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에스라 3장 하나님말씀] 성전의 기초 확립(스 3:8-13)

체데크 2022. 11. 30.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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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3장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에서 1차로 돌아왔다. 레위 사람들을 세워서 성전을 건축하는데 감독자로 세웠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불었다. 유다 백성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했다.

 

성전의 기초 확립(스 3:8-13)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서는 성전을 세워야 하느냐 세우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일은 즉시 결정되었다. 가장 신속히 성취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횃불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그의 이름의 기록을 모시지 못한다면, 그들이 그 땅에 돌아왔다고 해서 무슨 낙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선한 역사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Ⅰ. 그것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제2년 2월이다. 즉 그 해의 때가 허락되자마자였다(8절). 그리고 유월절 의식이 끝났을 때였다. 터전과 재료를 준비하는 데 반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성전에 대한 그들의 열심은 이와 같이 컸다. 어떤 선한 사업이든지 그것이 성취되려고 하면 빨리 시작하는 것이 지혜요, 비록 난관과 반대가 있을지라도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됨을 기억하자. 이와 같이 우리가 선한 사업에 자신들을 투자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그 일에 개입하신다.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Ⅱ. 누가 그것을 시작했는가?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그들이었다. 하나님의 사업은 행정관들과 사제들과 백성들이 열심히, 그리고 모두 자기의 직위에서 동조하여 힘을 합치면 잘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 일에 한 가지의 마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 전망이 밝았다.

Ⅲ. 그 일의 진전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 그 일을 진전시키기 위해 레위인들을 감독으로 세웠다(8절). 그래서 감독들은 일꾼을 독려하고(9절) 그리고 부드럽게 위안의 말로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해 줌으로써 그 일을 진전시켰다. 직접 일하지 않는 자들이라도 일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독려함으로써 선한 봉사를 할 수 있다.

 

Ⅳ. 성전 기초가 놓일 때, 하나님은 어떻게 찬양을 받으셨는가?(10, 11절) 모세로 말미암아 지정된 나팔을 든 제사장들과 다윗의 규례대로 제금을 든 레위인들이 찬송했다. 이 찬양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코 낡아지지 아니하는 찬미를 부르기 위함이며, 우리의 혀가 “주는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시편 136편의 후렴주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자비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자.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슬픔이 아무리 크든지, 우리의 두려움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찬송을 고백하자. 실패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자비는 실패하시지 않는다. 이 찬송을 여기서와 같이 열심을 다하여 부르자.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포로 될 때나 본국에서 나그네 될 때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영원히 함께하시는 그 자비를 찬양하자. 상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하시고”(시 73:1) 우리에게도 선하시다. 교회의 번영이 쇠하고 죽어가는 것 같이 보이나 다시 소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 때문임을 알자. 그러므로 교회는 존속할 것이다.

 

Ⅴ.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두드러진 반응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도 서로 다른 감정은 있다. 각 개인은 모두 자신의 감정을 따라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불화(不和)는 없었다. 그들의 마음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고, 그것으로 그들의 공공 관심사가 지연되지 않았다.

 

1. 전혀 성전을 가지지 못했던 비극을 알고 있는 그들은 성전 기초가 놓이는 것만 보아도 기쁨의 함성으로 여호와를 찬양했다(11절). 그들에게는 이 기초까지도 위대하게 보였고, 죽음에서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주린 영혼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좋은 만찬이 되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는 “멀리까지 들릴 만큼” 컸다. 아직 자비가 완성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비의 출발을 보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오랜 폐허가 지난 후에 와서 세워진 이 성전의 기초는 모든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쁨이 아닐 수 없다.

 

2. 솔로몬이 세운 제1성전의 영광을 기억하고 또 이 제2의 성전이 그것에 비해 초라하고 그 규모에 있어서나 그 위용과 화려함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생각한 사람들은, 아마 “큰 소리로 울었을 것이다”(12절). 우리가 여호야김 즉위 제4년부터 첫 번 포로의 시간을 잡는다면, 성전이 불탄 지는 약 52년이 되고, 여고니야의 포로 때부터 잡는다면 59년이 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은 성전의 옛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중 많은 사람이 오래도록 살았고, 또 그들이예루살렘의 영광을 기억하고 그 이야기를 남에게 해 줌으로써 빨리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포로들에게 내려진 커다란 자비였다. 이 성전과 옛 성전 사이의 차이가 이들을 슬프게 했다.

 

(1) 그리고 이 슬픔에는 다소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이 그들의 눈물을 바른 방향으로 돌려 이러한 슬픈 변화를 가져오게 한 죄를 애통했다면, 그들은 잘한 것이다. 죄는 모든 교회나 민족의 영광을 더럽힌다. 그래서 자기들이 타락하고 퇴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2) 그러나 그들의 눈물이 일상적인 기쁨과 뒤섞여서 그들에게 실망의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라면, 그 슬픔은 그들의 허약함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작은 일의 날을 경멸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자비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2성전도 그들이 받을 만한 자격과 비추어 볼 때 훨씬 큰 것이었지만, 조상들이 가졌던 것만큼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기뻐할 때는, 우리도 슬픈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자. 여러 가지 섭리가 작용했음에 감사하는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고 가르치면서, 또 옛날의 괴로움을 기억하여 오늘의 자비를 경시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러한 백성들에게 실망을 조장시켰다면, 그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다. 슬픔과 기쁨이 혼합된 것은 이 세상사의 단적인 표현이다. 다른 사람들이 눈물의 홍수에 빠져있는 동안 혹자들은 기쁨의 강에 목욕을 하고 있다. 천국에는 모든 사람이 노래 부르고 있고 아무도 한숨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울음소리와 기쁨의 소리를 분별할 수가” 거의 없다. “기뻐하는 자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우는” 것을 배우자.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 자같이 기뻐하고 울지 않는 자같이 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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