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십자가 복음 설교말씀 중에서 복음에 나타난 의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전해 주신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에 나타난 의”란 제목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의롭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의는 우리가 의롭게 산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나옵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내가 지키고 싶으면 지키고 지킬 마음이 없으면 안 지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지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뱀이 어느 날 하와에게 다가와 꼬시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저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과 같아 질 것이다. 이런 유혹을 뱀에게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항상 여러분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귀를 빌려주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결국 뱀에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듣다가 보니까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요,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생각하고 지키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임할 때에는 절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에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선악과를 뱀의 꼬임에 빠져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혼자 죄를 지을 수가 없어서 아담에게도 따먹으라고 꼬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으면 자기 스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꼭 다른 사람에게 전가를 해서 그 사람도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람의 죄의 습성인 것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담도 하와의 말을 듣고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생각에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정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욕심으로 우리는 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아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을 거역하고 주인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최초의 죄를 짓게 되고 그것으로 온 인류가 죄를 짓게 되는 원죄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인간이 선하다 하더라도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선한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선 한자는 한 명도 없나니 오직 하나님 외에는 선하신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선하다 생각하는 것은 교만인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교만으로 말미암아 망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교만해 지면 결국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장을 보면 인간이 패역 해져서 자기 스스로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 바벨탑을 쌓아서 인간들 스스로 뭉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음과 언어가 같으니까 서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에 퍼져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것인데 사람들은 모여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바벨탑을 쌓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거역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언어를 혼란하게 하시고 모든 민족을 각각 흩어지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교만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낮아지라 말씀하십니다. 항상 초대를 받아도 말석에 앉고 상석에 앉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주인이 와서 당신 왜 상석에 앉아 있냐 하면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쫓겨나고 말석에서 앉게 됩니다. 그러나 말석에 앉아있으면 주인이 와서 당신이 왜 말석에 앉아있습니까? 상석으로 올라앉으세요 하고 그를 상석으로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는 사람은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낮아지려는 사람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올라가는 것은 교만입니다. 주님이 높여 주셔야 됩니다. 주님이 높여 주시지도 않는데 인간이 어떻게 높아질 수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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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면서 처세술을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고 말해도 하나님이 주님이 우리에게 의롭지 않다 말씀하시면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칭하시는 것도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요 1:12-1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혈통이나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사탄의 권세에 앞잡이가 되어 죄의 왕 노릇 할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에게 이제는 죄에서 자유 함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진리를 알아서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매이고 죄에서 매인 것들이 진리를 알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 진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우리는 자유 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이렇게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잘 알아야 진리 안에서 자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진리 안에서 자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지식이 출중하고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뛰어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몸소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의롭게 되지 않고 죄 사함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 것이며 또 그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날 때에 여러분의 인생은 변화가 있습니다. 죄악 된 우리는 스스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 든 것을 가지고 나에게 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멍에는 너무나 무겁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너는 나에게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물들어 있지만 주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시고 깨끗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의롭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패망이요 주님의 생각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주님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세에도 믿음을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 안에서 끝까지 견뎌야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을 가진다 해도 주님이 나에게 없으면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소망이요, 희망이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막 8:35-38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예수님을 위해서 바쳐도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그 인생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 그 목숨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위해 나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나타내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부름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전심으로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자기의 목숨을 아꼈다면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환난과 핍박과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열심히 하면 저 하늘에서 받을 상급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 집사는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돌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는 상황에서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주님을 믿고 나가면 우리는 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천국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갈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절대 구원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지 말고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썩어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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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우리는 오직 양의 문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양의 문은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양들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자도 양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도적이요,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통해서만 가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써보낸 서신입니다. 이 본문의 로마서는 신약성서의 중심부요, 순수한 복음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 구약은 밭과 같고 신약은 그 밭에 서 있는 나무 같다면, 로마서는 그 나무의 원줄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신약성서에서 조직되는 것입니다. 이 신약성서가 근거하는 것이 구약성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는 신약이면서도 구약과 신약의 교량적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그 본질을 구현한 것은 신약의 서신, 그 중에서도 바울의 서신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바울 서신의 대표작인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습니다.
