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히브리서 12장 강해 설교말씀] 거룩함을 이룰 것(히 12:1-29)

체데크 2022. 6. 25. 10:14
반응형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생자에게는 징계가 없지만 참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하나님은 징계를 하십니다. 우리에게 징계가 있다면 참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룩함을 이룰 것(히 12:1-29)

 

1-4, 믿음의 경주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 . . .

본문은 말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1, 2절에서 주동사는 경주하자이며 벗어버리고바라보자는 분사형태이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걸쳐 지금도 수없이 많은 증인들이 있는 일이다.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는 이 길은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달리기 경주자는 가벼운 복장을 하고 경기에 임한다. 신앙의 경주도 비슷하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가정에 대한 염려 등을 포함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거짓과 탐욕, 음란 등의 죄악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믿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또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의 경건생활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며 거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금욕주의는 잘못된 사상이지만, 절제와 인내는 좋은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즐거움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즐거움을 주셨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며, 그것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이지만(5:18; 9:9), 신앙생활에는 절제와 극기와 인내가 상당히 요구된다. 그래서 본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미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었다(10:36).

신앙생활은 달리기 경주와 같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신앙 경주를 격려하신다. 열심히 달려가는 자들은 좋은 상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달려가다가 중간에 피곤해지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경주를 완료해야 한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아르케곤)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텐)’라는 원어는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신 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온전케 하실 것이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예수님은 또한 친히 모범을 보이셨다.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킨다. 인간적으로 말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상급이었다. 주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또 그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받으신 부끄러움은 얼마나 많았는가. 그는 악인들에게 비난의 말들을 들으셨고 침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으며 벌거벗기워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다.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친히 이런 수치와 고난을 당하셨고 그것들을 끝까지 참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한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해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악 때문에 또 심지어 때로는 교회 안의 형제들의 흠과 결함 때문에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자기를 거역하는 죄인들의 악한 행위들을 참으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오히려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치 않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본문은 말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수께서는 당시의 악하고 위선적인 유대 지도자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정죄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려 죽으셨다. 예로부터 간혹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한 신실한 종들이 없지 않았다. 한국의 초대교회에도 순교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발걸음을 생각한다면, 아니 우리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 경주와 고난과 봉사와 인내라는 것은 보잘것없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신앙에 성실치 못하다면 환난의 날에 어떻게 할 것인가? 예레미야 12:5에 보면,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는 말씀이 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많은 증인들 앞에서 신앙의 경주를 성실히 경주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이 권면에 덧붙여서, 저자는 하나님의 감동 속에 몇 가지 도움의 말씀을 준다.

첫째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모든 무거운 것은 세상의 온갖 염려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잘하기 위해 의식주, , 건강, 가정 등에 대한 염려를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또 세상의 욕심들과 죄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신앙의 경주를 잘 할 수 있다.

둘째는, 인내하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몇 일 혹은 몇 년이 아니고 일생을 달려야 할 과정이다. 그런데 세상은 악하고 우리는 약하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는 우리를 시험하고 낙심시키는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우리는 때때로 피곤해지고 낙심하기 쉽다.

셋째는,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시다. 그는 또 친히 십자가를 참으시며 부끄러움을 무시하신 모범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이런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같이 부족하고 미천한 자들이 어찌 이 땅 위에서 기쁨과 평안과 영광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을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5-13, 하나님의 징계하심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 . . .

본문은 말한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징계하심이라는 원어(파이데이아)는 징계함을 포함하여 사람에 대한 전인격적 교육과 훈련을 나타낸다(6:4, ‘교양’; 딤후 3:16, ‘교육’).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해 성도는 경히 여기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하심과 징계하심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완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1:5)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하실 지 심히 두려울 뿐이다.

[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 . . .

본문은 말한다.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채찍질하심이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실 것이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증거이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들에 대해 성실히 징계한다. 그러므로 징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대우하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이다.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을 바른 교훈과 책망과 징계로 교육한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닌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 자녀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다.

[9-10]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에이타)[더욱이]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는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는 육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공경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공의롭게 징계하시는 하나님,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무엇인가? 육신의 부모는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카타 토 도쿤 아우토이스)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징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해서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생각하고 받으며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11-13]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축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다른 말로 의()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3:24). 그러나 교육과 훈련과 징계를 통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또 평안의 삶이다. 이와 같이, 성도는 징계를 통해 의롭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 모든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후에는 그것으로 단련을 받은 자들에게는 의의 평안한 열매를 맺게 한다. 성도의 생애는 거룩과 의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심신으로 연약해져서 손도 늘어지고 무릎도 연약해지고 다리도 절뚝인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징계가 참 성도의 표요 자신의 성화에 유익한 것임을 깨닫고 힘을 잃지 말고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며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받으신다는 표시요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증거이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자녀 곧 중생한 성도가 아니고 사생자일 것이다.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거룩과 의이다.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그것을 잘 받고 나면 우리의 인격과 삶은 좀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지는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낙심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잘 참고 일어나 더욱 힘을 내어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14-17,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 . .

