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창세기 9장 주석성경말씀] 노아와 하나님과의 무지개 언약 사건(창 9:1-29)

체데크 2021. 10. 2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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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서 노아의 가족이 나왔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죽었고 노아의 가족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언약합니다.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무지개를 통해서 노아와 약속하셨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무지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심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무지개 언약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노아와 하나님과의 무지개 언약 사건(창 9:1-29)

 

1-7, 노아의 가족에게 복주심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복주시며 동일한 말씀을 하셨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은 좋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영육의 좋은 것이다. 정신적 평안과 육체적 건강과 물질적 여유와 사회적 평안이 다 복이다. 본문은 또 자손을 출산하고 자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 때에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복 주셨고 이제 홍수 심판 후에 노아와 그 가족을 복주신다. 그는 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복주실 것이다. 그 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그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와 도우심과 물질적 유여함을 포함하며 마침내 메시아를 통한 전 세계적 구원을 의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노아와 그 아들들이 많은 자녀를 출산하여 수적으로 많아지고 온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많은 자녀의 출산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며 그것들이 너희 손에 붙이웠다고 말씀하셨다. 본래 사람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 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그 동안 이 임무를 잘 수행했는지 모르나, 이제 다시 그 임무가 강조된다.

사람은 다른 생물과 본질이 다르다. 피조물들 중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생물을 섬겨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사람이 그것들을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상 사람은 무지하게 피조물을 조물주처럼 숭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것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신이라고 말하였다(32:5). 사람들은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벌레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1:23).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식물(食物)은 채소와 나무 열매이었다. 창세기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이후 사람에게 새와 물고기와 땅의 짐승과 기는 것 등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식물로 허락하셨다. 이제 육식(肉食)은 사람에게 정당한 일이 되었다.

물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구분되고 정결한 것만 먹도록 허락되었을 것이다. 또 후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죽은 것은 먹지 말도록 금지되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2:31,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 레위기 22:8,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이제 육식은 정당한 일이 되었으나, 이것은 명령이라기보다 허용이라고 본다. 아마 홍수 후에 사람들의 기력은 급격히 약해진 것 같다. 사람의 수명은 1000살에서 100살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 즉 사람의 기력의 쇠약해짐과 더 많은 영양분의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식을 허용하셨지만, 한가지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고기를 살아 있는 채로, 즉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단서를 두신 까닭은, 아마 짐승처럼 산 생명체를 그대로 먹는 것이 잔인한 행동이기 때문인 것 같고, 또 피가 생명이라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특히 피와 생명은 신비하게 연관되어 있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피는 곧 생명이다. 짐승의 생명도 피에 있고 사람의 생명도 피에 있다. 사람의 몸에는 약 5리터의 피가 있고 그것은 약 30초마다 심장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온 몸을 한 바퀴 돈 후에 심장으로 돌아간다. 피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피는 곧 생명이다.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지만 피는 먹지 말라는 것은 후에 모세의 율법에 명문화되었다. 레위기 3: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레위기 17:10-11,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자는 그것의 피를 다 뺀 후에 먹어야 했다.

그러나 구약의 이 법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고 본다. 피를 먹지 말라는 법은 의식법에 속할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들은 신약 아래서 다 폐지되었다. 골로새서 2:16-17,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람의 생명의 피를 찾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라는 말씀은 짐승이 잘못하여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출애굽기 21: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사람의 형제면이라는 말씀은 가인같이 형제가 그 형제를 죽였을 경우 마땅히 그가 그 죗값을 받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마땅히 그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살인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법이다.

이것은 개인적 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형벌 곧 정당한 재판에 의한 공적 사형 집행을 의미한다고 본다. 출애굽기 21:12,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살인자를 사형으로 응징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사람은 짐승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살인은 사람에게 죄를 짓는 악일 뿐 아니라, 그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큰 악이며, 따라서 그 악은 사형으로 응징되어야 한다.

물론, 후에 모세의 율법은 고의적이지 않고 우연히 부지중에, 실수로 저지른 살인의 경우 그 살인자가 죽음을 모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 자는 이스라엘 땅에 6개의 도피성들 중 하나로 피신하여 들어가 살 수 있었다. 민수기 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 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실수로, 부지중]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사형 제도는 오늘날에도 필요하고 정당한 법이라고 본다. 사형은 극악한 죄에 대한 공의의 징벌과 그와 유사한 범죄의 예방을 위해 또 사회의 정의와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라는 주의 말씀(5:39)은 개인적 보복을 금하신 것이며 사회적 형벌이나 사형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1절의 내용을 반복하시며 강조하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수정하시거나 취소하신 적이 없다. 과거에 인구 증가와 자원 문제를 고려하여 산아 제한을 주장한 것이나 오늘날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을 구실 삼아 임신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인간적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다산(多産)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이며 복이다.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또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것은 사람의 의무이며 선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나 경제 여건이 아주 어렵지 않다면 또 특별한 사명의 걸음이 아니라면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복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낳은 자녀를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바르게 키우고 양육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몫이다. 세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며 또 필수적인 일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키우는 일이다. 바른 인격이 되지 못하고 세상 지식만 갖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별 쓸모가 없으며 세상을 위해서도 큰 유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자녀를 많이 낳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이고 사람의 의무요 선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고의로 그 뜻을 저버리고 거스르고 있다. 우리는 자녀 출산을 짐스럽게 생각하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귀하고 복된 일로 깨닫고 감사히 받으며 자녀를 복되게 길러야 한다.

