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4장 성경말씀 중에서 유대인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베드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승천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이 싫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제자들을 체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제사장들 앞에서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두려워서 떨었지만 지금은 성령을 받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유대인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베드로(행 4:1-37)
1-22절, 공회 앞에서 증거함
[1-4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성전 경비대장]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제사장들은 구약교회 지도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싫어하였다. 중생치 못한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할 것이다. 심지어 교회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만 깨달을 수 있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롬 10:17) 듣고 믿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엡 2:8). 남자들의 수가 약 5천명이 되었다. 이 말은 솔로몬 행각에서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가 약 5천명으로 늘어났다는 뜻일 것이다(칼빈, 매튜 풀).
[5-7절]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관원’이라는 원어(알콘타스)는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말로 아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산헤드린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공회의 회원으로서 사두개파에 속하였다. 당시에 시무하는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회의 의장이 되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었으나 바리새파에 속하였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로 성경의 사본을 보존하고 필사(筆寫)하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즉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지 자신들의 이름으로 하는지 물었다.
[8-10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담대하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담대함과 능력을 주신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어 그들의 앞에 섰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죄가 없으셨음을 증거하였고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다(롬 1:4). 또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자주 표현했다(2:22; 3:6; 10:38).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역사적 예수를 가리킨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독특한 인격 곧 하나님과 사람이시다. 그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신성(神性)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그의 이름이 능력이 있고 그 이름이 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다.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시편 118:22의 말씀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너희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켰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마침내 로마 총독 빌라도를 통해 그를 죽게 하였으나, 그 버린 돌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 집의 좌우의 벽을 연결하는 기초석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석이시다. 사람들은 그를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셨고 중요하게 사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을 이루는 일이었다.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서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였다. 주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였다(딤전 2: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세상에 보내주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한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유일한 구주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타종교와의 대화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타종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고 동료 순례자라고 말하였다. 감신대학 학장이었던 교수도 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이단 사상을 경계해야 한다.
[13-14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파르레시아)[담대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들의 담대한 발언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약속하셨었다(마 10:19-20).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하며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고 말씀하셨었다(출 4:11-12).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구변(口辯)을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했었다(요 7:15).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고 은혜스럽게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이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담대히 은혜스럽게 증거케 역사하신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비난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고 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앉은뱅이가 그들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리는 항상 당당하다. 진리에 대한 정당한 비난은 없다. 진리의 사람들에 대한 비난들은 항상 있어왔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나, 모든 거짓된 비난들은 다 파하여지고 진리는 견고히 세워질 것이다.
[15-16절]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그노스토스)[확실한, 다툴 여지가 없는]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그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공회원들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 했다. 그것은 그들이 어두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이루어진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다(행 2:22).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항상 진리를 부정하고 왜곡시키려 하였다.
[17-18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공회원들은 예수님에 대해 믿을 만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대적하며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하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다(롬 3:11).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였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말씀을 순종하였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과 그의 명령들을 말하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21-22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여세나 되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원수들의 입을 막으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환경조건과 별개로 역사하신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싫어하고 그들을 잡아 가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셨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충성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자.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였다. 또 그는 살아계신 주 예수께서 그 앉은뱅이를 낫게 하셨다고 증거하였다.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가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시다. 인류의 구속(救贖)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는 예수밖에 없으시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유일한 구원의 종교이다. 오늘날 교회들 속에 들어와 있는 종교 다원주의는 이단이며 그것을 포용하는 것은 배교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들의 위협 속에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하고 또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사도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하는가? 우리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할 수 있는가?
23-37절, 고난에 대한 사도들의 대처
[23-24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공회에서 놓인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 사도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도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다. 그들에게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일치된 믿음과 행함이 있었다. 기도는 어려울 때 담력을 얻는 길이다. 성도는 기도로 어려운 세상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다.
사도들은 기도하되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다. 통성으로 기도한 것이다. 보통 때에는 조용히,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 속삭이듯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무의미하게 말을 반복하거나 중얼거리지 말고 인격적 하나님께 또박또박 아뢰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상한 때에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대주재여, [주께서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하나님이시니이다](전통본문)”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참 주인, 즉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고 모든 일을 임의로 행하실 권한이 있으신 자이시다.
