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예수님의 말씀]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눅 14:1-35)

체데크 2022. 1. 1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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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겸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상석에 앉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구제에 대한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눅 14:1-35)

 

1-14, 식탁 교훈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 . . .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한 우두머리의 집에 떡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다. 그는 그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거절치 않으셨다. 그는 죄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들에게 필요하듯이, 의인들에게는 구주가 필요치 않고 죄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눅 5:31).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엿보고 있었다. ‘엿보다는 원어(파라테레오)는 ‘자세히 주시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를 환영하고 영접할 것이지만, 사람이 그를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그를 거부하고 주시하고 경계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대신에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2-4]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 . .

거기에 주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dropsy)은 수종(水腫) 혹은 부종(浮腫)이라고 하는데 몸이 붓는 병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인지 질문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시며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잠잠하자,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치시고 보내셨다.

얼마 전 예수께서는 열 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는데(13:15-16) 이번에는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주께서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그의 크신 긍휼 때문이며 또 그가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심을 증거한 것이었다.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인애(仁愛)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6:6). 바리새인들은 종교 의식만 중시하는 무지한 외식자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보다 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

[5-6]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그는 지난 번 사건에서도,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 여덟 해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었다(눅 13:15-16).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은 이렇게 상식적으로도 그 정당성이 이해되는 일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생각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신앙생활의 더 중요한 내용, 즉 경건과 도덕성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단지 종교적 형식만을 붙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7-11]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 . . .

또 예수께서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상석(上席)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上座)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末席)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상석에 앉으려 하는 마음은 일종의 교만과 명예심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석에 앉으려 하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교훈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겸손하게 처신하라는 교훈이시다. 예수께서는 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명하신 성도의 매우 중요한 덕이다.

또 그것은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존귀케 되는 길이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하였다(벧전 5:6). 교만은 다툼의 원인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람을 낮아지게 만들지만, 사람이 겸손하면 다른 사람과도 화평케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높임과 사랑을 받을 것이다.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 . . .

또 예수께서는 자기를 청한 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사람이 선을 베푼 후 상대방에게서 그것의 갚음을 받으면 먼저 베푼 선이 더 이상 칭찬과 상을 받을 선이 되지 못할 것이다.

[13-14]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 . . .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잔치를 배설하거든[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발을]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단순히 베푸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러면 의인들의 부활의 날이 있는데, 그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생활이다(눅 12:33-34).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갚아 주실 것이다(19:17). 이렇게 단순히 베푸는 생활은 사람이 현세를 초월하여 내세를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내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을 바라볼 때, 사람은 세상에서 바르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6:9-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합당하다. 주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그는 그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또 한 번 더 증거하셨다. 그는 성도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교훈하셨다. 우리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결석자들이나 병약한 교우들을 위한 심방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와 기타 선한 봉사의 일들이다. 우리는 주일에 오전과 오후의 교회의 공적인 예배회들과 약간의 휴식 외에 전도와 심방, 구제와 봉사의 일들을 할 수 있고 또 시시때때로 해야 할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 및 주방 봉사는 귀한 일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잔치에 초청되었을 때 말석에 앉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교만은 가장 큰 악이다. 성도의 덕은 겸손이다. 예수께서는 겸손의 덕을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20:26-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 오지 않으셨고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하셨다(20:28). 주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신을 비어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2:6-8).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 15:9)이며,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3:8) 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12:10; 2:3).

셋째로, 우리는 잔치할 때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청해야 한다. 우리는 차후에 무엇을 받을 것을 바라면서 남에게 선을 베풀지 말아야 한다. 참된 구제와 선행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가르치시기를,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6:2-4). 또 그는 너희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빌려주라, 구제하라]”고 말씀하셨다(눅 6:35). 사도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것은 구제의 행위로 표현된다고 가르쳤다(요일 3:16-18).

15-35, 주의 제자가 되는 길

[15-17]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 . . .

함께 먹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식사 자리에서도 그의 관심은 단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이었다. 주께서는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시며 그가 베푼 큰 잔치는 신약교회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방인들도 초청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다. 그것은 성도들 간의 교제이며 특히 성찬 교제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먹는 즐거움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그 잔치에 청하셨다. 그는 그 청한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말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주인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꾼으로 본문에 4번 언급된(17, 21, 22, 23) ‘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상징할 것이다.