둘째로, 고기를 먹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소위 채식주의적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셋째로, 사람의 생명은 귀중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이나 남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생명을 해하는 행동은 큰 죄악이다. 돈 몇 푼 때문에 살인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살인은 사형으로 응징되어야 할 큰 죄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며 가꾸어야 한다.

8-17, 무지개 언약

[8-10]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언약을 세우셨다. 8-17절의 본문에 내가 . . . 세우리니혹은 내가 . . . 세운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11, 12, 17). 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표현하신다(9, 15).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과 또 그들과 함께한 모든 생물들, 즉 새들과 육축들과 땅의 짐승들, 즉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과 자연계 전체이었다.

언약(베리트)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었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었다(2:16-17). 또 그는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며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6:18). 또 그는 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 표로 할례를 명하셨다(17:7). 또 그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표로 안식일을 주셨다(20:12, 20). 이것이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옛 언약 곧 구약이다. 또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과 새 언약 곧 신약을 세우셨다. 새언약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며 세례는 그 표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자신을 낮추시며 스스로를 제한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사회의 계약과 달랐다. 인간 사회의 계약은 서로 간의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쌍방적 약속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 약속이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 즉 약속 있는 명령이었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세우신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 즉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5절에서도 그는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약속이었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자가 자동차 운전을 두려워하고 꺼려하듯이, 홍수 심판 후에 사람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비가 많이 오면 혹시 다시 홍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평안과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호의와 은혜이었다.

물론, 세계적 홍수 심판은 다시없을 것이나, 부분적, 지역적 홍수는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이나 가나안 땅의 완전한 진멸 같은 지역적 심판도 있을 것이다. 또 마지막 날 세상에는 불 심판도 있을 것이다(벧후 3:6-7).

그러나 상당한 평안이 오랫동안 온 땅에 지속될 것이다. 본문 12, 16절에서, 이 언약은 영세(永世)까지”(레도로 올람) 세우는 언약이며 영원한언약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8:21-22에서 암시되었었다: “. . .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12-14]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거 혹은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무지개라는 원어(케쉐트)(bow)’이라는 뜻이다. 무지개(rainbow)는 물방울로 만들어진 활 모양이다. 무지개는 언약의 증표로 주어졌다. ‘증거라는 원어(오트(sign), 증표(pledge)’라는 뜻이다. 17절도 무지개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증표임을 말한다. 증표는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함과 견고함을 나타낸다.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는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이라고 하셨다. 16절에도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무지개는 비가 온 후 아직 공중에 물방울이 많이 있을 때 햇빛이 물방울에 굴절되어 일곱 가지 색깔을 내는 신비로운 모양이다. 비가 개었어도 사람들이나 새들과 짐승들이 홍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만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주실 것이다. 줄과 화살이 없는 활 모양의 그 무지개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는 활이 아니고 위로를 주는 활이 될 것이다.

[15-16]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15절과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지개를 보실 때 그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시겠다는 뜻이다. 무지개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홍수 심판을 기억하고 두려움을 가질 것이지만, 비가 갠 후 하늘에 생기는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무지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제거하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줄 것이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감사하자. 사람은 부족투성이의 존재이며 세상도 그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생물들 속에 있을 홍수 심판의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그 대신 위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옛 세상에 무서운 홍수 심판을 시행하셨으나 그는 이제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이다. 무지개 언약은 마지막 심판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자연 세계의 안전 보장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이다. 우리는 그 자비와 긍휼을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약하시고 언약의 증표를 주셨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내용을 확증하는 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믿을 만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특히 그의 약속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그는 신약교회의 성도에게 주신 약속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1:2).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요일 5:13). 하나님의 뜻은 택한 백성의 부활과 영생이다(6:39-40). 그는 우리에게 하신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자.

