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내용을 가지고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하는 땅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명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있다.
♣목적: 하나님은 선택받은 백성인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있다.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심판하시고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을 통해서 다시 사람을 번성하게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이 지난 100년 후에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만과 교만과 오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으며 우상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함의 후손들이 장악하여 우상을 섬기는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데라와 아브라함에게 감동을 주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나오려고 아브라함과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창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롯과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출발하여 하란에 머무르게 됩니다.
‘우르’ (אור우르 218) 우르이며 이 단어는 (אור오르 215) 밝다, 빛나다, 영화롭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상업,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된 도시로서 우상숭배의 근원지이며 난나라는 달 신을 섬겼던 곳입니다. 그래서 바벨탑 꼭대기에는 달을 숭배하던 신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빛이 나오던 장소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던 빛이 나와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의 욕심에 끌려 살아가던 장소가 우르입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건져내시고 있습니다. 데라를 통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들도 우르와 같은 장소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빛은 사라지고 세상의 타락한 빛으로 자신들만 영화롭게 하면서 세상에서 율법의 의만 비추고 살아가던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로 나오게 하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화롭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의 복음의 빛이 나올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도 우르에서 계속해서 있었다면 결국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고 타락한 삶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자리에서 건져내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도 더럽고 추악한 원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란’ (חרן하란 2771) 하란이며 이 단어는 (חרר하라르 2787) 말라버리다, 건조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란이라는 도시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서 상업의 요충지이며 부유하던 장소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갈대아 우르처럼 달 신을 섬기던 장소였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하란은 어떠한 곳입니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이곳은 육적으로 먹을 양식이 풍족하고 먹기 살기에 너무나 좋은 도시입니다. 골치 아프게 가나안 땅까지 갈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하란은 바로 이 세상의 풍족한 것 때문에 가로막혀 천국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육적인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이 완전히 말라버리고 건조해져 곤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풍요에 빠져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천국이 흐릿하게 보여 잊어버리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는 하란 땅에 와서 가나안 땅을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란의 풍요함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거류하였으며’ (ישב야샤브 3427) 거주하다, 좌정하다, 앉히다, 라는 뜻입니다. 데라가 집안의 족장이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하란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란에 들어와 보니 육적으로 살기가 너무나 좋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라는 가나안 땅을 잊어버리고 하란 땅에 완전하게 좌정하여 거주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들도 이곳에서 눌러앉아 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 땅에 즉시로 들어와 살다 보니 육적인 편안함에 만족을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나그네의 삶을 청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란 땅에 눌러앉아서 자신의 아들들과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데라는 영적인 하나님의 땅을 보지 못하고 육적인 편안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잠시 왔다가는 장소입니다.
하란 땅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하나의 관문입니다. 정착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데라는 하란이 정착지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구원을 받았다면 이 땅이 정착지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정착지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의 생활에 정신을 못 차리고 육신의 편안함만 도모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바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리로다, 라는 단어가 (ישב야샤브)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 땅에 미련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떠날 때에는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란에 도착해보니 나그네의 삶이 힘들고 지쳐서 하란 땅에 정착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데라’ (תרח테라흐 8646) 데라이며 지연과 여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로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연시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민족을 만들어내는 것이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하란 땅에 머무르면서 정착하여 아브라함도 가지 못하도록 지연시키며 하란 땅에서는 육적으로 정착의 삶을 살지만 영적으로는 여행의 삶을 살게 만들고 자신도 그와 같이 살아가는 인물이 데라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게 됩니다. 데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데라와 같이 이 땅에 정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데라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지연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데라에게 붙잡혀 있던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에는 쉽게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살아계신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불효 중에 불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탕자의 비유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보고 빨리 죽으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떠날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육적인 아버지냐! 아니면 영적인 아버지냐를 고민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창11: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는 아브람을 낳을 때의 나이가 70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던 나이가 75세입니다. 그러면 데라는 아브라함이 떠날 때의 나이가 145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그리고 데라는 나이가 205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데라를 떠나고 나서 6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버지인 데라를 버리고 하란을 떠났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불효 중에 불효를 저질렀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은 다음에 하란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7:3-4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 집사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일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서 거주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현재 데라는 살아있었고 살아있는 중에 아브라함이 떠났는데 스데반 집사는 데라가 죽고 나서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이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떠났다고 정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죽으매’ (αποθνησκω아포드네스코 599) 죽다, 죽음에 직면하다, 라는 뜻입니다. 데라는 하란 땅에서 죽음에 직면하여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라는 가나안 땅을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죽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홀가분하게 떠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의 장소에서 이미 죽었고 데라가 죽어야 만이 아브라함의 마음이 편안하게 가나안 땅으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사람이 죽었다고 했을 때도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영적인 것에도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바울은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노라는 단어가 (αποθνησκω아포드네스코)입니다. 그럼 영적으로 자신의 죄를 매일같이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모든 죄를 매일같이 죽이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라가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육신은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지체하기를 원했습니다. 여행하면서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육신에 빠져 살다 보면 이렇게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버지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현재 나에게는 데라는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가려고 하는데 나를 지체시키고 지연시키면서 발목을 잡고 있는 데라는 무엇입니까? 이 데라를 끊어야 만이 홀가분하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데라를 확실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으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이곳을 떠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어머니와 형제가 찾아와서 말하려고 할 때에 누가 형제며 자매며 부모냐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며 자매며 부모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자매에게 이제부터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이 구원을 받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천국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데라가 무엇인지를 인지하시고 빨리 끊어내야 합니다. 내 주변에 데라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끊고 주님이 허락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데라와 같이 하란 땅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새로운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 들어가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데라와 같은 문제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큰 비전이 있습니다. 이 비전을 바라보면서 힘들고 척박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따라나서면 주님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라에 발목 잡혀 출발하지 못하고 있다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고민하고 있었지만 데라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의 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의 땅으로 들어가시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랄 설교] “그랄의 은혜”(창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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