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헬라어 주석 강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10:25-37)

체데크 2021. 5. 2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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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구제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구제를 말하려고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 교사가 영생에 대해서 물었던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율법 교사에게 바로 네 앞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영생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자신의 행위로 영생을 얻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행위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아닌 행위로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면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충성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5-37)

 

25절 카이 이두 노미코스 티스 아네스테 에크페이라존 아우톤 카이 레곤 디다스칼레 티 포이에사스 조엔 아이오니온 크레로노메소

눅 10: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5

율법사가 일어나 - 마가는 '서기관'으로 기록한(12:28) 반면 마태와(22:35) 누가는 '율법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직분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보면 될 것이다. 율법사는 유대 율법의 전문가를 말한다. 이 율법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어느 장소, 어느 시점에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12:28-34) 마태복음과(22:35-40)과 연결 지어 생각할 때 이 이야기가 24절에 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막 11:27을 고려하여 이 이야기가 예루살렘이나 그 근처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그룬트만(Grundmann)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시험하여...영생을 얻으리이까 - 마가복음에서는(12:28)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한 나머지 진지한 물음의 자세로 질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에서의 '시험'(test, NIV)은 강한 악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종교 지도자가 공식적 직함을 받지 않은 예수께서 올바른 대답을 줄 수 있는가를 보려고 물어본 것으로 이해된다.

계속되는 질문 가운데 '영생'(eternal life, NIV)'내세에 적합한 생명'(Tyndale) 또는 '하나님 나라의 생'을 가리킨다(18:18,24,25,29; 3:3,5,15,16,36). 한편 여기 율법사의 질문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선행을 물은 어떤 부자 관원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18:18).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율법의 자구적(字句的) 해석과 적용에만 몰두했던 사람으로서는 본절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러울 따름이었다.

26절 호 데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엔 토 노모 티 게르라프타이 토스 아나기노스케이스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6

율법에...어떻게 읽느냐 - 결국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은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2:36; 12:28)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태복음(22:37-40), 마가복음(12:30-31)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반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 형태로 전개된.

아무튼 예수께서는 율법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율법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이는 율법사의 이해의 범주에 맞도록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율법사들은 모세 오경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경문을 손목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녔는데, 아마 예수는 이 경문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27절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아가페세이스 퀴리온 톤 데온 수 엑스 홀레스 테스 카르디아스 수 카이 엑스 홀레스 테스 프쉬케스 수 카이 엑스 홀레스 테스 니스퀴오스 수 카이 엑스 홀레스 테스 디아노이아스 수 카이 톤 플레시온 수 호스 세아우톤

눅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27

네 마음을 다하며...사랑하고 - 이 말씀은 신 6:5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전반부 즉 대신(對神) 관계에 관한 내용을 주석적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유대교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과 사랑을 요약한 것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 관계에 의해 피차간에 충성과 사랑의 관계를 지켜야 함을 주장하는 신명기 학파의 신학의 주제이기도 하다. 율법사들은 신 6:7-9에 의거하여 이 중요한 말씀을 소가죽에 기록하여 호부(護符)처럼 늘 지니고 다녔다.

네 이웃을...사랑하라 - 이 말씀은 레 19:18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후반부 즉 대인(對人) 관계에 관한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이웃'(플레시온)이라는 단어는 유대적 어법상 집단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동족, 같은 종교권에 있는 사람, 혹은 같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배타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을 이 단어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뒤에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에 대한 유대교적 관점을 파기하는 의미가 있다.

28절 에이펜 데 아우토 오르도스 아페크리데스 투토 포이에이 카이 제세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8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이를 행하라"(투토 포이에이)는 현재 명령법으로서 행위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행함에 대한 결과는 '살리라'라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레 18:5; 3:12에도 있다. 혹자는 여기서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을 구분하는 차원에서 예수의 인정(認定)과 행하라는 명령이 행위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Tyndale) 본문의 문맥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율법사가 요약한 율법의 핵심은 옳다고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으며(22:37-39; 12:30,31)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바 있기 때문이다(7:21,24; 25:31-46).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이 율법사의 율법 지식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가 물음을 묻는 저의(底意)와 그의 위선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대답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온전한 의미에서 충족시키기란 불가하며 따라서 율법 준수를 위해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교훈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29절 호 데 델론 디카이운 헤아우톤 에이펜 프로스 톤 이에순 카이 티스 에스틴 무 플레시온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10:29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소위 율법사가 사람들 앞에서 제기한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자 2단계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웃의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아마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의 개념을 과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의 개념 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30절 휘폴라본 데 호 이에수스 에이펜 안드로포스 티스 카테바이넨 아포 히에루살렘 에이스 히에리코 카이 레스타이스 페리에페센 호이 카이 에크뒤산테스 아우톤 카이 플레가스 에피덴테스 아펠돈 아펜테스 헤미다네 튕카논타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 하(海面下) 250m의 저지대로 두 지역 간의 거리는 약 36km 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A.D.4세기 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 떼들이 횡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길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예수의 말씀은 시작된다. 그 사람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은 민족적 구분을 초월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