[25-28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빌라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메시아를 대적한 것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시편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도들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이다. 또 그들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신앙과 대항도 그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셨음을 말했다.
[29-31절]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주의](전통본문)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들은 하나님께 몇 가지를 간구했다. 첫째는 권세자들의 위협을 보시옵소서라는 간구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 사도들을 위해 적절하게 조치하여 사도들을 보호해 주시든지 피신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원수들을 진멸시켜 주실 것이다.
둘째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이다. 진리에 대한 핍박은 예견된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없애주시기를 구함보다 그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주시기를 구했던 것이다. 진리 운동에 고난과 핍박은 항상 있다. 그러나 전도를 통해 영혼들은 구원을 얻고 교회는 설립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히 계속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 있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귀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큰 중요성을 두고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셋째는 주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이었다. ‘손을 내밀어’라는 말은 전통본문에는 ‘주의 손을 내밀어’라고 되어 있다. 주께서 병고침과 기적을 행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났었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며 신약교회가 아직 튼튼하게 건립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하셨으나, 하나님의 기사들과 능력들은 교회 역사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것들 없이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기독교는 기적이나 철학을 전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왔다(고전 1:22-23). 2천년 기독교 확장은 기적들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다. 모인 곳은 진동했고 모든 사도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성령은 능력의 영이시며 능력을 주시는 영이시다. 사람은 대적자들의 위협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기 쉽지만,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력을 얻는다. 오늘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얻음으로 담대히 전도할 수 있다. 전도의 담력은 성령 충만에서 나온다.
[32-37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공동으로 사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교회이었다. 사도행전 2:44-45도,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의 유무상통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짐에서 나왔다. 그것은 그들이 한 교훈을 받았고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졌으며 한 순종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고 무리들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밭과 집 있는 자들은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그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바나바도 밭을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물론 기독교는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신 15:11). 왕정 시대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다. 또 부지런한 자는 부해지고 게으른 자는 가난해진다(잠 10:4). 그러나 비록 성경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만, 우리의 모든 재산은 실상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물질에 종이 되지 말고 물질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에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의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1, 14-16). 또 다윗은 시편 24:1에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즐거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초대 교인들의 유무상통의 정신이었다. 물질적 여유가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자랑하며 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그의 뜻과 그의 영광을 위해 내놓는 것일 것이다. 물론 모두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전제되어야 한다. 게으름은 악한 것이다. 사람마다 건강 상태가 다르고 타고난 재능도 다를 것이지만, 누구든지 손으로 하는 일을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했다(살후 3: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다.
둘째로, 성도는 세상의 고난과 핍박 중에도 담대함을 가지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 고난 많은 세상에서 성도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얻을 때 담대함을 얻는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개인적 신앙 생활에서나 교회의 봉사 생활에서나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언제나 담대히 행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교훈과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지식과 풍성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재산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과 어려운 교우들을 돕는 일을 위해 사용하자.
[사도행전 히브리어 성경말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13)
'신약성경 원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4장 주석 성경말씀] 씨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마 4:1-41) (0) | 2021.09.12 |
---|---|
[신약히브리어 베드로전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복음(벧전 1:10-12) (0) | 2021.09.04 |
[신약히브리어 성경말씀] 시험을 이긴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음(약 1:12-18) (0) | 2021.09.04 |
[신약히브리어 성경말씀] 믿음으로 얻는 참 안식(히 4:1-5) (0) | 2021.09.04 |
[히브리서 히브리어 성경말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순종 경고(히 2:1-4) (0) | 2021.08.28 |
[사도행전 히브리어 성경말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13) (0) | 2021.08.26 |
[마태복음 4장 주석강해설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사탄의 시험(마 4:1-25) (0) | 2021.08.23 |
[신약히브리어성경 유다서] 이단으로부터 믿음을 지키는 방법(유 1:20-25) (0) | 2021.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