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11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나사로의 병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베다니에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어 주님께 붓던 여인입니다. 그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에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자신의 오빠 나사로가 병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말합니다. 나사로의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나사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한 영광의 병에 걸려서 죽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던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병도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나사로 병(요 11:1-6)
1절 엔 데 티스 아스데논 라자로스 아포 베다니아스 에크 테스 코메스 마리아스 카이 마르다스 테스 아델페스 아우테스
요 11: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 "병든 자"란 말이 이 기사(記事)의 초두에 나오게 됨은, 나사로란 사람보다 그의 질병이 여기서 화젯거리이기 때문이다(Godet). "나사로"란 이름은 "엘르아살"이란 이름의 단축형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절기에 참석하러 오실 때면 묵곤 하시던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았다. 본문에서는 베다니를 "마리아와 마르다의 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것은 벳새다를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리"라고 칭한 것과 같은 것이다(1:44). 어떤 이들은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 읍의 소유자들이었고 그 남은 이들은 그들의 소작인들이었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여기에 나사로라 불리는 한 형제가 있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아마 "엘르아살"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의 접두사가 생략되고 거기에 희랍어 접미사가 붙어서 나사로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외로운 자는 죽은 후 즉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축복을 받는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었다. 거기서 주님은 그 비유의 등장인물을 나사로(물론 이것은 실제 인물인 나사로가 아니라 가상 인물이었다)로 칭하셨는데 아마도 본장에서 같은 기적이 나사로에게 있을 것을 예상하시어 그가 그렇게 칭하신 것으로 보여진다(눅 16:22).
여기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등장한다. 그들은 주로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였던 것 같다. 한편 나사로는 생활 전선에서는 물러나 연구와 명상에 몰두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아름답고 행복하며 조화가 이루어진 한 가족을 보게 된다. 이 가족과 예수 그리스도는 무척 친하게 지내셨다(본문에 나타나는 바에 의한다면). 그들 중에 결혼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남매들끼리 마음을 합하여 살면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2절 엔 데 마리아 헤 알레입사사 톤 퀴리온 뮈로 카이 에크막사사 투스 포다스 아우투 타이스 드릭신 아우테스 헤스 호 아델포스 라자로스 에스데네이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 이 마리아는 눅 7:37-50에 관설된 여자와 동일시될 사람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경건한 행위와 사랑이 어떻게 큰 사실을 기억한다.
자매 중의 하나는 "주께 향유를 붓던 마리아"라고 특별히 묘사되고 있다(2절). 어떤 이들은 그녀는 우리가 누가복음 7장 37.38절에서 읽은 여인과 동일 인물로 그녀는 죄인이었고 나쁜 여자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이 누가복음 7장 37절의 기사를 언급한 것이 아니고 본서 12장 3절의 기사를 언급한 것으로 본다(12장 3절을 보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서 기자들은 다른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기사를 결코 인용하는 법이 없으며 요한은 한 곳에서 자신의 기록한 기사를 다른 곳에서 흔히 참조를 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일념에서 나온 특별히 경건스러운 봉헌의 행위들은 그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다(마 26:13). 그런데 바로 그녀의 형제 나사로가 병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플 때 우리는 같이 아픔을 느낀다. 우리가 친구들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빈번하게 우리들은 이와 같은 동정에 의한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또 그들이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만큼 그들의 아픔을 통해 전달되는 고통도 큰 것이다. 친구가 많으면 그들을 통하여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위로가 증가되는 반면 그들에 대한 근심과 고통도 늘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3절 아페스테일란 운 하이 아델포이 프로스 아우톤 레구사이 퀴리에 이데 혼 필레이스 아스데네이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병들었나이다"라고만 말하고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청원에 있어서 고상한 성격을 드러낸다(Bengel). 이것은 짧은 기도이다. 우리는 길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짧게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근심거리를 주님에게 고하면 주님은 그것을 들어주신다. 특별히 그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기뻐하신다.
