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사무엘상 3장 주석 강해설교] 사무엘을 부르심(삼상 3:1-10)

체데크 2022. 11. 2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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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장에서는 사무엘의 소명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엘리 제사장은 점점 영적으로 어두워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불렀다. 사사 시대는 영적 암흑기이다. 엘리 제사장도 영적으로 암흑기에 있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영적 맹인의 상태였다. 이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불러서 사용한다. 성도는 종말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복음에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사무엘을 부르심(삼상 3:1-10)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사무엘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아래와 같은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사무엘은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1절). 이것이 엘리의 아들들을 부끄럽게 했으며, 그들의 죄가 더욱 악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들은 여호와를 반역했지만 사무엘은 여호와를 잘 섬겼다. 그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무시했지만 사무엘은 이를 엄수했다.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그의 감독을 받으며, 그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 사무엘이 그들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바른 길로 행하였다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이러한 준비가 있기에 하나님은 그를 높이고자 하신 것이다. 그는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곧이어 더욱 큰일이 맡겨졌다. 젊은이들은 겸손하며 또 부지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야 그는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순종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훌륭하게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다.

당시는 예언자의 활동이 매우 드물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이 사무엘 자신에게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거니와, 이스라엘에게는 큰 은혜가 되었다. “그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라고 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하나님의 사람은 특별한 일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부름을 받는다(2:27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문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수 있는, 생각하는 예언자는 없었다. 예언자들의 활동이 드물었기에 그 참다운 가치를 아는 자들은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은 더욱 귀한 것이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성막에서 횡행하던 그 숱한 불신앙과 부정이 온 나라를 멸망케 하고 하나님을 노엽게 함으로 예언의 영을 불러 가셨다가, 이제 보다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기 위해 그러한 처사를 돌이키사 충실한 예언자를 먼저 일으키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무엘에게 나타내신 방법은 매우 특수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매우 흔치 않은 방법이었다.

Ⅰ. 엘리는 물러가 있었다. 사무엘은 엘리의 침대 곁에서 그를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성전의 예배에 참석했던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방으로 물러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2절).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엘리는 일찍 자리에 누웠다. 왜냐하면 이제는 일을 잘할 수가 없고 쉬 피로를 느꼈기에 편하기만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는 자기 처소에 처박혀 있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자행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일찍 물러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그 고통은 그의 아들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Ⅱ. 사무엘은 밤에 그 노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갈 수 있도록 엘리의 방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잠을 자려고 하였다. 아마 엘리가 잠이 들지 못하면 그를 위해 책을 읽어 드리려고 했는지 모른다. 엘리는 사무엘이 그의 말에 순종을 잘 하기 때문에 자기 집 식구 가운데 누구보다도 이 사무엘에게 이런 일을 맡겼을 것이다. 엘리에게는 그의 아들들이 그에게 큰 슬픔이 되었지만 이 어린 부하가 기쁨이 되었다. 비록 자녀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에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채 꺼지지 아니하였을 때에 자리에 누웠다”(3절). 아마 사무엘은 지성소와 매우 가까운 곳에 누웠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가운데 등불은 결코 꺼지는 일은 없지만) 곁가지에 있는 등불들이 꺼지기 전에 자리에 눕고자 한 것을 보아서 그 시각이 한밤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각까지 사무엘은 책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아니면 성전 안을 청소하며 다음 날을 위한 제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리에 눕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열심히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Ⅲ.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러나 그는 엘리가 부른 것인 줄 알고 그에게로 달려갔다(4, 5절). 사무엘의 마음은 (다윗의 경우와 같이. 시 63:6) 잘 정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를 부르실 때에 즉시 깨어 일어났다. 그러나 가까이 있던 엘리는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 아마 어떤 특별한 방법의 부르심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만한 점이 있다.

1. 엘리가 언제 부를지 몰라서 항상 대기하고있는 사무엘의 근면함을 볼 수 있다. 그 음성이 엘리가 부르는 음성인 줄 알고사무엘은 따뜻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기 위해, 또는 어떤 불편한 일이 생기지나 않았는지 궁금히 여기면서 속히 엘리에게 달려갔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사무엘은 말했다. 윗사람에게 부름을 받아 온 모든 사환들은 이런 말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단지 노인들의 말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항상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분들을 잘 모셔야 한다.

 

2. 전능자의 환상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무엘의 부족함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엘리의 부름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잘못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주 저지른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단지 목사들의 부름으로만 여기고 이에 응대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적으로만 생각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널리 울리건만, 단지 지혜 있는 사람만이 여기 저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이해한다. 엘리는 그가 사무엘을 부르지 아니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를 괴롭혔다고 하여 꾸짖지 아니하였으며, 그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가 꿈을 꾼 것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상냥하게 다시 가서 자리에 누우라고 말했다. 사무엘이 하여야 할 일이 없었다. 종이 주인의 부름에 응할 태세를 언제나 갖추고 있다면 주인 역시 종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남종이나 여종도 주인의 안식을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가서 누웠다.”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을 당신의 말씀으로 부르신다. 그 음성을 듣고 그들은 사무엘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음성을 곧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 그들은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처럼의 결단이 허사가 되어 버린다.

 

Ⅳ. 똑같은 부르심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같은 잘못도 두 번, 세 번 거듭되었다(6-9절).

