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느헤미야 4장 주일설교말씀] 느헤미야의 경계태세(느 4:16-23)

체데크 2022. 12. 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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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4장에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무장을 하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한 손에는 일을 했다. 이것은 방해하는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를 준비하는 것이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했다.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터지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방해꾼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느헤미야의 경계태세(느 4:16-23)

 

건축하는 자들은 이제 적들의 음모가 좌절되고 그들이 “돌아와 그들의 역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완전히 그들의 병기를 내려놓을 정도로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적들이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음모를 꾸미며 한 계획이 실패했을 때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우리 영혼의 적을 경계해야 하며 우리의 역사가 다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 싸움이 끝나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느헤미야는 공격을 받을 경우를 생각해서, 그 백성들을 무장시켰다. 그 방법을 살펴보자.

 

Ⅰ. 그 백성들의 절반이 일하고 있을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무장하고 자신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하는 자들을 위해서 지키게 했다. 그리하여 나팔 소리가 들리면 곧 일하던 사람들도 일을 즉시 중단하고 병기를 잡도록 했다(16절). 아마도 그들은 정해진 시간마다 일을 바꾸어함으로써 지루함을 방지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힘이 쇠한 담부하는 자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10절). 물론 그들이 병기를 잡고 있을 동안 편할 수는 있었지만, 결코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병기를 잡고 흙을 나르고 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한 손으로 일을 하며 다른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다고 했다(17절). 그런데 이것을 글자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은 두 손을 모두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들이 모두 동등하게 이 두 가지 일을 해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손에 싸울 병기를 잡고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 때마다 영혼의 적의 훼방을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과 대항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Ⅱ. 건축하는자들은 각자 칼을 차고 있었는데(18절), 이것은 일하는 데 지장 없이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할 때나 환난을 겪을 때에도 항상 쉽게 구할 수 있도록 손 가까이 그 말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Ⅲ. 적들이 그들을 당혹케 하기 위해 접근해 오는 것이 발견되면, 그것을 즉시 보고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느헤미야는 나팔 부는 자들을 항상 그의 곁에 두어 위험을 알릴 때, 제일 먼저 경종의 소리를 내도록 했다. 그 사업은 대규모의 일이었으므로, 건축하는 자들은 서로 흩어져서 일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벽 전체를 동시에 쌓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일을 감독하고 일하는 자들을 격려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적이 공격해 오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는 나팔소리로 모두에게 그것을 알리려 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시리라”는 큰 확신을 가지고 즉시 그에게로 모여야 했다(18, 20절).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일거리가 있는 곳에 흩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병사로서의 임무를 맡았을 때는, 필수적으로 엄격히 명령을 지켜 한 부대를 이루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건축을 위해 일하는 자도 이처럼 공동의 원수를 대항하여 한데 뭉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Ⅳ. 그 마을의 거민들에게는, 그들의 종과 함께 예루살렘 안에 거하면서, 아침에는 빨리 일하러 나올 수 있고 밤에 적이 공격해 올 경우 도울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22절). 성읍의 힘은 성벽보다는 그 주민들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안전케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어 정말 안전케 된다.

 

Ⅴ. 느헤미야 자신과 그의 백성들은 각자의 일에 매우 철저히 했다. 매일 해가 비칠 때뿐만 아니라 별이 빛날 때에도 창을 세워, 이것을 보는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21절). 이처럼 우리도 “밝을” 동안뿐만 아니라 “어두울” 때에도 우리 영혼의 적을 항상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 암흑의 권세자들”이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그의 일에 매우 열중하고 있었고, 또 그는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일에 전념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그 사업에 대한 열기가 가시지 않는 한, 그 자신이나 그의 수하인들은 결코 침대에서 편히 자는 일 없이 매일 밤 옷을 입은 채 잤다(23절). 그러나 이따금 세탁을 위해서나 의식법 상의 부정을 당하게 되었을 때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이 옷을 입고 벗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항상 봉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선한 사업은, 그것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이처럼 그 일에 전념할 때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가난한 자의 호소(느 5:1-5)

 

우리는 여기서 학대하는 자의 눈물을 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일은 솔로몬도 애통히 여기던 것이었다(전 4:1). 이제 그들이 느헤미야 앞에 엎드려 호소하는 것을 살펴보자. 느헤미야는 다스리는 자로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시 82:4)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운 시대와 냉혹한 마음은 가난한 자를 비참하게 만든다.

