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자료

[기독교 성경공부] 구약 교회(에다)와 신약 교회(에클레시아)의 비교

체데크 2021. 8. 2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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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기독교 성경공부 중에서 구약 교회(에다)와 신약 교회(에클레시아)의 비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정의를 구약 교회의 히브리어 에다와 신약 교회인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통해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관점에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약 교회(에다)와 신약 교회(에클레시아)의 비교

 

이 세상에 교회는 많이 있다.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죄인들을 불러내는 곳이다. 인간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 특히 죄인들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는데 교회를 통해서 부른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죄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이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복음을 가르치지 않으면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교회를 꼭 다녀야 만이 신앙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인지를 내가 알아야 한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를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관점에서 공부하여 교회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교회를 나온다고 하면서도 교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안 된다. 이 시간 교회를 헤브라이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헤브라이즘 관점에서의 교회

구약에도 교회가 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은 자를 부른다. 이 세상에 교회가 없다면 회개할 수가 없다. 교회는 세상을 정화시키는 도구이다. 만약에 교회가 없다면 죄인들만 있는 이 세상을 무엇으로 정화시킬 수 있을까? 더러운 물을 정화시키려면 정수사업소로 물이 들어가야 한다. 공기를 깨끗하게 하려면 공기청정기가 필요하다. 그럼 죄인을 정화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교회다. 그래서 구약에도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기게 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 민족에 의하여 남쪽 유다는 바벨론 민족에 의하여 멸망을 시켰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그루터기를 남겨두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셨다. 본 내용은 바벨론에 끌려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방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포로들이 귀환했지만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성전도 황폐해져 있었다.

 

이때에 영적 지도자인 에스라가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적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니 많은 백성들이 함께 통곡하며 회개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남녀노소와 어린아이들이 모였다.

 

여기에서 큰 무리가 모였다고 했는데 무리라는 단어가 קהל(카할 6951) 모임, 집회, 회중, 이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קהל(카할 6950) 함께 모이다, 소집하다, 모아놓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이 교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모인 집회를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유명한 가수들이 콘서트를 열고 노래를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나의 집회지 교회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교회의 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죄인이 모여야 한다. 둘째, 복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회개가 있어야 한다. 넷째, 구원받은 은혜가 있어야 한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친 것이 무엇인가?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모르고 잊어버렸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삶에서 회개시켰다. 율법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해 줄 때에 백성들이 회개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행동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여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육적인 돈을 주고 밥을 퍼주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지 본질은 아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두아디라 교회가 주님께 책망을 받는다.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주님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했다. 하지만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책망하셨다. 처음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뜨거웠지만 교회가 성장하면서 외형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순수한 복음을 전하던 시절은 끝났고, 외부적으로 교회를 알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사업하기 시작했고, 주님의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밥을 퍼주며 쌀을 나누어주는 복지사업에 뛰어들었다. 물론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해야 할 본질인 영혼구원은 잊어버린 채 사이즈만 키우는 사업 마인드로 바뀐 것이 문제다.

 

교회는 죄인들을 죄에서 불러내어 구원시키는 목적이 있다. 영혼을 구원시키지 못한다면 이것은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교인들은 교회에 나올 때에 어떠한 자세로 나와야 하는가? 먼저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살다 보면 많은 죄악들을 짓고 산다. 이것을 교회에 나와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주일예배는 특별히 지켜야 한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소집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군인들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제대를 하면 예비군 훈련이라는 소집 통보를 받는다. 제대했으니 이제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여 나가지 않으면 벌금을 물거나 법적인 조치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도 똑같다. 원죄가운데 빠져 죽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살아났고 구원을 얻었다. 이것이 국방의 의무를 다한 군인과 같다. 그러고 나서 제대를 한 것처럼 구원받은 자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이런 자가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인생을 막살면서 자 범죄를 짓고 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주일에 특별히 이런 자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린다. 이것은 군대를 제대한 사람들에게 예비군 훈련이라는 소집명령을 내려 군대에서 훈련받았던 것을 생각나게 하여 잊지 않게 한다. 하나님께서도 구원받은 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소집명령을 내려 세상에서 살다가 교회에 나와 영적 훈련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하게 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은 주일날에 성도들을 소집하는 것이다. 나는 주일날 하나님의 소집명령에 제대로 응하고 있는지를 이 시간 고백해 보자.

 

구약에 교회를 말하고 있는 단어가 또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 교회의 정의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26:9-10 엘리압의 아들은 느무엘과 다단과 아비람이라 이 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니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여호와께 반역할 때에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우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모세와 아론과 하나님께 대적하여 죽은 자들이다. 고라가 모세와 아론의 사촌지간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성막에서 하는 일도 최고의 일인데,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여 죽는다. 자신의 위치를 떠나면 사탄과 같은 짓을 하게 된다. 여기에 다단과 아비람도 고라의 반역에 함께 동참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대표들이다. 지금으로 보면 교회의 장로들을 의미한다. 이런 자들이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 모세와 아론을 거스르고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을 할 때에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죽이고 함께 동참했던 250명을 죽임으로 하나님은 징표를 삼았다.

여기에서 회중 가운데서라는 단어가 עדה(에다 5712) 모임, 집회, 회중, 무리, 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יעד(야아드 3259) 지정하다, 서로 약속하다, 뜻이 같다, 소환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그럼 קהל(카할)עדה(에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קהל(카할)은 죄인이 교회에 들어와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있는 무리를 의미한다.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를 말한다. 반면에 עדה(에다)는 장소적인 개념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자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하다. 이 장소에 주일마다 모여서 회중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다. 그래서 이곳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날에 모이게 됨으로 절기에 모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서로 지정된 날짜에 약속했기 때문에 장소적인 개념으로 모여야 한다. 이것이 예배다. 예배는 시간과, 날짜와, 장소가 있다. 이 날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소환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장소적인 עדה(에다)로 모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 קהל(카할)로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되지, 힘들게 꼭 장소적인 개념의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너의 낯을 보이라고 했다. 낯을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장소적인 개념의 교회에 나와야 한다.

