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사건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이 배가 고파했을 때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천 명이 모두 먹고도 열 두 바구니나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광야에서 베풀어 주신 것은 구약의 모세를 떠오르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 있을 때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사건(눅 9:1-62)
1-6절, 열두 제자들을 보내심
[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사 모든 귀신을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그들에게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능력과 권세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역은 단지 사람의 말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役事)로 확증됨이 필요하였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고전 4:20). 사도들에게 주신 병고침의 능력은 그들의 복음 사역에 권위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그들의 신임장이었다(고후 12:12).
열두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그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고 그것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주를 믿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은 중생한 믿음 없이도 가능한 것 같다. 주께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말할 것이나 내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원문)고 밝히 말할 것이라고 하셨다(마 7:22-23).
[2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보내셨다. 그는 사도들에게 특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과 직무를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민주국가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서 국민에 의해 다스려지며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국가이다. 이런 개념은 사람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존적 존재인 것처럼 가정하는 맛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존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케 되었고 부모가 낳음으로 출생되었고 또 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매우 의존적 존재이다. 여기에 민주국가의 관념 속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 인간은 실상 스스로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는 하나님께서 왕(바실류스)이시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神政) 국가이다. 그 나라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의 백성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 섭리하신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복종함으로 그 나라에 소속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고 음란한 자들이 되었다. 세상은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하는 처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사람들이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겸손히 순종하며 그의 뜻을 행하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3절]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그는 그들이 가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몇 가지 열거하셨다. 첫째는 지팡이이다. ‘지팡이’라는 원어(랍도스)는 길 갈 때 의지하는 지팡이와 자기의 몸을 방어하는 데 쓰는 호신용 막대기를 포함하는 것 같다. 둘째는 주머니이다. 그것은 물건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 가죽 가방이나 지갑을 가리킨다. 셋째는 양식이며, 넷째는 돈이며, 다섯째는 두 벌 옷이다. 그러나 그가 후에 전대나 주머니 등을 허용하신 것을 보면(눅 22:35-36), 전도자가 평생 그런 것을 가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전도자가 세상 염려나 세상의 물질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4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예수께서는 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만족하며 활동해야지 더 나은 집을 찾아 옮겨 다니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 환경적 조건을 찾아다니는 자는 전도자답지 못하다. 세상에서도 직장인이 가능하면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대우가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다니면 그의 인격에 흠이 될 수 있다. 세상일도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일반적으로 좋다. 전도자는 더더욱 그렇다. 세상의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나선 자가 세상의 조건에 마음을 쓴다면 중심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5-6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제자들은 나가서 각 마을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 전도자는 그런 곳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여러 곳에 두루 행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전도자는 그를 영접지 않는 곳을 떠날 때 그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림으로 그들에게 증거를 삼아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제시된 구원의 복이 그들과 상관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그 나라의 백성들이 그에게 순종하는 나라이다. 그 나라에 인생의 구원과 영생과 행복이 있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명하신 일이었고 제자들이 행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위해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모으며 온전히 바쳐야 한다. 가난한 자들과 병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단지 교회의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일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신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세계복음화라는 큰 사명을 위해 세상일들을 작게 여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실 것이며 성도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7-9절, 헤롯의 당황함
[7-9절]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 . . .
분봉왕 헤롯은 [그에 의해](전통본문) 이루어진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해 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이는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이는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었다. 헤롯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말하며 그를 보고자 하였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는 편안할 수 없다.
10-17절, 5병 2어(五餠二魚)의 기적
[10-11절]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 . . .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벳새다라고 불리는 성에 속한 한 한적한 곳으로](전통본문) 떠나 가셨다. 그가 그들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은 그들에게 쉴 시간을 주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따라왔다. 그들의 열심은 대단하였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부흥을 주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냉냉하고 거칠고 반항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어둡고 무디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고 교회의 부흥도 하나님의 긍휼의 손 안에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셨다. 그에게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셨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 세상 나라는 죄악되며 장차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하며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소망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의 병들도 고쳐주셨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도 필요하다. 천국에는 병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영육으로 건강하게 영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가장 복된 소망이다.
[12-17절]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 . . .
날이 저물어 가자 열두 사도가 나아와 말하였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들이니이다.” 이것은 갈릴리 호수 부근 벳새다 들판에서 어느 날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요한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요 6:9). 남자가 한 오천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작은 떡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게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제자들이 무리를 오십명씩 질서 정연하게 앉혔다. 그러므로 무리의 숫자는 대략적으로 파악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저녁에 거기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나 거두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이 남자만 약 5천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사복음서들에 다 기록되어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사건은 예수님의 다른 모든 기적 사건들과 더불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 즉 그의 신적 인격과 메시아 사역을 증거한다. 예수님,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시고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또 그가 사도들에게 그리고 후에는 신약교회에 주신 사명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받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또 사도들에게 병고침의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 그는 또한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그것은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이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20:30-31의 말씀대로,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셋째로, 떡 기적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심도 증거한다. 요한복음 6장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5, 51, 53-55).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사람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자이시다. 주의 교훈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그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다(마 6:32-33).
