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헬라어 주석 강해] 세리 마태의 부름과 금식 논쟁(눅 5:27-35)

체데크 2021. 5. 2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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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세리 마태의 부름과 금식 논쟁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 마태를 보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누가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자신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 자리에 다른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깨끗하다고 하니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는 율법주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세리 마태의 부름과 금식 논쟁(눅 5:27-35)

 

27절 카이 메타 타우타 엑셀덴 카이 에데아사토 텔로넨 오노마티 레위인 카데메논 에피 토 텔로니온 카이 에이펜 아우토 아콜루데이 모이

눅 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5:27

세리(텔로넨) -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인두세(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censor)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돈을 받고서 위탁 형식으로 조세징수권을 유대 고위 인사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유대 고위층들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금 조세 징수원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세리이다. 이들 세리도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곧 세관에 근무하면서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받는 세리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인두세와 같은 직접세를 징수하는 세리이다.

아무튼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창녀와 같은 죄인 취급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1) 이들이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이고 (2) 이들이 동족들에게 그것도 가난한 자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여 그 잔액을 자신들이 착복하였기 때문이다.

세관 -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의 세관이다. 가버나움은 로마 군대가 상주해 있을 정도로(7:1-10; 마 8:5-8) 중요한 도시였는데 특히 북쪽으로는 수리아 지방으로, 남쪽으로는 유대와 애굽 지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통관세를 징수하는 로마의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레위'(마태)는 이곳에서 근무하던 세관원이었다.

보시고(에데아사토) - 이 동사는 관찰자가 주의 깊게 보는 , 즉 '눈여겨보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레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 그를 특별히 골라내셨음을 알 수 있다.

28절 카이 카탈리폰 하판타 아나스타스 에콜루데센 아우토

눅 5: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5:28

버리고...좇으니라 -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직접적인 명령에 레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로 그를 따라나섰다. 레위가 예수를 따라나선 것이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았으리라고 짐작된다. 레위의 이런 행동은 후에 상세히 밝혀지게 될 제자도(discipleship)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레위의 행동의 두 가지 면, 즉 모든 것을 버리는 소극적인 면과 그를 따르는 적극적인 면을 모두 보여준다(9:23-25).

29절 카이 에포이에센 도켄 메갈렌 호 레위이스 아우토 엔 테 오이키아 아우투 카이 엔 오클로스 텔로논 폴뤼스 카이 알론 호이 에산 메트 아우톤 카타케이메노이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5:29

큰 잔치 - 신약성경에서 잔치는 기쁨을 상징하며, 때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베푸실 종말론적인 천국 잔치를 암시하기도 한다(13:29; 14:16). 레위가 예수를 모시고 잔치를 배설한 것은 접대와 송별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자신들의 옛 친구들도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이었을 수도 있다.

30절 카이 에공귀존 호이 크람마테이스 아우톤 카이 호이 파리사이오이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레곤테스 디아티 메타 텔로논 카이 하마르톨론 에스디에테 카이 피네테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5:30

세리와 죄인 - 29절에서 '다른 사람'이라고 언급된 사람들은 결국 '죄인들'이었다. '죄인들'을 나타내는 '하마르톨로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규정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2:16).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죄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율법의 준수 여부였다.

이는 곧 율법을 지닌 사람들은 본래 거룩하며 반면에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이방인)은 본래 죄인임을 의미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그들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12:1;15:2)을 죄인으로 간주했다(K. H. Rengstorf, TDNT. I, 317-35). 특히 압제자인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의 고혈을 짜는 세리는 죄인 중의 죄인이요 극단적 경멸의 더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경스러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계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을 범하는 행위였다.

이들 바리새인들은 특히 유대교적 신앙과 생활을 고수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러한 헌신의 노력으로 그들은 도덕적, 의례적 순결성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기서 분리된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가 되어 반드시 정결 예식을 거쳐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갈릴리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그러한 율법의 조항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먹고 마시느냐 - 바리새인들이 특별히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해 비난한 것은, 식탁에서의 교제가 그들의 사회에서는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31절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이에수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우 크레이안 에쿠신 호이 휘기아이논테스 이아트루 알르 호이 카코스 에콘테스

눅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5:31

건강한 자에게는...쓸데 있나니 - 예수는 속담이나 비유를 만들어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퍼져있던 속담이나 비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셨다. 이 구절에서 '건강한 ''병든 자'의 대비는 32절의 '의인''죄인'의 대비와 연결된다. 한편 영혼의 의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아픔을 호소하는 모든 병자를 진단하시고 치료하신다. 러나 의사의 몫까지 자처하여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진단 내리고 처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예수의 처방이 적용될 수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자신의 오진(誤診)으로 인한 죽음의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32절 우크 엘렐뤼다 칼레사이 디카이우스 알라 하마르톨루스 에이스 메타노이안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5:32

죄인을...왔노라 -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의인 인체 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무지와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실상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3:10).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물리치시며 자신의 무가치함과 구원의 필요를 깊이 느끼는 자들에게 구원의 초대를 하신 것이. 따라서 예수의 구원의 초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회개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누구든지 회개에의 호소에 진실로 응답하려면 먼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행 구절인 마 9:13과 막 2: 17에는 빠져있는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예수께서 인용한 속담의 신학적 의미를 밝혀준다. 또한 이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도입한다. 그것은 은혜와 용서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은 사실이지만(2:10)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3, 14에 나오는 세리는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시켰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18:11, 12). 한편 본 구절의 '회개'라는 주제는 15:7, 10, 22-27, 32에서 '기쁨'이라는 주제와 연결되고 있다.

