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마태복음 13장 예수님의 말씀] 누룩의 비유 설교말씀(마 13:33)

체데크 2022. 1. 13. 12:11
반응형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누룩의 비유

 

본문: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오늘은 우리가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 가운데 네 번째 해당되는 누룩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누룩의 비유는 대단히 짧습니다. 단 한 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말씀을 짧게 전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서 전부를 부풀게 한 것처럼, 오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누룩처럼 깊이 스며드는 가운데 은혜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충분하게 부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골에 어떤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밭에 수박을 잔뜩 심었습니다. 땀흘리면서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잘 가꾸었습니다. 그 덕분에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아무리 수박밭을 잘 지키려고 해도 언제 도적이 들어오는지 아침이 되면 꼭 몇 통씩 밤사이에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도적을 물리칠 수 있을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멋진 묘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주사기에 농약을 넣어서 수박 한 통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경고문을 붙였습니다.

"이 수박밭의 수박 한 통에는 농약이 들어 있음. 먹다가 죽어도 책임 안질 것임. 주인백."

그로부터 한 주일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인이 써놓은 경고문 옆에 또 다른 경고문이 붙었습니다. 도적이 써놓은 것이었습니다. 내용인즉 이러합니다.

"이 수박밭에 있는 수박들 가운데 두 통에 농약이 들었음. 그 가운데 한 통은 주인이 알고, 또 한 통은 도적이 앎. 도적백."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선입니다. 예컨대 내가 고함을 지르면 다른 사람도 고함을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야 됩니다. 그것이 이기는 방법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 이 분 댁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잠자던 식구들을 모두 깨웠습니다. 강도는 칼을 들이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방정환 선생은 있는 돈을 찾아 강도에게 주었습니다. 강도는 돈을 챙겨 들더니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소파 선생이 점잖게 한 마디 나무랐습니다.

"이 사람아, 돈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나?"

강도는 별 싱거운 사람을 다 보겠다는 듯이 "고맙네"라고 한 마디 던지고서는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강도가 얼마 안 가서 순찰을 도는 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경찰이 강도의 몸을 수색해 보니까 주머니에서 칼과 꽤 많은 돈이 나왔습니다. 경찰은 틀림없이 그가 어디에선가 강도 짓을 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강도를 추궁한 끝에 그를 끌고서 소파 선생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이 경찰과 함께 온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서 내가 돈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준 돈을 받고서 고맙다는 말까지 하고 갔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강도입니까?"

경찰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강도를 풀어주고 갔습니다. 그제야 강도는 무릎을 꿇고서 소파 선생 앞에 백배 사죄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오갈 데 없는 강도를 소파 선생은 한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으로 감동시켜야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서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누룩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믿음의 감화력을 끼치며,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의 시민 된 우리가 이 시대에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33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어디에 누룩을 갖다 넣었습니까?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갖다 넣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부 부풀게 한."

편의상 오늘 말씀을 이렇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가루의 양이 서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서말은 가루의 양이 많다는 뜻입니까? 적다는 뜻입니까? 많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떡을 충분히 많이 한다고 할 때, 그 양을 가루 서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문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서 보니까 맞은편에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가서 그분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장막에 들어가서 자기 아내 사라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창18:6의 말씀입니다.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여기서 "세 스아"라는 말은 서말을 뜻합니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충분한 떡이 필요합니다. 먹다가 모자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여튼 여인이 최대한도로 빚을 수 있는 반죽의 양이 가루 서말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떡이 많다는 표현으로 "한 대야"나 된다고 했습니다. "한 대야"와 "가루 서말"은 똑같은 용법입니다.

아무튼 많은 양의 가루 서말 속에 적은 양의 누룩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루는 많고 누룩은 적으니까, 누룩이 가루에 짓눌려서 가루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많은 양의 가루 속에 들어가서 가루 전부를 부풀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누룩이 가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누룩이 가루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누룩이 가루 화가 된 것이 아닙니다. 가루가 누룩화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특성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의 감화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천국은 작게 시작했습니다. 온갖 핍박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은 점점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31 운동 당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나라의 인구수가 약 2000만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의 수는 고작 30만 명이었습니다. 퍼센트로 따지면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적은 누룩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민족 전체를 움직여 31 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습니다.

지도를 펴놓고 우리나라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곳을 점찍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교회가 중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한 민족지도자 33명 가운데 절반에 이르는 16명이 기독교의 목사님들이고 장로님들이었습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는 가운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정신인 무저항주의에 입각해서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31 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가루 서말 전체를 부풀게 한 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성취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천국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작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룩인 복음이 가루 서말인 이 세상 전체를 거의 부풀게 했습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최대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11억이 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큰 종교가 무엇입니까? 이슬람교입니다. 7억 5천만 명입니다. 물론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탄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실합니다.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구름 타고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가라지들은 추수꾼을 시켜서 다 모아 풀무불에 집어던지실 것입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곡식 된 우리는 다 모아서 아버지의 곳간인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거기서 의인들은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었다고 했습니다.

