 흉물스러운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로와 같은 자들을 부정한 자로 취급하여 옆에도 있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속사람은 ‘바라’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원죄를 치료해 주셔서 모든 원죄가 사라진 ‘바라’의 몸입니다. 부자는 사람들이 볼 때에 ‘야차르’의 몸이 깨끗하고 화려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속사람은 나사로처럼 종기가 나서 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는 원죄의 죄인입니다. 나사로는 온몸에 종기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치료하려고 해도 치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미 온몸에 퍼져 더 이상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나사로의 몸에 종기가 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려진채’ βαλλω(발로 906 동사, 직설법, 과거완료, 수동태, 단수, 3인칭) 던지다, 내버리다, 토하다, 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온몸에 종기가 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합니다. 만약에 나사로를 보면 사람들이 구역질을 하면서 토하고 돌을 던지고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사로는 배고프고 살 수 없어서 부자의 대문 앞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사로가 부자의 대문에 온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나사로가 부자의 집 문밖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먼 옛날에 종기가 발병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여 부자의 대문 밖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오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환경과 상황이 부자의 대문 밖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사로의 몸에 종기가 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오다 보니 부자의 대문 앞까지 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속사람이 ‘바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나사로가 악성 종기에 걸린 것처럼 원죄에 빠져 죽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악성 종기와 같은 원죄가 말끔하게 치료받은 자들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야차르’의 몸은 가난하고, 병들고, 미련하고, 권력도 없이 살고 있지만 나사로와 같이 속사람이 바뀐 ‘바라’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이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게 됩니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속사람이 바뀐 ‘바라’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곳은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속사람이 완전히 바뀌어서 원죄가 사라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눅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나사로는 현재 거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정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입니다. 권력을 가진 율법주의자와 세상에서 능력과 권세가 전혀 없는 복음주의자들을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배가 고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부스러기는 유대인들이 식사를 할 때에 빵 한 조각을 남겨놓습니다. 이것으로 식사를 마친 후에 수염이나 옷에 묻은 이물질들을 떨어내고 버리게 됩니다. 이것을 개들이 먹었습니다. 나사로는 이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부자는 이 정도의 동정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비참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았지만 속사람이 바뀐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기쁨이 있었고 소망이 있었습니다. 개들이 나사로에게 와서 종기가 난 몸을 핥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속사람인 ‘바라’는 변화되지 않고 겉 사람인 ‘야차르’의 삶을 동경하고 있습니까? 부자처럼 매일같이 호화롭게 쇼핑하면서 명품 가방과, 시계와, 자동차와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야차르’의 몸이 죽을 때에 함께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바라’의 삶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 인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영원히 병도 없고, 고통도 없이 살게 됩니다. 현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바뀌어 원죄가 사라진 ‘바라’의 인생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나사로도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눅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도 ‘야차르’의 몸을 가지고 있고 나사로도 ‘야차르’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을 때에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을 낙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중요한 인물입니다. 민족의 아버지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라’의 삶을 살았던 나사로가 부활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낙원입니다. 헬라어로 낙원은 παραδεισος(파라데이소스 3857) 정원, 공원, 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עדן(에덴 5731) 기쁨, 즐거움, 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에덴의 기쁨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겉 사람은 거지처럼 병들어 살았지만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죽어서 부활 때까지 낙원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들도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낙원에서 대기하고 있게 됩니다.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하나님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사망인 지옥의 불 못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낙원에 있는 자들을 부활시켜 데리고 오게 됩니다. 그리고 천년 왕국에 들어가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면서 주님과 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속사람이 ‘바라’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한 편의 강도가 구원받고 즉시 속사람이 ‘바라’가 되어 들어간 곳이 낙원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나사로처럼 이 세상에서 힘들고, 지치고, 고통 중에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야차르’의 몸인 겉 사람은 날마다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인 ‘바라’는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부자의 ‘야차르’의 생활은 아주 잠깐입니다. 영원한 시간에 비교한다면 점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시간 속에서 겉 사람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시간을 모두 쏟아버리고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면서 인생을 소모한다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나사로는 비록 거지의 삶을 살았고 온 몸에 부정한 종기가 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했고, 병들었고, 남들보다 좋은 집에, 자동차에, 명품을 가지고 살지 못했지만 속사람은 변화를 받아 원죄가 사라지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돈이 부족하다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속사람이 구원을 받았고 변화가 되었기 때문에 이 은혜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자나 나사로가 모두 죽었듯이 이 세상에서 돈 많은 사람이나,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의 속사람이 변화되기를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원죄가 깨끗이 씻김 받는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낙원에 들어가 첫째 부활에 참여할 때까지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야차르’의 썩어질 몸에 치장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바라’의 몸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치장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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