본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신구약에 일관해 있는 대 주제인 것입니다. 본서는 이 대 주제를 선포함에 있어 조용한 논문적이며 교육적인 체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논쟁적인 갈라디아서나 고린도후서, 목회적인 데살로니가 전, 후서나, 목회서신, 위안 적인 빌립보서 등에 비할 때 한층 이 서신의 권위를 더하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본서의 주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서론을 끝마치는 부분에서 또한 본론의 다리로서 바울은 본서의 대 강령을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절까지 거론된 복음을 받아 이 복음의 내용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의로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주제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주제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복음, 믿음, 구원, 능력, 하나님의 의 등 신약성경의 기본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기본어들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신약성서를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를 바로 이해하는 길일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라는 말씀은 사 26:16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사 49:23“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서 나오는 말씀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치 못하는 것이요,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 자체에 섬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며 믿지 못하는 처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밟힐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결국 세상의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증거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복음에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리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 나의 힘으로 된다면 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오직 성령을 구하고 성령의 힘으로 하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능력이 많습니다. 그런 주님을 믿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높여드리는데 힘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인은 그리스도인들을 신기하고 유해한 미신에 열중한 무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권력을 자랑하였고, 헬라인은 문화를 자랑하였고, 유대인은 종교적 우월성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런 인간적 자랑들이 뒤섞이고, 또 거기에 도취해 있던 대 로마를 향해 바울은 “목수의 아들로 지냈으며 유대 땅에서 가난한 여인의 집에서 자라났으며 그리고 강도들과 함께 죄수처럼 죽은 이를 전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적 감정과 자랑의 허무성과 추악상을 달관하고, 복음의 초인간적인 긍지와 능력을 체득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바울 정도의 학식이면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만합니다. 말하자면 나무에 매달린 자의 복음이요, 그 내용으로 말하면 너무 평범한 것이라서 학자들 모두 천박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요 가는 곳곳마다 반대를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을 본받아 내가 아무리 지식과 명예와 학식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믿는 자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육의 눈에는 제아무리 천박해 보이고 추태롭게 보여도 바울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며 구원이 우리에게 양도되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위대한 승낙입니다.
그러나 (1)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능력이 없이는 복음은 한갓 사문에 불과하고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데 있어 말씀에 능력이 동반되었듯이 복음의 계시는 곧 “여호와의 팔”의 계시입니다.
(2)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우리를 복음의 구원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요 그밖에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잘 처방된 약이라도 환자가 먹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맨 먼저 대접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나 사도들의 경우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너희에게 먼저”였으나 그들의 거절로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한 입장에 서 있으니 곧 양자가 동일하게 구원자 없이 비참한 상태인가 하면, 양자 모두가 동일하게 구원자에게 언제고 환영받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선민으로 자처하면서 이방 세계를 멸시해 오던 유대인에게는 뜻밖의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대망의 메시아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복음은 능력이요, 복음의 요구는 믿음이요, 그리고 복음의 결과는 구원인 것입니다. 능력은 원래 자연적 힘을 표시하였으나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격적 힘이요, 초인간적인 능력이요, 하나님의 힘 자체입니다. 이 낱말은 다이너마이트로 번역되어 폭발하는 힘을 표시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나타난 능력은 영원에서 영원에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획기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지 못한 것, 귀로 듣지 못한 것, 또한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헬라인은 배우는 것을 힘으로 생각하였고 로마인은 무력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 믿음은 복음의 조건이요 요구입니다. 믿음이란 지적으로는 하나님의 인격과 역사를 시인하며 정적으로는 자아의 죄성을 시인하며, 의지적으로는 하나님께 자아를 의탁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결국 그것은 성화된 자아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인간과 하나님, 역사와 초 역사, 제한과 무제한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율법 준행이나, 이방인의 불 가지의 신 경배와는 전연 다릅니다. “믿는 자”란 그대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의 별명이었으니 과연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대 강령입니다.
바울은 대 강령을 본서에서 선포한 것입니다. 이 믿음에는 인종과 언어와 기타 어떤 인간적 간격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본적 사상은 육적 환난에서 구출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는 원래 개인적인 육적 재해에서의 해방을 가리켰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전 민족의 구출 또는 해방을 뜻했습니다. 가령 애굽에서의 구출,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 등입니다. 그것은 다시 계시 문학에 있어 미래에 오실 메시아에 의한 완전한 해방을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 현재는 믿음으로 죄에서의 해방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종말적인 심판에서의 구원이며 신자에 있어서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은 불가분의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전자는 영적이요, 후자는 육적으로 현재에 있어 영적 구원을 받은 자만이 또한 미래의 종말적인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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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에서 헬라인은 이방인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이는 복음의 능력이 미치는 순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원래 유대인에 의해 예언되었고, 또한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의 첫 참여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유대인들을 통하여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이 순서와 관계에 예리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첫째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었으나 그들의 거부로 인해 이방에 미치게 된 것이고 또다시 이방인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도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 구절은 루터를 몰아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가 로마의 법왕청에서 빌라도의 층 대에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홀연히 본 구절이 그의 머리를 밝게 하였을 때 그 고행을 중지하고 내려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때에 나는 다시 탄생하였고 열린 문을 통하여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 즉 인간 본성적인 의나 율법을 행하는 의에 상대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의란 이스라엘을 적에서 구원하심에서 나타났으며 신약에서는 복음에 나타난 구원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본성으로서의 의인지 그 본성이 구원에서 나타난 것인지 또는 두 가지를 다 말하는 것인지 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이 구원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곧 바울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의 비참과 멸망은 우리 죄악의 소득이요 결과인 만큼 우리가 구원의 길을 모색하려면 칭의의 길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복음이 바로 이 일을 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만이 의의 길을 터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이요 우리는 죄 많은 죄인인 만큼 그분 앞에 나서려면 우리가 걸치고 나타날 수 있는 의가 있어야 마땅한데 이 의가 왕 되신 메시아에게서 드러나고 복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이 “의”는 우리의 죄악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화해와 영접의 은혜로운 방편입니다. 