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6.25 전쟁 설교말씀] 천국은 우리의 마음속에(눅 17:1-37)

체데크 2023. 6. 2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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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킨 6.25 전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전쟁에 대해서 무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6.25 전쟁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북한에서 고통받고 있는 주님의 백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북한은 종교의 자유도 없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서 속히 통일이 되어 하나님을 마음 놓고 섬길 수 있는 시대가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우리의 마음속에(눅 17:1-37)

 

요절: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

주제: 우리는 성신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이다

 

73년 전인 1950625일 주일 새벽 4시에 북한은 소련의 스탈린과 오랫동안 준비한 한국전쟁(The Unforgettable Korean War)을 개시하였습니다. 오늘은 6.25전쟁 발발을 회상하는 날입니다. 북한에서는 전범 재판을 피하기 위해 억지 주장하는 북침설은 국제적으로 전혀 통하지 않으며, 러시아에서도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남침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남침유도설(南侵誘導說)은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인데, 1990년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가 소련 비밀문서고를 공개하면서 북한군이 대대적인 준비하에 전면적인 침공을 하였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사장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확인되는 내용으로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해 준 것은 미군 개입 이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사의 “6.25 노래에서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아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기를

다시는 한반도에 내전이나 어떤 형태로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다음 주일은 하반기가 시작되는 맥추감사주일이며 미국에서는 미국독립 감사주일입니다. 감사헌금으로 주님앞에 나아옵시다,

오늘은 누가복음 17장을 강해합니다. 14-16장에서 계속 전도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도 이어집니다. 인자의 날이 속히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1. 실족하게 하는 죄 Temptations to Sin와 용서 (17:1-10)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범죄(temptation)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2) 그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범죄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님께 부탁드리기를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Increase Our Faith”하니(6)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에게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8) 도리어 그에게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unworthy servant)이라. 저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2. 사람은 악하고 무지해서 남을 범죄케 하는 일(temptation to sin)이 불가피하게 생길 수 있습니다. 개역에서는 이를 실족케 하는 일로 번역하는데 전통사본에 의하면 범죄케 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심판과 화가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악입니다. 자신이 범죄하면 멸망하듯이,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면 그를 지옥에 가게 하는 것이니, 큰 범죄에 해당합니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 하나를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은 시험이 와도 잘 넘어집니다. 믿음이 연약하거나 초보에 머문 사람을 범죄케 한다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연자맷돌당나귀가 곡식이나 올리브 등 과일의 즙을 내리는 큰 맷돌’(a millstone)을 뜻합니다. 사람이 그런 맷돌을 목에 걸치고 바다에 던지우면 살아 나올 가망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서 죄문제가 얼마나 큰 일인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3-4. 우리가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의 회개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회개를 받아주지 않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그를 책망해야 합니다. ‘경고하다는 원어(에피티마오 ἐπιτίμαω)책망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용서와 그와의 교제의 회복을 보류할 수 있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4절에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씀은 인간의 부족과 연약을 말하는데,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용서는 무한대해야 합니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라는 표현은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상대가 언제든지 회개하면 그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18:22). 용서란 상대방의 실수를 덮어주며 그의 죄책감을 나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5-6.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닫고 더 큰 믿음을 주님께 요구했습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은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더 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 비유를 보니 천국에 대한 믿음은 날마다 자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큰 좋은 출발입니다. 그러나 실상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소량의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큰 것으로 착각하는 생각을 버리고, 심히 작은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씨알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찬송 542장에서

1)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영생 허락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후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2)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주를 믿는 나의 마음 그의 피에 적시네

3) 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악 벗어 버리네

안위 받고 영생함을 주께 모두 얻었네

4) 구주 예수 의지하여 구원함을 얻었네

영원무궁 지나도록 주여 함께 하소서

7-9. 종들은 하루 종일 주인의 밭을 갈거나 양을 치면서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금방 편안히 밥상에 앉아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주인의 상을 준비하고 수종 듭니다. 주인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먹습니다. 또 주인은 그의 명령을 다 행한 종들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옛 시대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 이상입니다. 우리도 이런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로이(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0. 주인을 위해 종일 충성된 봉사를 하고서 말하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합니다. 무익한 종(unworthy servant)이란 가치가 없는 종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제직,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봉사의 직무를 행할 때도 우리의 힘과 재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신 도우심과 은혜로 했던 것이지 우리 자신은 많은 부족과 흠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2. 한 나병환자의 구원 Jesus Cleanses Ten Lepers (눅 17:11-19)

(11)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2)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그분을 만나 멀리 서서(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님, 선생님이여, 저희들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거늘(14) 그분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하시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5)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16)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어 그분께 감사를 드리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7)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길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였느니라하시더라.