누룩은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룩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선반 위에 그대로 두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룩은 가루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아마도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는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깊숙이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속에 속속들이 잘 스며들어 반죽이 잘 부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높고 높은 보좌에 가만히 앉으셔서 우리를 쳐다보기만 하시면서 사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낮고 낮은 이 땅에 예수님은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룩이 되셔서 가루 서말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룩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누룩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명을 누가 감당해야겠습니까? 그 나라의 백성들인 우리가 이 사명을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17:1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부풀게 하라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였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철학 박사였습니다. 신학 박사였습니다. 의학박사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말씀 가운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부자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부자는 바로 자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흑인들이다. 만일 내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오는 부자처럼 이것은 나 스스로를 죽이는 길이요, 내 가족을 죽이는 길이라."

그는 즉시 결단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밀림 속에 있는 불쌍한 흑인들을 돌보면서 자기의 여생을 다 바쳤습니다. 하루는 흑인 여인 한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데 그 여인이 궁금하다는 듯 슈바이처 박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학자이자 천재적인 음악가이십니다. 그런 선생님이 어떻게 이 오지에 오셔서 고생하며 사십니까?"

그때 슈바이처 박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제게는 말로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재주가 없답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글로서, 말로서 표현하려고 해 보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삶으로 그 사랑을 내게 보여주신 것처럼 나도 그 본을 따라서 내 행동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뿐입니다. 그런데 비록 작은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실천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오히려 내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와 같이 건강을 주셨고, 마음의 행복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누룩으로서 가루 서말인 이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던지신 것처럼, 슈바이처 박사도 한 줌의 누룩이 되어서 아프리카 밀림 속으로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루 서말인 이 세상 속, 내가 처해있는 그 자리에서 누룩처럼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은 결과 가루 전체가 부풀었다고 했습니다.

누룩은 좋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누룩이 가루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루 전체를 부풀게 했습니다. 이따금씩 성경에 보면 누룩이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 위선 등이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누룩은 좋은 영향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유월절이 되면 한 주간 동안 무교병을 먹습니다. 누룩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떡입니다. 맛이 없습니다. 돌멩이처럼 딱딱해서 먹기가 힘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의 고생을 몸소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625가 가까워지면 개떡을 먹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월절 한 주간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습니다. 부드럽습니다. 맛도 좋습니다. 한결 먹기가 좋습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 전부 부풀게 해서 맛 좋은 떡을 만들 듯이 우리도 있는 처소에서 누룩처럼 살맛 나는 분위기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이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잔이라는 어린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13살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계속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벽돌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자기 밥벌이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잔에게는 남다른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기도 생활도 열심히 하고 일하면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린 잔에게 가슴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입구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가 오는 날이면 바닥이 질퍽질퍽거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성도들 가운데는 비가 오면 아예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에는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부자도 있었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또 멋있는 마차를 끌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 입구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린 잔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린 잔은 기도하는 가운데 결심했습니다.

"좋다! 나라도 내 교회 입구를 벽돌로 한 번 멋있게 포장해 보리라!"

그 당시 잔이 벽돌공장에서 받는 일당은 7센트였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식대를 제하고 또 생활비 일부를 제하고 나면, 꼭 하루에 벽돌을 한 장 살 수 있는 돈이 남았습니다. 잔은 그 돈으로 벽돌을 매일 한 장씩 샀습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교회에 들러 그것을 가지고 교회 입구를 깔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잔이 벽돌로 교회 입구를 포장하는 데는 약 2년의 세월이 걸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그 세월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기뻤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살맛이 났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몹시도 가벼웠습니다.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열흘이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매일 저녁 벽돌을 가져와서 교회 입구를 포장하는 잔의 모습을 교회 어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 그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드디어 무디었던 어른들의 마음이 움직여졌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어른들의 손으로 교회 입구는 깨끗하게 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회 안까지도 새롭게 단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잔의 삶을 무한히 더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체신장관까지 역임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어지는 잔 와나메이커(John Maker, 18381922)입니다.

우리도 그의 삶처럼 내가 있는 처소에서 누룩과 같이 좋은 영향력을 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로 인해서 내 가정이, 내 이웃이, 내 일터가, 우리 교회가 살맛 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어지는 축복된 역사가 우리 모두를 통해서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 로마서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9-18)

 

[신약 히브리어 성경 로마서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9-18)

로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는데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원죄의 죄인이 의인이 되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

cdk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