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6장에서 욥은 엘리바스의 권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인 자신도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면서 자기를 질책하는 욥은 화가 났습니다. 자신도 율법주의 신앙을 하면서 욥에게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스스로 거룩하다고 하니 욥이 화가 나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티를 보지 말고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야 하겠습니다.
엘리바스의 권면을 지적하는 욥(욥 6:24-30)
24절 호루니 바아니 아하리쉬 우마 샤기티 하비누 리
성 경: [욥6:2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허점을 지적하는 욥]
지금까지 욥은 직유법과 반어법을 사용하여 그의 친구들의 무정(無情)한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같은 문학적 기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질책을 가한다. 따라서 본문의 전체적 분위기는 다분히 공격적이며 격앙(激昻)되어 있다. 즉, 욥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지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말속에는 (1) 은연중 자신을 죄인의 동류(同流)로 취급한 엘리바스에 대한 강한 불쾌감과, (2) 자신은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한 범죄를 결코 자행하지 않았다는, 소위 자기 의에 대한 항변(10절, 29절), 그리고 (3) 만일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확신하고 있다면 암시적으로 언급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5절 마 니미리추 이미레 요셰브 우마 요키아흐 호케아흐 미켐
성 경: [욥6:2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허점을 지적하는 욥]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힘이 있는지'(KJV, RSV, How forcible are right words)이다. 그런데 NIV와 포우프(M.H. Pope)는 `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고역(비탄)스러운지'(NIV, How painful are honest words)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 원어상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에서 `유력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라츠'가 `힘있는', `효과적인', `설득력 있는', `기분 좋은'등의 뜻을 가질 뿐 아니라(시 119;103), `비탄에 젖은', `고역스러운'등의 뜻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상 2:8; 렘 14:17 등).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의 뜻은 변함이 없다. 즉 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이 부정직하며, 따라서 그 자신은 그 변론에 순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26절 하리호카흐 밀림 타히쇼부 우리루아흐 이미레 노아쉬
성 경: [욥6:2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허점을 지적하는 욥]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욥의 자기변호: 일반적으로 격심한 고난에 처한 자는 이성과 논리를 떠나 자기감정을 무자비하게 토해낸다. 마치 그것은 바람처럼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일 수 있다. 3장에 나타난 욥의 변론 역시 이러한 성향이 없지 않다. 즉, 그는 가중되는 고난의 압박감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혹에 못 이겨 가히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일들을 소원하는 말을 토해내었던 바, 이러한 것은 그의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결코 이성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난으로 모든 소망이 상실된 상태에서 발설된 욥의 말을 책망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아무 필요도, 소용도 없다는 의미이다. (2) 친구들에 대한 비난 : 욥은 고난 중에 발설된 자신의 말이 그 친구들에 의해 정당히 받아들여 평가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것을 마치 지나가는 바람처럼 별 가치없이 받아들였다. 아마 욥은 자신의 정황과 내적 고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주어진 자기 변증적인 엘리바스의 변론 속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신의 말을 사려 깊고 분별력 있게 받아주지 못한 그의 친구들에 대한 욥의 실망과 질책의 뜻이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너는 절망한 자의 말을 바람처럼 취급하려는가?'(NIV, KJV, RS V, Do you treat the words of a despairing man as wind?)로 번역함으로써 이 같은 해석을 지지한다.
27절 아프 알 야톰 타필루 비티카루 알 레아켐
성 경: [욥6:2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허점을 지적하는 욥]
고아를 제비뽑으며 - 앞에서 친구들의 부정직과 이기심을 비난(21, 25절)한 욥은 여기서 그들의 무자비함을 책망하고 있다. 고대 히브리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최하류 계층으로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다(출 22:22; 신 14:29; 16:14; 27:19; 사 1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악한 자들은 채무 능력이 없는 과부의 자녀(개역 성경은 이것을 `고아'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상 `아버지가 없는 자'가 정확함)를 놓고 제비뽑기를 하였다. 즉, 돈을 지불받지 못한 데 대한 대가로 과부의 자녀들을 제비 뽑아 노예로 삼거나 노예 시장에 팔았다(왕하 4:1; 느 5:5; 욜 3:3; 욥 1절; 나 3:10). 이러한 무자비한 행위를 예로 들어서 욥은 친구들의 동정 없음을 질책한다.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번역된다. (1) KJV의 번역 : `너희 벗을 위해 구덩이를 팔 자로구나'(ye dig a pit for your friend). 이들은 개역 성경에서 `매매하다'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카라'를 `파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 원문에 나타나지 않는 `솨하트'(구덩이)를 보충하고 있다. 전후 문맥상 충분히 이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요셉의 예에서 보듯(창 37:24, 28) 고대인들은 자신의 대적자를 처치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2) NIV, LB, ICC(Driver & Gray), 공동 번역, 랑게(Lange) 번역 :이들은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너희의 친구들을 팔아넘길 자들이로다'(barteraway your friend)로 옮긴다. 절친한 친구를 상품으로 팔아넘긴다는 이러한 표현 속에서 이미 욥과 그의 친구들 간의 불신과 갈등의 벽이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8절 비아타 호일루 피누 비 비알 피네켐 임 아카제브
성 경: [욥6:28]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허점을 지적하는 욥]
이제 너희가...원하노라 - 이 구절 앞에 반대 접속사인 `그러나'(NIV, RSV, But)를 첨가하면 뜻이 더욱 잘 살아난다. 지금까지의 경직된 질책의 어투가 변하여 온화한 간청 조로 전환됨을 알 수 있다.
29절 쉬부 나 알 티히 아발라 비쉬비 비슈부 오드 치디키 바흐
성 경: [욥6:2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허점을 지적하는 욥]
너희는 돌이키라 - 이 말속에는 두 가지 요청이 함축되어 있다. (1) 나를 죄인으로 가정하는 일을 즉시 중단하라. (2) 나의 입장에서 보라. 욥의 현재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주어진 친구들의 변론은 욥의 감정만 자극시켰다. 따라서 욥은 여기서 그들에게 기존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욥 자신의 위치에 서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고하고 있다.
30절 하예쉬 비리쇼니 아발라 임 히키 로 야빈 후오트
성 경: [욥6:3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허점을 지적하는 욥]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 여기서 다시 한번 욥은 지금까지 한 말속에 잘못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3절 주석 참조).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궤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본절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재난'(RSV, calamity)으로 볼 경우 : 이는 욥이 자신에게 임한 재난이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욥의 재난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욥의 친구들은 은연중 그것을 욥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욥은 그 재난이 자신의 범죄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만은 확신하고 있다. 요컨대 욥은 자신이 재난을 받을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과 이해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궤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와'가 2절; 30:13에서 `재앙'으로 번역되어있음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한 시도이다(Schlottmann, Dillmann). (2) `악'(KJV, perverse things ; NIV, malice)으로 볼 경우 : 이는 욥이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즉 자신은 아직까지 도덕적. 지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문제가 논란이 될 때 그것을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12:2, 3). 위의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을 취하든 간에 본문은 공히 욥의 도덕적 판단 능력(또는 이해력)에 대한 자기변호의 뜻을 내포한다.
[마가복음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음(막 1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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