 

1.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으며”(6절), 또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다”(8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부르시는 그 부르심은 은혜를 주실 때까지,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자가 응답할 때까지 계속 반복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사무엘은 여전히 그것이 여호와의 부르심인 줄 알지 못했다(7절).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씌어진 말씀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종과 선지자들에게 여전히 “세미한 음성”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전혀 새롭고 낯선 방법이었다. 아마 그는 얼마 안 있으면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오는 이런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도 없었다. 하나님께 대한 위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가진 것은 대부분 어렸을 때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시절의 일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난외의 주에 따라서 읽으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그때에 “사무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사무엘이 둔해 빠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기의 의무를 잘 깨달을 수 있었다. 충실한 신앙인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도 때로는 이처럼 실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위로가 되지 못한다. 또 죄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노력도 잘못 이해되어 그들을 회개시킬 기회를 잃어버리는 수가 간혹 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욥 33:14).

 

3. 그 소리가 엘리의 목소리를 닮았으며 또 사무엘이 그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두 번째도 그리고 세 번째도 소리를 듣고 엘리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것이 틀림없이 엘리의 목소리인 줄 믿고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엘리의 목소리로 잘못 안 것이기는 해도, 사무엘이 부름을 받자 곧 달려오는 것은 평소의 그의 책임감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택하신다. 그러나 사무엘이 엘리에게로 몇 번씩이나 간 것은 그 나름대로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이로써 엘리는 드디어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게 되었다”(8절).

 

(1) 엘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셨을 때 그를 제쳐 놓고, 그의 앞에서 그를 섬기는 그의 종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고, 이는 매우 억울하고 분한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을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첫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리고 엘리는 그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을 어린아이를 통해서 주신 것을 깨닫고는 더욱 겸손해야만 했던 것이다. 엘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나타낸 것임을 알아야만 했다.

 

(2) 이리하여 엘리에게는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는 사무엘에게 전달된 말씀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충분히 믿게 되었을 것이며, 그것이 사무엘의 착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만한 마음은 도무지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 메시지가 전달되기 전에도 이미 엘리는 하나님께서 뭔가 자기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사무엘이 바로 그것을 자기에게 전달해 주기까지는 엘리는 그 내용을 모르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이 고용한 자의 약점과 실수도 무한한 지혜이신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고야 마는 것이다.

 

Ⅴ. 드디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차비를 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나온 메시지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한 예언자가 될 수 있도록 공개적 시상을 공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1. 엘리는 사무엘이 들은 음성이 분명 하나님의 음성인 줄을 알고,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었다(9절). 엘리는 이 일을 정직하게 행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기를 제쳐 놓고 직접 사무엘에게 갔다고 하는 것은 매우 망신스러운 일이지만 엘리는 사무엘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명예가 사무엘에게 간 것을 만일 엘리가 시기하였다면 , 사무엘 자신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 사무엘에게그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가서 잠을 자라고 명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는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엘리는 사무엘이 잘 될 수 있는 좋은 길을 그의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 주었다. 이처럼 노인들은 뒤따라 오는 젊은이들 때문에 그들의 장래가 암담해지고 가치가 떨어질는지 모른다고 하여도 인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젊은이들의 진보를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뒤에 오는 이가 우리보다 앞선다고 해도 결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요 1:30).

엘리는 사무엘에게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사무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저에게 말씀하옵소서, 지금 말씀하옵소서.”라고 말하여, 들을 준비를 해야 하며, 그대로 시행하겠다는 것을 약속하여,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시 85:8; 합 2: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을 설교하고자 하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빛과 능력 앞에 자기를 드러내고, 이에 순복하여야 한다. 즉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네 번째로 말씀하실 때는 전번과는 약간 다른 식으로 사무엘을 부르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하나님은 사무엘의 이름을 불러 그를 부르셨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임하여 서서” 부르셨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사무엘 앞에 이제 서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욥에게 하는 엘리바스의 말에 의하면 “그 형상을 분별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라고 한다(욥 4:16). 사무엘은 그때에 자기를 부르시는 분이 엘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계 1:12).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셨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즐거우셨던 것 같았으며, 또는 이번에는 반드시 누가 그를 부르고 있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 주고자 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다”(시 62:11)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름으로 그를 아신다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며(출 33:12), 그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시는 것은 매우 능력이 있고 효과가 많은 부르심이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신 경우와 같이 현저하게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름을 불러 아브라함을 부르셨다(창 22:1).

 

3. 사무엘은 엘리의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의 입에는 제때에 좋은 말을 넣어 주며, 경건한 마음을 표현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잘 알 수 있으며, 경건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훈련을 쌓을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말하여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라. 무지한 마음으로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하여야 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전번에 엘리가 부르는 것으로 알았던 때와 같이 일어나 뛰어가지 않고 조용히 누워서 귀를 기울였다. 보다 조용하고, 보다 차분한 마음은 하늘의 일을 보다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우리의 모든 소란한 생각과 감정을 진정시키고 모든 것이 조용히 마음속에 가다듬어지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사무엘은 말 한마디를 빼놓았다. 그는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만 말했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아닌지 아직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하여간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한 대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워질 수 있었으며, 전능자의 이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을 때”(3절)에 일어났으며, 엘리가 멸망하여 우림과 둠밈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그에게 신탁을 내리셨다. 이런 경우를 두고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말하기를 “해는 뜨고, 해는 진다.”(전 1:5)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한 의인의 태양이 지기 전에 또 다른 의인의 태양이 떠오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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