 

이렇게 장소적인 개념의 대표로 다단과 아비람을 선출했다. 교회마다 교인의 대표로 장로를 선출한다. 이런 장로들이 고라와 같은 부목사와 의기투합하여 담임목사에게 대적하고 싸우는 일에 앞장서면 안 된다. 담임목사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치리 하게 두어야 한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회중의 영적 지도자다. 이런 자에게 대적하기 위해서 반역하면 결국 죽게 된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기득권을 갖기 위해서다. 자신들도 모세와 아론처럼 앞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싶은 생각이 컸다.

 

교회의 장로가 교인의 대표로서 쓰임 받는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인데, 더 나아가 강대상에 올라가 자신이 주일날에 설교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단과 아비람과 고라를 죽이셨다. 우리는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자신의 위치를 떠나게 되면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께 반역하게 된다. 사탄도 결국 자신의 위치를 떠나서 멸망을 받게 된다.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의 사역의 위치를 떠나고 있지 않는가? 토론해 보자.

 

이제 우리가 헤브라이즘의 관점에서 교회를 생각했으니 헬레니즘 관점에서의 교회는 어떠한지를 배워보자.

 

헬레니즘 관점에서의 교회

 

신약에도 교회는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헬라어를 통해서 교회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자.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때에 제자들이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대답했다. 그때에 예수님은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했다. 이때에 제자들의 대표로 베드로가 대답한다.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을 주님이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교회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반석을 오해하여 베드로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줄 알고 있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은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사상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다.

 

그럼 베드로의 반석은 무엇일까? Πετρος(페트로스 4074) , 바위, 라는 뜻이다. 이 돌은 깨진 돌이며 바위 조각을 말한다. 교회는 베드로와 같은 깨진 바위에 세울 수 없다. 음부의 권세에 의해서 바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깨진 바위조각은 성도를 의미한다. 베드로도 신앙 고백한 성도에 불과하다. 그럼 주님의 반석은 무엇일까? πετρα(페트라 4073) 반석, 견고한 바위, 돌이 많은 산악지대를 뜻한다. 이 반석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바위산을 말한다. 예수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의 교회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진 반석과 같은 교회다.

 

여기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εκκλησια(엑클레시아 1577) 집회, 회중, 교회, 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εκ(에크 1537)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미암아, 라는 뜻과 καλεω(칼레오 2564) 부르다, 청함을 받다, 이름을 짓다, 라는 뜻의 합성어다. 이 교회는 무엇을 말하는가? 원죄에 빠져 죽었던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러내어 주셔서 죄악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신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만세전에 선택한 자들을 불러내어 각자 이름을 불러주시고 청해 주신 곳이 바로 교회다. 이 교회를 구약의 개념에서 보면 קהל(카할)이다.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집회를 말한다. 내가 이와 같은 교회에 포함되어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고백이 없이 장소적인 교회에 열심히 나왔어도 구원은 없다. 현재 나는 εκκλησια(엑클레시아)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고백했는가? 이 시간 함께 토론해 보자.

 

신약에서도 다른 교회의 개념이 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께서는 사생애가 끝나고 공생애의 시작을 하셨다. 모든 갈릴리에 돌아다니면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들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여기에서 ‘회당’이라는 단어가 συναγωγη(쉬나고게 4864) 집회, 회중, 회당, 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συναγω(쉬나고 4863) 모이다, 모여들다, 영접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예배드리는 장소적인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마을에 10 가정이 있으면 회당을 만들었다. 그중에 성인 남자 10명이 있어야 한다. 율법의 아들로 말하는 옷단 술을 다는 남자 10명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회당에 찾아가셔서 천국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모여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다. 지금 교회가 하는 일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이 사라진 이 시대에 다시 복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가 열심히 세상의 육적인 것에 빠져있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 교회가 구약에서는 עדה(에다)와 같다. 장소적인 개념의 교회를 말한다. 구원받은 무리가 모이기 위해서는 장소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천주교회처럼, 장소적인 건물이 교회라고 생각하여 더 화려하고, 더 크고, 더 높고, 더 넓게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타락해졌다. 장소적인 교회도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에 치중하다 보면, 더 중요한 קהל(카할)과 εκκλησια(엑클레시아)는 잊어버릴 수 있다. 영혼구원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한 세상의 복지사업에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장소적인 개념에 임하기보다는 구원받은 백성들 한 명의 교회에 임재하게 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여 믿으면 이것이 교회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안에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는 탄생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장소적인 개념의 교회는 열심히 봉사하여 청소하고, 주일에는 식당 봉사하고, 차량 봉사하고, 찬양대로 봉사하고, 구원받은 개념의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말씀이 부족한 사람은 배우고, 먼저 깨달은 사람은 남들을 가르쳐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기도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면서 자신의 것을 나누었다. 서로 떡을 떼면서 말씀의 교제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어떤 교회를 섬기고 있는가? 육적으로는 에다와 같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영적으로는 카할과 같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어 낼 것이 없다. 구원받은 자는 이 두 교회를 열심히 섬겨야 한다. 주일에는 건물적인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봉사하고 예배가 끝났다면, 세상에서 내가 교회가 되어 진리의 빛을 선포해야 한다. 구원받은 내가 교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나는 이 두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지 이 시간 토론해 보자.

[창세기 12장 히브리어 성경말씀] 가나안으로 이사하는 아브라함(창 12:1-9)

 

[창세기 12장 히브리어 성경말씀] 가나안으로 이사하는 아브라함(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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