이 복음의 의를 가리켜 하나님의 의라고 부릅니다. 곧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인준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서 연유하는 온갖 의에 대한 구실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대속에서 오는 하나님 되시는 그리스도의 의, 바로 그것뿐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구절인데 먼저 본문의 구조를 처음 믿음을 하나님의 의에 관련시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또는 나타나서와 관련시켜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나타나서”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곧 계시는 하나님의 성실로부터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타락 이전의 아담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과 교통으로부터 중보자에게 의지하는 믿음과 이에 따르는 하나님과의 교통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의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첫 번 믿음으로부터 다음에 계속해서 거기에 의존해 살며 머무는 나중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바로 세례문답 강령에도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믿음으로부터 우리의 원 둥치가 되는 그에게서 우리의 공로를 취하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의미가 다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라는 말에는 우리를 의롭게 지탱하는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은 하박국의 인용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불의가 강성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이스라엘이 범죄 하매 더 악한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심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할 때에 받은 계시입니다. 육 적인 고난이 과중해질 때 의인의 마음은 믿음에 기울이게 되고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원하셔서 불의의 강성을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구약의 어두운 율법 시대에서 하박국은 믿음의 봉화를 높이 들었고, 그것이 신약에 와서 바울에 의해 계승되어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가 되었으며 또다시 그것이 루터에 의해 갱생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대 강령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의 시작이나 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또 반대로 믿음에서 행위로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믿음으로 의로운 상태에 놓이고 행위로 말미암아 그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처럼 말입니다. 철두철미하게 “영광으로부터 영광에 이르듯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믿음이요. 계속 나아가는 믿음이요, 인내하는 믿음이니 이 믿음은 전진하여 나아가는 가운데 불 신앙의 뿌리를 잠식해 버리고 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새롭고 신기한 이론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신약에 종종 인용되는 유명한 구약 성구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입은 인간은 이 믿음을 통해 은혜와 영광의 생활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조망대 위에 올라가 특별한 계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계시는 외관상 지연되는 것 같지만 때가 차면 약속된 메시아가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묵시”로 불리고 있지만 다른 데서는 “약속”으로 불립니다.. 또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장래에도 “의인은 믿음에 의해서 살 것이다” 믿음에 이르는 복음의 의가 바로 이것이니 곧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믿음으로부터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믿음에 이르는 의인 것입니다.
이 주제의 증명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의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어느 쪽도 떳떳이 내세울 자신들의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칭의는 믿음이 아니면 행위를 통해서 라야 하는데 바울은 그것이 행위로는 불가능한 이유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행위를 들어가며 설명한 뒤에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롬 3:20-25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 사람이 의롭게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우리에게 피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서 속박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사람이나 막론하고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유능한 외과의사가 상처를 싸매기 전에 환부를 샅샅이 뒤지듯이 먼저 죄와 진노 문제를 확신시켜 놓은 다음에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복음은 더욱 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어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있습니다. 자연의 빛과 율법의 빛 모두가 죄에서부터 죄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들어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를 들어내 보여 주는 것은 우리에게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 악성 묘사는 이것을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큼직한 두 가지로 간추리고 있으니 곧 첫째는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경건과 둘째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의입니다. 이 죄 악성의 근원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데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존재와 선악 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었습니다. 곧 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레 악행을 저질렀다는 얘기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포로나 죄수 마냥 감금하여 이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안 하면 도리어 진리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겠기 때문입니다. 불의하고 사악한 마음은 좋은 진리가 묻혀 있는 쓰레기장과 같은 것입니다. 본절은 의인, 믿음, 영생의 세 가지의 큰 사상으로 구성되고 또 그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사람은 믿음에서 살고 또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떠난 의인이 없고, 또한 믿음이 없는 영생도 없습니다. 이 오직 믿음의 길은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의 적을 만나 희미해지고 무시를 당하고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이 믿음의 적이 하박국 때는 악인의 폭력이었고 바울 때는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때는 카톨리시즘의 교권과 전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적은 앞으로도 온갖 모양으로 순수한 신자를 엄습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롬 4:1-3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결국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된다면 우리는 그저 우리의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게 된 것이지 나의 힘으로 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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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화평케 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는 낙심치 말고 항상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로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의 전 인생을 모두 바쳐서 예수님만을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도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그분의 뜻대로 살아감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고 나의 마음속에 영접함으로 살아가야 될 것을 다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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