옷을 벗기고...거반 죽은 것을 - 길을 가던 여행자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 심지어 강도들은 옷까지 빼앗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심한 폭행을 가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버려두고 떠나갔다. 혹자는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했으나 사마리아인들로부터는 영접받은 예수라고 하고 주막은 교회를 뜻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해석(Allegory) 일뿐,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의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였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31절 카타 슁퀴리안 데 히에류스 티스 카테바이넨 엔 테 호도 에케이네 카이 이돈 아우톤 안티파렐덴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1

마침 한 제사장이...피하여 - 여기서 '마침'(카타 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강도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피하여 지나가고'(안티파렐덴)는 반대편의 길로 돌아가는 것을 말해주는 바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 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 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레 21:1-3)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32절 호모이오스 데 카이 류이테스 게노메노스 카타 톤 토폰 엘돈 카이 이돈 안티파렐덴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10:32

한 레위인도 -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 된 지파였다(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 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33절 사마레이테스 데 티스 호듀온 엘덴 카트 아우톤 카이 이돈 아우톤 에스플랑크니스데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3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불쌍히 여겨 -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 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주의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34절 카이 프로셀돈 카테데센 타 트라우마타 아우투 에피케온 엘라이온 카이 오이논 에피비바사스 데 아우톤 에피 토 이디온 크테노스 에가겐 아우톤 에이스 판도케이온 카이 에페멜레데 아우투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10:3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 사마리아인은 먼저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다.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대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한다(Robertson).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른 후 싸매어 주었다. 이 여행자가 비상시를 대비해 붕대를 가지고 다녔다면 다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옷이라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 '짐승'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테노스'는 타고 다니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짐승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 이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다(Lenski). 그리고 '주막'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도케이온'은 '모든'을 뜻하는 '파스''영접하다'를 뜻하는 '데코마이'의 합성어로 많은 사람을 유치할 수 있는 대규모의 여관을 말한다.

탈진한 환자를 자신의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온 사마리아인은 계속해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 여기서 '돌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딤전 3:5에서 교회를 돌보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사마리아인이 환자를 '책임적으로' 돌보아 주었음을 시사한.

35절 카이 에피 텐 아우리온 엑셀돈 에크발론 뒤오 데나리아 에도켄 토 판도케이 카이 에이펜 아우토 에피멜레데티 아우투 카이 호 티 안 프로스다파네세스 에고 엔 토 에파네르케스다이 메 아포도소 소이

눅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10:35

이튿날에 - 시리아어 시내역 본(Syraic Sinaitic)에는 "그날 새벽에"(at dawn of the day)로 되어 있어 더 정확한 시점을 전해 주고 있다. 이렇게 일찍 떠났다는 것은 그 여행객이 결코 제사장이나 레위인 보다 할 일이 없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실 그는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바쁜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던 것이다.

데나리온 둘 - 20:2에 의하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며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동시대 이탈리아(Italy)에서 하루 숙박비가 로마 제국 화폐로 1/32 데나리온이었다. 로마 제국 내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가치가 동일하였다고 볼 때 이 금액은 약 2개월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한다.

갚으리라 - 이 사마리아인은 완전한 이웃 사랑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되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해져서는 안되며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 의식(責任意識)을 가지고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온전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13:1).

36절 티스 운 투톤 톤 트리온 도케이 소이 플레시온 게고네나이 투 엠페손토스 에이스 투스 레스타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6

누가...이웃이 되겠느냐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질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전자에는 이웃의 개념을 범주적으로 제한하려는 의도(意圖)가 숨겨져 있는 반면 후자에는 전자의 제한적인 이웃 개념을 타파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질문의 의도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웃이 누군가를 미리 설정해 두기보다는 스스로 이웃을 만들어 나가는 자세가 은혜받은 자들의 바른 태도이다.

37절 호 데 에이펜 호 포이에사스 토 엘레오스 메트 아우투 에이펜 운 아우토 호 이에수스 포류우 카이 쉬 포이에이 호모이오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0:37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이니이다'로 대답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는 표현으로써 핵심을 피해 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민족적, 인종적 제한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을 타파하고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다. 그러나 그 율법사는 여전히 사마리아인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이웃의 개념을 따져 묻는 율법사의 현학적(衒學的)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너무도 단순 명료하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라는 예수의 권위 있는 명령은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어버리는 위엄 있는 말씀이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영육 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당장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실천이다.

 

 

[시편 27편 히브리어 강해] 다윗의 승리 확신에 대한 선언(시 27:1-6)

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27편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다윗의 승리 확신에 대한 선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혹독한 시련이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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