[18-20]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 . . .

그런데 초청을 받은 자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했다. 하나는,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했고, 또 하나는, “나는 소 다섯 겨리(, 열 마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했고, 또 하나는,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들의 핑계거리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일들이다. 성경은 이런 일들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한다. 그러나 잔치에 초청을 받았던 그들은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하여야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일들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6:33). 이것이 안식일 계명이나 십일조 계명의 정신이다. 성도는 7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6일을 자신의 일들에 쓰며,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10분의 9를 자신의 일들을 위해 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그 주인을 무시하였다.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한다고 해서 밭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소를 시험하지 못하거나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초청을 사양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고 가난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된 약속을 주셨다(58:14). 믿는 자들은 십일조 헌금을 내기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십일조 헌금에는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다(3:10).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믿음 없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없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 . . .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자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말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것은 우리의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뜻이다. 건강한 자들과 물질적으로 여유를 가진 자들은 그 주인의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으나, 병약한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그 초청을 들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육신적으로 병약한 자들이 먼저 교회로 인도함을 받고 먼저 천국의 복을 받게 하신다.

[22-24]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 . . .

종이 말했다.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산울가라는 원어(프라그모스)는 ‘산울타리 가의 길을 가리킨다. 여기의 내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그것은 현재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전도하고 사람들을 강권함으로 된다. 잔치 자리에 오는 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가리킨다. 처음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길 것이다.

[25-27]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 . . .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 때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간다고 다 그의 제자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도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와 제자 아닌 자를 분명히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그에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가족 관계를 초월한 절대적 차원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주의 말씀은 가족들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곳에서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본문에서 미워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가족의 명령이 충돌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가족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우리 목숨이 위협 당하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신앙은 절대적 차원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자이시다. 아무리 사랑스런 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는 못한다. 사실상 육신의 생명도 연장시켜주지 못한다. 불치병에 걸린 자를 도울 수 있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시다.

우리가 가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목숨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이며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심지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의 현실은 자기 부정의 시험대요 훈련장이다. 성도는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주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주의 말씀과 본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킨다.

[28-30]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사람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여 그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시작해야지, 그런 검토가 없이 그냥 시작하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31-32]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 명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자신의 군사력이 상대방보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처음부터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군사력을 비교해보지 않고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킬 자는 없을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 . . .

예수께서는 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위의 두 비유가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망대를 건립하는 것과 다른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비유되었고, 건축비용을 예산하는 것과 전투력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사람은 자기의 가진 것으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시편 49:8, “저희 생명의 구속(救贖)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과 힘으로는 불가능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버리면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일시적 세상을 버리면 영원한 천국을 얻으며,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면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을 영원한 영광의 세계의 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썩어질 육신의 몸을 버리면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얻으며, 세상적 기쁨을 버리면 비록 현재는 때때로 주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만 장차 영원히 눈물 없는 기쁨과 평강의 세계를 얻는다.

[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소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징하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들이 성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이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초월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이고 자기 욕심에 얽매여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자는 실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며 참된 성도가 아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가 주를 배신하였고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딤후 4:10). 우리는 맛 잃은 소금 같은 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참된 성도,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들이 바쁘다고 핑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곧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는 일을 세상 일들보다 먼저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초청을 해야 하고 또 사람들을 강권하여 교회를 채워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언제까지 연연하지 말고 우리의 초청 대상을 변경하고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이나 병약한 자들을 교회로 초청해야 한다. 또 우리는 다른 동네에 있는 사람들도 누구든지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채우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모든 신자들은 열심으로 전도하고 영혼들을 강권하여 바르고 참된 교회로 인도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잔치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오는 무리 중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자기 가족들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아니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한다면, 우리는 하니님께 대한 의무를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우리의 절대적 가치이시고 우리의 영생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며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참 신앙이요 그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마태복음 예수님의 말씀] 베드로의 부인과 예수님의 체포 사건(마 2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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