18-4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8-20절]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 . . .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때 그는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들은 대답하였다.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님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대해 세계적 종교의 창시자나 역사상 훌륭한 선생 등의 여러 견해가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혹은 ‘신성(神性)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을 가리켰다.
[21절]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또 물질적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건져내어 줄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메시아의 일차적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메시아 왕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함을 가질 것이지만, 그는 우선 정치와 경제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다. 그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건져 주시는 구주이셔야 했다. 사람들이 이런 메시아의 사명을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22절]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인자’(人子)라는 명칭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그의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사람이신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다. 그는 과연 자신이 예언한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 . .
그는 또 무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본래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허무하고 죄악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것들이었다.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야 한다.
[24-25절]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구원할 것임이니라](원문).” ‘나 때문에’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할 이유는 우리가 육신의 목숨만을 위해 산다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우리가 주를 위해 육신의 목숨을 잃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두 종류의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육신의 목숨만을 위해 살려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육신의 목숨을 잃는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이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제자들의 삶의 과정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유익하겠는가 함이라](원문).”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이유는 영생의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다 해도 자기의 영혼이 지옥에 던지운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26-27절] [이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부끄러워할 것임이니라](원문).” 인성을 가지신 예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던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인정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서 제외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다음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신 사건이라고 본다.
[28-31절]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 . . .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다. 그는 또 기도하셨다. 그때에 그의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화되고 그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그것은 그의 인격의 성결함과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하였다. 세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 있으며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잠시 동안이라도 보게 되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32-36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 . . .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은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떠날 때 베드로는 예수께 말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아서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였는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소리가 그치자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러 해 후에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 사건에 대해 말하였다(벧후 1:16-18).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은 하나님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해주셨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 더 확실하고 시원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라는 것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자라면, 마땅히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보내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도 순종해야 한다.
[37-39절]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 . . .
이튿날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았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렀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게 불행을 주심으로써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그 아버지는 말하였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마태복음은 그 아이의 병을 간질이라고 말했다. 이 병은 악령의 활동이었다. 악령은 그 아이 속에서 활동하며 소리를 치며 부르짖고 거품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그 몸을 심히 상하게 만들었다. 마태복음은 그가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졌다고 말한다(마 17:15).
[40-41절]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 . . .
그 아버지는 말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제자들은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제자들도 병을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지만 이 아이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적기 때문에 못했다고 말씀하셨다(마 17:20).
[42-45절]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 . . .
그 아버지가 아이를 예수께 데려올 때 귀신은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셨다. 그는 그 아이를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다.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고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겼다.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의 영광을 다시 한번 나타내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주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었고 이 세상에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숨김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베드로는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친히 증거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간질병 걸린 외아들을 고쳐주심으로 친히 자신을 증거하셨다. 그가 행하신 많은 기적들은 그에 대한 풍성한 증거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 최후적, 절정적 확증이다. 우리는 그를 믿자.
둘째로,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분명하게 예언하신 바이었다. 그는 친히 그 고난의 길을 가셨다. 그의 부활의 영광은 그의 십자가의 고난 후에 올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고난을 당하신 후 영광을 받으셨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그를 따라야 한다.
셋째로,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교훈하신 바이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46-62절, 제자의 길
[46-48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 . . .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더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 그런 경쟁심은 인간의 뿌리깊은 죄악성인 교만과 명예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다툰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려고 종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너무 다르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많은 말씀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 제자들 속에는 연약성이 그대로 있고 아직 주님을 본받는 자 되기에 부족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셨다. 그들이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그들의 마음의 욕심과 복잡함을 아셨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다 아신다(요 2:24). 그는 제자들의 문제점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그는 그것을 위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는]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큰 자임이니라](원문).”
‘내 이름으로(에피)’라는 원어는 ‘내 이름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린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든지, 혹은 그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낮추고 작은 일 하나를 즐거이 행하는 그 사람이 큰 자이다. 모든 종류의 명예심과 욕심을 버리고 오직 겸손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자는 큰 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49-50절]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 . . .