셋째로, 그러나 비록 더 이상 홍수 심판은 없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남아 있다. 그것은 불 심판이다(벧후 3: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마지막 지옥 불 심판이 경고되어 있다. 불의한 자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고전 6:9-10).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인은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21:8).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다 버리고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하며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18-29, 노아의 축복과 저주

[18-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온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나왔다. 인류는 본래 한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 가족같이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마땅하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고 표현된다. 22절에도 함을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고 말한다. 25절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는 노아의 말과, 26절과 27절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고 또 야벳의 종이 되리라는 말을 기록한다. 또 창세기 10:15-20은 함이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등 네 아들을 낳았고 또 가나안은 북쪽 시돈에서부터 남쪽 가사까지 흩어져 살았던 가나안 자손의 아버지라고 좀 더 자세하게 증거한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고 반복해 표현하고 또 가나안에 대한 예언을 반복해 기록한 것은 장차 그들이 들어가 얻을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 누구의 자손이며 그들이 왜 저주를 받아 진멸(殄滅)되어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후에 그 땅의 거주민들이 매우 우상숭배적이고 음란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웠다(18:3, 25; 7:1-5).

창세기에는 가나안 땅에 대한 언급이 32번이나 나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고(11:3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12:5).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고(12:6), 그는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13:12; 16:3). 후에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고(31:18; 33:18; 35:6; 37:1), 마침내 가나안 땅에 묻혔다(50:5, 1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다.

[20-21]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는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었다.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원어는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노아는 포도 수확을 하였고 포도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의 큰 실수이었다.

성경에서 포도주가 기쁨의 음료수로 여겨지기도 하지만(14:26; 104:15), 술 취하는 죄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로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다(고전 6:10; 5:21). 술 취함은 사람으로 올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고 범죄케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했고(5:18), “그것을 보지도 말라”고 했다(23:31).

노아의 실수는 인간의 본성의 부패성과 연약을 잘 드러낸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했지만(6:9) 엄격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노아도 실수가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어느 정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경건한 노아의 실수는 우리 모두에게 금주(禁酒)의 교훈이 된다. 더욱이 오늘날의 술은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 금주(禁酒)의 좋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좋다.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하체라는 원어(에르와)벌거벗음 혹은 음부(陰部)’라는 뜻이다. 함의 잘못은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말았어야 했고 즉시 얼굴을 돌리고 옷 같은 것으로 그것을 가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부끄러운 장면을 형제들에게 말하기까지 하였다.

오늘 시대는 지나친 노출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시대이다. 성인 영화나 비디오, 인터넷 음란물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다. 부부 관계나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밀한 것이며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는 부끄러운 시대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시대이다. 오늘 시대가 그러하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달랐다. 그들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셈과 야벳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이 있었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식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올바른 태도이었다.

[24-25]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술이 깬 노아는 그 작은 아들 곧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가장 낮은 종이라는 표현이다. 26절과 27절에서 노아는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고 또 야벳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하였다.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던 함은 저주받을 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고(20:12)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셨다(19:3). 또 신명기 27:1에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씀하였다.

함의 아들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함에 대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이었다. 부모와 자녀는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20:5). 복된 부모의 자녀는 복되지만, 저주받는 부모의 자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가 범죄하면 그 자녀들에게 화가 미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조심해야 한다.

또한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실제적으로도 가나안 족속들은 심히 음란하고 우상숭배적이었다(18:24-25; 7:1-2). 저주는 의인들에게 임하지 않고 악인들에게 임한다. 노아의 저주는 예언적이었고 공의롭게 성취되었다.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다른 한편, 노아는 셈을 축복하였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복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께서만 인간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셈과 함께하시니 셈은 복을 받은 자이다. 과연 셈족은 참 종교의 전파자가 될 것이다. 참 종교는 셈족에서 발견될 것이다. 참된 경건은 셈족을 통해 전달된 유산이었다. 하나님의 복은 셈족을 통해 이어져 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셈족이었고 그 족속을 통해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9:5).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야벳도 축복하였다. 그에게는 창대케 되는 복이 선언되었다. 이것은 특히 문화적, 경제적 번창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야벳 족속은 서구 문명을 건립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번창하는 복을 받았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야벳 족속이 셈의 종교적 복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야벳의 자손들인 유럽인들은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들은 셈의 장막, 곧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 들어왔다.

[28-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세에 죽었더라.

노아는 아담 후 천년경에 출생하여 이천년경에 죽었다. 그는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노아와 128년이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초기 역사가 경건한 아브라함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술 취하지 말자. 술 취함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며 의인 노아에게라도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게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천국 길을 가로막는 큰 죄악이다.

둘째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자. 비록 그들이 실수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실수를 쉽게 남에게 전하지 말고 은밀하게 덮어드리는 자가 되자. 그런 자녀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에 대한 염치를 가지자. 우리는 노출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거룩함과 정절,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가지자. 그것이 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넷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들을 축복하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셈의 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셈의 복을 얻었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우리의 자녀들도 이 복을 누리도록 기도하고 축복하고 권면하며 본을 보이자.

[사도행전 1장 헬라어 원어강해] 가룟유다 대신 뽑힌 맛디아(행 1: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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