 

Ⅰ. 그들이 사는 시대는 매우 어려웠다. 당시 곡식의 기근이 있었는데(3절) 아마도 이것은 가뭄으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을 무시하고(학 1:9-11) 교회에 바칠 십일조를 내지 않은(말 3:9, 10) 그들에게 이러한 징벌을 내리셨다. 이처럼 어리석고 죄지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초래하고서 그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투덜거렸다. 물가가 뛰어오르고 물품이 적어 귀하게 될 때 가난한 자들이 그것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고 타격을 받게 됐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식물의 풍족함”을 내려 주신(겔 16:49)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여기에서 흉년이 든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욱 슬퍼한 자들은 자녀가 많은 사람이었다(2절). 가장 궁핍을 느낀 집은 가족이 많은 집이었다. 여기에 이처럼 많은 입이 있는데 식량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재산은 많으나 그것을 상속할 자녀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녀가 있으나 상속할 재산이 없는 자들도 있다. 이 둘을 다 지닌 자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또 이 모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만족히 여겨야 할 것이다. 큰 가족을 거느리고 있으나 거의 물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가족은 적으나 풍부한 물질을 지니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풍족함을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곡식이 귀했던 것과 비례하여 세금은 비쌌다. 왕에게 그런 세금을 바쳐야만 했던 것이다(4절). 그들이 포로 됨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이 바쳐야 하는 것은 인두세로써 자녀를 많이 가진 자들은 더욱 많은 세금을 바쳐야 했던 것 같다. 생활비가 많이 드는 집일수록 더욱 많은 세금을 바쳐야 한다니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욱이 그들은 곡식을 살 돈이나 세금을 바칠 것이 없어서 빌려 와야 했던 형편으로 보인다. 그들의 가족들은 가난하게 되어 바벨론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집을 짓느라고 많은 비용을 썼고, 아직도 능력이 생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부담이 가중되었다. 재력이나 권세가 있어서 실제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생계를 이끌어 나가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들 자신과 그 가족들을 부양할 수도 없는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

 

Ⅱ. 그들이 거래한 자들은 냉혹했다. 돈이 꼭 필요한 자들은 그것을 빌려야만 했다. 돈을 꾸어 주는 자들은 그들의 궁핍을 이용했고 매우 잔학했으며, 그들을 희생물로 이용했다.

 

1. 그들은 매달 백분지 일, 곧 연간 십이 퍼센트의 이윤을 받았다(11절). 만일 사람들이 장사를 하거나, 가축을 더 사들이거나 아니면 땅을 사기 위해 거액의 돈을 빌려간다면, 그들의 이윤을 빌려 준 사람이 나누어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 그들의 욕망을 채우거나, 그렇게 하여 탕진해 버린 것을 복구시키기 위해 돈을 빌린다면, 그들의 호화스러움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빌리고자 하며 우리가 그들을 도울 능력이 있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들이 필요한 것을 이자 없이 빌려주거나 혹은(만일 그들이 그것을 다시 갚을 것 같지 않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들을 무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2. 뿐만 아니라, 돈을 빌려 준 자들은 그들의 땅과 집을 돈에 대한 담보로써 강제로 몰수했고(3절), 게다가 그들의 이윤을 착취했다(5절, 11절을 대조해 보라). 그리하여 그들은 점차로 착취당한 자들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악행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3.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자녀를 종으로 부려먹거나 마음대로 팔아버렸다(5절). 이것이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으므로 그들은 이렇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자녀도 저희 자녀와 같아서 저희 자녀가 저희에게 귀한 것처럼 우리 자녀도 우리에게 귀하다. 우리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욥 31:15; 말 2:10) 똑같이 거룩한 백성이며 자유인 이스라엘 사람이며 같은 특권을 부여받았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이 할례의 거룩한 징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속자들을 저들의 종으로 삼았으니 우리는 그들을 속량 할 힘이 없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느헤미야에게 간언한 말이었다. 그들이 이런 간언을 한 것은 느헤미야가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 주려는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침해받은 불쌍한 자들이 “땅의 방패 되는 자들에게”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어디에 하겠는가? 법의 극한 성에서 구조되고자 하는 자들이 자비를 구할 곳은 법정의 심장부인 대법원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끝으로, 우리는 이 호소를 듣고서 그 사실 진술을 심문하는 불쌍한 자들의 불평이 항상 타당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의 태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우리는이 세상에서 고역에 시달려 신음하고 학대받는 자들에게 넓은 동정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을 그들의 영혼의 자리에 대치시키고 우리가 짊어진 짐같이 그들의 짐을 우리의 기도와 구제 속에서 기억해야 한다.

 

(2) 우리는 발로 짓밟고 있는 자들의 피와 눈물을 마시는 박해자들에 대해 의분을 지녀야 하며, 그들의 교만과 잔인성을 증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비를 보이지 않는 자들은 “자비 없는 심판”을 각오해야 한다. 이 압제자들은 그들이 최근에 속박의 집으로부터 구원되었으므로 마땅히 형제들에게도 “멍에의 줄을 끌러 주어야”(사 58:4)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가 더욱 무거워졌다.

[히브리어 성경 이사야 강해] 종말에 임할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예언(사 2:12-22)

 

[히브리어성경 이사야 강해] 종말에 임할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예언(사 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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