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창세기 1장 설교문] “창조사역 넷째날”(창 1:14-19)

체데크 2020. 6. 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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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넷째 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창조사역 넷째날”(창1:14-19)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이 빛은 태양이 만들어 내는 빛과는 조금 다른 빛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선포하여 빛이 있으라 했더니 빛이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사역하신 분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복음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빛은 낮이나 밤이나 어디에서든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빛을 창조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바른 복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복음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영혼을 죽이고 결국 지옥의 불 못으로 내던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죽었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복음의 빛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치료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캄캄한 곳에서만 살면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빛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비가 계속 오는 날에는 사람의 기분이 처지는 것입니다. 짜증도 나고, 화도 갑자기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날씨가 좋은 날은 기분도 상쾌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말씀 듣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더 좋고 놀러 다니는 것이 더 좋고, 예배는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직 빛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자유 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자유 함을 누리고 주님의 기쁨을 맛보면 주님 안에 사는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날에 만들었던 이 빛은 바로 복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빛이 낮을 주관하고 어둠은 밤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낮의 주관함을 받는 것입니다. 빛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의 행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전에는 어둠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둠에 살다 보니 늘 마음이 우중충한 것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없습니다. 늘 답답하고 인생이 왜 이리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 라는 생각만 나고 나에게는 늘 안 좋은 일만 생기는 것만 같은 생각들이 나를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가면 무섭고, 두렵고, 떨리고, 앞길이 보이지 않고 어떤 장애물이 나를 덮칠지 모르고 그러니 걱정 근심, 불안 초조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낮에 혼자 걸어 다녀 보세요. 마음도 가볍고 앞길이 환하게 보이고 겁나지 않고, 두렵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내 마음대로 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영혼이 늘 죄악의 어둠에 있으면 두려운 것입니다. 앞길이 캄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빛 되시는 예수님 안에 있으면 두렵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평안하게 주님의 보호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빛 가운데 와야 합니다.

 

 오늘 넷째 날에 하나님은 하늘의 궁창에 광명 체들을 만들어 낮과 밤을 나누시고 이때부터 날짜와 시간과 하루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들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한계를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한계를 느끼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이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것도 지옥에서 영원이냐! 아니면 천국에서 영원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나뉘게 하고’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בדל바달) 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히필형으로 사역능동형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니 낮과 밤이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스스로 된 것이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나누게 하신 것입니다.

 

 이루게 하라’ 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היה하야) 라는 단어입니다. 칼형으로 능동형으로서 직접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나누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제는 완료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완전히 더 이상 손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끝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면 기쁨으로 바로 즉시 실행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할까! 말까! 생각하면서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만물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강력하게 받고 직접 능동적으로 일을 하여 끝마쳤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절대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절에는 빛을 내는 이런 광명 체들이 하늘에서 땅을 비추라고 하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비추라’ 라는 단어는 (אור오르)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도 히필형 사역능동형으로 쓰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추라고 시켜서 광명 체들이 땅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 뜻은 빛을 비추게 하다, 빛나게 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렸더니 광명 체들이 그대로 빛을 비추어서 땅을 밝혔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다른 사람에게 빛을 줄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하려면 어둠을 밝혀야 되는데 만약에 나에게 빛이 없다면 절대로 어둠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빛을 발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빛 되시는 예수님께 빛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빛을 가지고 밖에 나가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전자제품도 배터리가 방전되면 아무리 좋은 기계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전되는 순간 기계의 수명도 끝입니다. 하지만 방전되기 전에 우리는 배터리를 충전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기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 기계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황과 육신적인 삶에도 적용이 됩니다. 빛이 떨어질 만하면 우리는 복음의 말씀으로 충전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충전을 하고 육신적으로는 휴식을 가지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여 새롭게 다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광명 체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는 큰 광명 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하나는 작은 광명 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에 별을 만드셔서 우리가 별을 볼 수 있고 태양과 달을 볼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창조하시는 목적은 바로 인간을 위해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 땅에서 생활을 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최고로 우리에게 제공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걸작품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중에 가장 좋은 걸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광명 체들을 만드시고 이것들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할 때에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말씀을 들으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집에 방문했을 때에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서 기쁘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부엌에서 예수님의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눅 10:38-42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발밑에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분주한지라’ 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περισπαω페리스파오) 입니다. 이것은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끌리다, 끌려가다, 마음이 어수선하다, 아주 바쁘다, 과로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본질적인 것보다 비본질적인 일에 더 우선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먼저 할 일과 중요한 일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할 일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중요한 일 먼저 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먼저 중요한 말씀을 듣는 것을 먼저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 물론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말씀 듣는 것은 뒷전이고 음식만을 준비하고 있다면 이것은 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일은 반드시 지금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먼저 할 때에 주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바쁩니까? 세상의 먼저 해야 할 일 때문에 바빠서 예배에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음식 먹으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을 잘 듣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먼저 우선해야 합니다.

 

세상의 일에 정신없어서 마음이 분주하면 안 됩니다. 세상 일로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주님의 일이 아닌 세상의 잡담하는 일에 분주하고 마음이 빼앗겨서 정신 없이 다니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직업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날에 얼마든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다른 일이 먼저 우선이 되어 예배는 뒷전이고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 정신 없이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뻐하시고 순종할 때에 좋아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바쁘게 분주하게 다니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순종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덴동산의 네개의 강”(창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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