본문은 말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성도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13:34). 지교회는 목사와 당회를 중심으로 화목하고 단합해야 한다. 성도간에 원수를 맺는 일은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이다. 로마서 12:18에서,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화평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화평을 원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해하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나 회개치 않는 자와는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16:17; 고후 6:14; 살후 3:6). 참된 사랑은 악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5-6). 범죄한 자는 세 단계를 거쳐 처리되어야 한다. 첫째는 단 둘이 만나 권면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는 것이고, 셋째는 교회에 말해 교회의 대표인 목사나 장로가 가서 권면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같이 여겨야 한다(18:15-17). 이 모든 말씀들이 다 성경에 밝히 계시된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성도를 사랑하고 그들과 더불어 화평해야 한다.

또 거룩함도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4:3, 7).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이미 달성되었다(고전 1:30; 10:10, 14). 그러나 이제 법적으로 완성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좇으라는 말은 우리의 성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성실한 노력이 요구됨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4:1,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는 화평과 거룩을 위해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것’(남성관계대명사)은 거룩함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만이 주를 볼 것이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5:8). 언제 볼 것인가? 천국에서 볼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을 뵈옵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15-17]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 . . .

본문은 말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람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셨지만, 그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은혜를 받은 표는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다. 그러나 그런 표가 없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쓴 뿌리이다. 쓴 뿌리는 이단사상이나 도덕적인 악을 조장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셋째는 음행하는 자이다. 음행 곧 성적 부도덕은 인간의 불결과 더러움의 대표적 죄악이다. 넷째는 망령된 자이다. ‘망령된 자라는 원어(베벨로스)속된 자, 불경건한 자라는 뜻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장자의 특권을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에서와 같은 자들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세상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아야 한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가 없이 남과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된다. 주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화목해야 한다. 또 우리는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화평과 거룩--이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곧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표를 가지지 않은 자가 없어야 하고, 교리적, 사상적, 도덕적 악을 품은 쓴 뿌리가 없어야 하고, 음행하는 자가 없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복 즉 천국과 영생의 복을 세상 것처럼 여기는 에서 같은 망령된 자가 없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교제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18-29, 말씀하시는 분을 거절하지 말라

[18-21]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 . . .

본문은 말한다. “[이는]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黑雲)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아님이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4절까지 이어지는 본문은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속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너희가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문은 시내산과 천국을 대조한다. 출애굽기 19:16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의 광경을 증거하기를, “3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었다.

[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 . . .

본문은 또 말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하여, 신약 성도들은 시내산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으로 나아간다. 시내산과 천국은 현저하게 대조된다. 시내산은 불과 구름과 어두움과 폭풍이 있는 두려운 곳이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율법을 선포하셨는데, 그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천국은 다음에 묘사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의와 영생과 평강이 있는 곳이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표현은 신약 성도들이 육신적으로 천국에 이미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영적으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4-6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했고, 골로새서 1: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하였다.

본문은 천국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천국은 시온산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지 않고,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의미한다고 본다(14:1).

둘째로,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히브리서 11:10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하나님께서 건축자이시요 만드신 이인, 터가 있는 성]을 말하였다. 또 히브리서 11: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을 가리킨다고 본다.

셋째로, 천국은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라고 표현된다. ‘천만이라는 원어(뮈리아스)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천국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넷째로, 천국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로 표현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 즉 중생한 자들이다(8:23; 1:18; 14:4).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들이며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을 자들이다(8:17, 29).

다섯째로, 천국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표현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내시는 곳이며, 하나님은 만인의 심판자이시다.

여섯째로, 천국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으로 표현된다. 예수님 믿어 구원얻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은 지금 다 천국에 들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중생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죽을 때 즉시 완전 성화하여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에 있는 의인들의 영들은 완전하여 죄성과 연약성이 조금도 없다.

일곱째로, 천국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아벨의 피는 단순히 무죄한 의인의 피이었지만, 예수님의 피는 더 나은 피, 곧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피이었다. 우리는 다 그의 속죄의 피 뿌림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

[25-27]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랄룬타)[(계속)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놀랍고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더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로, 목사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들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성실하게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게도 엄한 벌이 내려졌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 음성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엄한 벌이 내려지겠는가? 이전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실 것이다. 이것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를 영원히 있게 하시기 위해, 진동할 것들을 변화시키려 하심이다. 과연 신약성경은 하늘과 땅이 다 불타 없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말한다(벧후 3:10-13). 천국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이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지금 하늘에 간직된 기업이다(벧전 1:4).

[28-29]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 . . .

본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치 말고 그 말씀을 믿고 그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시는 구원의 은혜요 천국과 영생의 소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청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깊이 환영하고 그 앞에 절대적인 순종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경외함과 두려움으로](전통사본)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진지함, 진실함, 긴장감은 은혜를 받은 표시일 것이다. 그러나 해이함, 무관심, 뻔뻔스러움, 이중적임, 위선적임, 냉냉함, 무감격함, 무감각함 등은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표일 것이다. 우리는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에 대해 심판의 불로 소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18절부터 2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복음의 은혜를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엄위함 가운데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하늘의 예루살렘인 천국이다. 그것은 율법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구원의 은혜이다.

둘째로, 우리는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자.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징벌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주시는 복음을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셋째로, 우리는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과 같이 두려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도 안 된다.

[요한복음 성경공부] 실로암(Σιλωαμ) 뜻

 

[요한복음 성경공부] 실로암(Σιλωαμ) 뜻

요한복음 9장에서는 눈먼 맹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여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cdk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