요한이 말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었던(막 3:17) 요한은 성격이 급했던 것 같다. 사도 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함께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금지하였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금하지 말라. [이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자임이니라](원문).” 전통본문에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관용의 정신이 있다. 물론 관용에는 한계선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라는 한계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향해 ‘우리 교회에만 속해야 한다’는 좁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실히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2:30에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누가복음 본문의 말씀과 반대되지 않고 보충적이다. 그 말씀은 어떤 사람이 생각과 입장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같이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들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51-53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 . . .
예수께서는 승천하실 기약[그의 승천의 날들]이 차 가므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표현은 그의 인간적 모습을 잘 나타낸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죽음의 길을 향해 즐거이 나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긴장하셨을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굳게 결심하며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을 위해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을 알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반쯤 이방인으로 여기며 낮추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의 육신적 혈통이나 종교 생활은 순수하지 못하고 혼합되어 있었다.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 . . .
야고보와 요한은 이를 보고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전통본문에는 ‘주여’라는 말 다음에 ‘엘리야도 했듯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자기를 잡으러 보낸 50명의 사람들을 저주하므로 두 차례나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멸하게 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의 일을 기억하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멸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주님께 물은 것이다.
[55-56절]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 . . .
예수께서는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 어떤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도다. 이는 인자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음이니라”는 말이 있다. 주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44).
[57-58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 . . .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주여,](전통본문)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것은 귀한 결심이며 고백이다. 그것은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라는 찬송가 가사와 같은 고백이다. 이것은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격려하는 대신 매우 부담되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여우나 새도 집이 있지만, 예수님은 안정된 집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주께서는 세상에서 자신이 소유한 집이 없으셨다. 그는 전도 활동의 마지막 때에 제자들과 함께 가진 유월절 식사도 어떤 이의 다락방에서 하셨고 그 밤의 휴식도 감람산에서 하셨다. 주님의 전도 사역에는 물질적 안정이 없었다. 주를 따르는 제자들은 주의 가신 길을 따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한 그 사람은 이런 각오가 없었던 것 같다.
[59-60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 . . .
예수께서는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말했다. “[주여,](전통본문)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두 번째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고 주를 따르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가서 그의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주께 구했다. 그의 요청은, 그의 부친이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돌아가실 때까지 그를 보살피겠다는 의미이든지 혹은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면 그 장례식의 긴 절차들, 예를 들어, 7일 애곡이나 1년간의 애도 등을 포함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요청은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인간의 도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처음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두 번째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 곧 장례를 행해야 할 대상자들을 가리킨다. 부모를 공경하며 그들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잘 행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단지, 주의 말씀은 더 높은 명령,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에게 명한 말씀과 비슷하다(레 21:10-11). 대제사장은 부모로 인해서도 더러워지게 말고 성소에서 나오지도 말아야 했다.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전도의 임무를 주셨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긴급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일이 세상의 일 때문에, 심지어 가족관계의 기본적인 일 때문에라도 방해받지 않고 지장되지 않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세상의 모든 일들 가운데서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61-62절]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 . . .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고 그를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것도 귀한 결심이며 고백이었으나, 그는 ‘먼저’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주께 요청하였다. 사람이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절차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주님의 대답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우선순위의 혼란이 문제이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그는 그 사람의 마음의 혼란을 보고 계셨다. 그는 밭 가는 자가 앞을 바라보며 밭을 갈아야 할 것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만일 밭 가는 자가 밭을 갈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면 이랑이 비뚤어지고 말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뜻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상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세상의 일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옛날 롯의 아내와 같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것은 세상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복음의 일꾼들이 세상의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천국의 직무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그것을 가장 크게 여기고 그 직분에 지장되지 않도록 처신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세상 염려나 세상 애착 때문에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제자의 길, 즉 제자들이 가져야 할 몇 가지 마음가짐에 대해 교훈하셨다. 첫째로, 제자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는 항상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경쟁심이나 명예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또 주께서는 마태복음 20:26-27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3:11-12에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제자는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제자는 편협하고 좁은 마음이나 보복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친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고(마 5:39),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4, 전통본문). 사도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했고(롬 12:17-18), 또 “너희 관용[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했다(빌 4:5).
셋째로, 제자는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는 고난과 핍박, 또한 물질적 불안정과 가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이미 말씀하셨다(눅 9:23).
넷째로, 제자는 가족 관계를 초월할 각오를 해야 한다. 독신으로 살 수 있다면 좋은 길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결혼한 사람이 가지는 가족에 대한 의무는 기본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세상의 그 어떠한 의무보다 우선된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자기의 모든 의무들 중에서 가장 크게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교훈했다(딤후 2:3-4). 제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가장 중요하다.
[마태복음 21장 예수님의 말씀] 예루살렘에 올라가심(마 2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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