나사로가 아프다는 기별이 우리의 주 예수께 전하여졌다(3절). 그의 자매들은 예수께서 요르단 건너 큰길에 계시는 것을 알고 일부러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가족의 재난을 예수께 알려 드렸다. 이 사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들의 형제에 대해 가졌던 애정과 관심. 그의 재산이 그가 죽은 후면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의 생명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겼다. 또 그것은 형제들 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자세였다. 이제 그가 병이 들자 그들의 깊은 사랑이 표현되었다. 형제의 진가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나타난다. 자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친구들이 기뻐할 때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그들이 울 때 그들과 함께 같이 울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주 예수께 품었던 존경. 그들은 그에게 그들의 모든 생활을 의논하고는 하였었다. 그리고 입다와 같이 그들의 모든 소원을 예수께 아뢰고는 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원하는 바와 비탄과 걱정들을 아시지만 그는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직접 그에게 아뢰기를 원하신다. 또한 우리가 그에게 모든 사정을 아뢰는 것을 통하여 그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들이 전한 소식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간청"의 뜻을 담은 것이 아니었고 다소라도 명령적이거나 더군다나 예수의 오실 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간절하게 그들이 처한 정황을 아뢰었을 뿐이었다. 즉 그들은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그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힘입으므로써인 것이다. 그들은 "주여 보소서, 당신을 사랑하는 그"를이라 하지 않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그"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요구되는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이기 때문이다"(요일 4:10). 우리의 그이에 대한 사랑은 말로 표현할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 못되나 그이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큰 것이다.
4절 아쿠사스 데 호 이에수스 에이펜 아후테 헤 아스데네이아 우크 에스틴 프로스 다나톤 알르 휘페르 테스 독세스 투 데우 히나 독사스데 호 휘오스 투 데우 디 아우테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 있다.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병은 죽을병이었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사로가 나흘간 죽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사로에게 병이 주어진 것은 그를 죽게 하는데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병은 대부분의 중병처럼 나사로를 무덤으로 집어넣기 위한 병은 아니었다. 이 병에는 그 이상의 뜻이 들어 있었다. 또는 그 병이 나사로의 생명을 앗아가는 데 있었다 해도 그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은 이러한 병의 의도를 물리쳤다.
이 병은 그의 죽음으로써 끝날 사건은 아니었다. 그는 죽었다.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 - 즉 영구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행위를 가리켜 이미 끝난 것처럼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의 영원한 작별 인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그리고 이 의미에서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사로의 지금의 무덤은 그의 "영원한 집" 또는 "영원한 쉴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살리시려는 한 여자아이를 가리켜 "그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주의 백성이 겪는 질병은 그것이 아무리 중병이라고 하더라도 "죽을병"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병도 우리를 "영원히 죽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육체의 죽음은 다른 세상에서의 영혼의 탄생을 의미한다. 우리들이나 우리의 친구들이 병들었을 때 우리는 한결같이 그가 곧 나을 것이라는 말로 위로를 한다. 그러나 나으리라는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기초 위에 우리가 서는 것이 지혜 있는 태도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아무리 최악의 사태가 닥친다고 하여도 "두 번째의 죽음"(영혼의 죽음)은 그들이 겪지 않을 것이요, 그렇다면 첫 번째 죽음이야 가볍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즉 그 기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그들에게 은혜로 보여 주시기 위한 기회로 삼고자 하셔서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감미로운 은혜와 가장 커다란 감격은 고난을 당한 사람들만이 그 맛을 아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를 삼아야 한다. 즉 어떠한 고난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영이나 실패나 손해도 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면 우리들은 만족히 여겨야 한다(레 10:3).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병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 받기 위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 병은 주님에게 "사망으로부터 나사로를 소생시키는"영광스러운 기적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시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하시었었다(9:3). 마찬가지로 나사로도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님으로 영광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병이 들고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온갖 시련을 겪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위로를 받아야만 한다. 즉,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을 도우시고 또 안위하심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이 영광 중에 나타나게 하고자 하시어 먼저 고난을 그들에게 부여하시는 것이다.
5절 에가파 데 호 이에수스 텐 마르단 카이 텐 아델펜 아우테스 카이 톤 라자론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이었다(4절).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동기가 여기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은 나사로와 그 형제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특수한 이적을 행하시게 되었다.
6절 호스 운 에쿠센 호티 아스데네이 토테 멘 에메이넨 엔 호 엔 토포 뒤오 헤메라스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의 위급한 사태를 아시고도 천천히 그들을 방문 코저 하신 이유는, (1) 그 사태의 수습이 오직 자기에게 달린 까닭, (2) 천천히 시간을 잡는 것이 오히려 그 당사자들에게 유익한 까닭.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 그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도록 준비된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천히 오심을 사랑을 베푸시기 위한 지체이다.
[신명기 6장 성경 좋은 말씀]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신 6: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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