33절 호이 데 에이폰 프로스 아우톤 디아티 호이 마데타이 이오안누 네스튜우신 퓌크나 카이 데에세이스 포이운타이 호모이오스 카이 호이 톤 파리사이온 호이 데 소이 에스디우신 카이 피누신

눅 5: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5:33

금식하며 기도하고 - 예수 당시에 금식은 아주 일반화되어 있었다. 원래 유대 민족은 금식을 속죄일(710)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시하였다(16:29). 이것은 히브리어로 '이나 네페쉬'('영혼을 괴롭게 하다')라 하여 율법으로 엄히 명한 것이었다. 이외에 유대인들은 금식을 국가적 재난이나(20:26), 병들었을 때(35:13), 애곡 할 때(삼상 31:13), 회개할 때(왕상 21:27), 위험이 임박할 때(대하 20:3), 재앙을 기념할 때나 기근 때에 실시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 당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재앙에 대한 애도와 회개의 뜻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시작했다. 이 금식은 예루살렘 파멸과 관련하여 나흘을 했는데 (1) 성전이 불탄 날(57; 왕하 25:8, 9), (2) 그달리야 피살일(72; 왕하 25:23-25), (3) 성전 포위 개시일(1010; 왕하 25:1), (4) 성전 함락일(49; 왕하 25:3, 4)등이었다.

이 외에도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즉,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금식일로 지켰고 경건한 사람은 더 자주 금식했다(외경 유딧서 8:6). 그러나 이 금식의 의미는 갈수록 개인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과시 행위로 전락하여 외적인 자기 과시와 위선이 많이 개재되어 예수의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6:16; 9:14) 예수는 강제적이고 의식적인 성격을 띤 자기 과시나 종교적 공적을 쌓는 행위로써의 금식을 단호히 배격하시고 금지하셨다. 예수께서도 금식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발적 형태로서의 영적 훈련으로 실시하셨던 것이다(4:2; 6:16-18).

바리새인의 제자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7:18; 11:1; 6:29; 1:35). 그러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당시 대다수의 랍비들처럼 제자들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요세푸스와 렝스토르프의 견해처럼 '바리새인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때때로 '예언자의 아들들'(왕하 9:1, 개역성경에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로 표현)이라는 표현을 '...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먹고 마시나이다 - 예수께 바리새인들이 하나의 질문 형식으로 묻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형식으로 묻는 것은 교묘한 질문 방식이다. 30절에서 대적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였으며 이에 대해 예수는 당신의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 구원에 있노라고 대답하셨다(31). 이제 여기서는 대적들이 '먹고 마시는' 자체를 가지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대적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반대 입장에 둠으로써 예수를 배타적으로 소외시키려 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요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특정한 날을 정하여 금식하는 형식적 행위에 연연한 나머지 그러한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금식에 관한 형식적 틀을 초월하셨으며 진정 필요할 시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35; 9:15).

34절 호 데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메 뒤나스데 투스 휘우스 투 뉨포노스 엔 호 호 뉨피오스 메트 아우톤 에스틴 포이에사이 네스튜에인

눅 5: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5:34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신랑이라는 표현은 흔히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54:5, 6; 2:2; 16; 2:16, 19).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것을 혼인잔치와 비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써 비교한다(25:1; 3:29; 고후 11:2; 5:32; 19;7; 21:9).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다. 이 잔치 마지막 날 신랑의 들러리를 맡았던 친구들은 신랑을 신부 방에 데려다주고는 잔치집을 떠난다. 이 일주일 동안의 잔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매우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이때 금식일이 닥치어도 금식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랑을 신부 방에 데려다준 연후에 집에 돌아와서 금식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실로 금식은 강제적이고 형식적 절차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점을 경고하셨다. 그가 함께하여 자비로운 사역을 베풀고 생명과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현재는 결혼 잔치와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기 때문에 금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금식의 실행 여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된.

35절 엘류손타이 데 헤메라이 카이 호탄 아파르데 아프 아우톤 호 뉨피오스 토테 네스튜수신 엔 에케이나이스 타이스 헤메라이스

눅 5: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5:35

신랑을... 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는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결혼식을 비유로 들어 금식에 관한 자기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신랑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일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위경 제4에스라 10:1에 나타나는 사상으로 "내 아들이 결혼식장에 들어가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나는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내가 죽을 때까지 슬퍼하며 금식하기를 작정 하노라"는 내용이다(Jeremias, Theology I, 283). 이러한 사상을 예수께서 염두에 두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이 비유는 분명히 예수가 죽어서 제자들과 이별하게 되어 제자들이 금식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복음 11장 헬라어 강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나사로 병(요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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