1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유대 땅의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중부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 남부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시는 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을 지나게 되신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한 마을에 들어가시고 있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쳤습니다. 이들은 동네 밖에서 격리 생활을 하던 중입니다(13:46). 그래서 그들은 아마 멀리 서서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예수님, 선생님, 저희들에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병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제자들보다 더 강하고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14. 예수님의 그들이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며 진단을 받고 나환자로부터 해방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당시 나병환자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레위기 14: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환자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깨끗하고 살아있는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 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칠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 자신들이 병에서 회복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당시의 불치병인 나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15-18.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장에게 가서 모든 정결 의식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를 드리니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열 명 중 유일하게 이방인입니다. 열명이 다 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 이방인인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기쁨과 들뜬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갔다가 모두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어떤 환우는 자기가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사마리아인 환우는 자기가 병 고침받은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과 피가 섞인 족속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이라고 부르셨습니다(18).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며 배척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아홉명을 기다리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다음 주일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진정 감사를 하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올해 반 년 동안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을 주님께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19. 주님께서 그 이방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길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였느니라하십니다. 여기서 온전(whole)이란 단어는 구원을 포함한 영과 혼의 정결을 말합니다. 감사를 드린 이 환우는 육신의 정결뿐만 아니라 영과 혼의 구원도 받았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와 인자의 날 The Coming of the Kingdom(눅 17:20-37)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으며(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하여 그들을 멸하였느니라(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1)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32) 롯의 처를 생각하라.(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남겨질 것이니라 (36)두 남자가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하시니라.(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님 어디로이니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하시니라.

20-21.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처럼 로마 제국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고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을 얻는 나라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도 그런 나라를 바라고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보이지 않게, 영적으로, 내면적으로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rule)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교회 속에서 시작된 중생(重生)과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13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입니다.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는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지식과 인격과 삶이 불완전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입니다.

22-25.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날들이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人子)의 날들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人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인자(人子)의 날들은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활동하시는 날들, 곧 메시아 시대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시므로 사람들은 그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그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마란-아타). 그분의 재림의 때에 그분은 한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시고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췸같이 온 세상이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임하고 있고 또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지만, 이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26-30. 그 날은 노아의 때처럼 홍수가 나기까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죄악을 계속 지었습니다. 또 롯의 때와도 비슷할 것입니다. 롯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등 세상일에 분주했고 심히 음란하고 죄악되었습니다. 오직 롯과 그의 두 딸들만 소돔성에서 구원을 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늘로서 내리는 유황불비로 다 멸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도 비슷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되며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세상일에만 분주하게 살다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영원한 멸망의 심판, 곧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1-33.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재림의 날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됩니다. 그 날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다 불타버릴 것입니다(벧후 3:10-11). 그러므로 주의 재림의 날에는 사람이 지붕 위에 있다가 집안 물건을 가지러 내려갈 필요가 없고 밭에 있는 자는 집에 돌아가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불태워질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물건들을 챙길 필요가 없는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세상과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버림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적 목숨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34-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남자가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4:40-41에도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주님의 재림의 날은 대분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 밤 함께 자던 사람들 중에서 데려감을 당할 자도 있고 버려둠(left over)을 당할 자도 있으며,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림을 받는 것을 가리키며,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남겨져 두려운 심판을 받는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데려가심 즉 하나님께서 취하여 가심을 휴거(携去, rapture)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24:30-31,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산 자가 변화되어 하늘로 올려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질 것입니다. 개역성경 및 현대역(영어) 에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36절이 전통사본에는 있습니다. “Two men shall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37. “주님, 어디오니이까?”라는 질문은 들림을 받은 자들의 집결지를 물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을 피하시고 일반적 사실로 대답하신 것 같습니다. “주검[soma] 즉 몸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몸들을 위해서는 심판의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지만,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몸들을 위해서는 영광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도록 성도들을 돕는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가 우리 자신을 살핍시다. 하나님의 나라 즉 통치는 현재 성도들 속에서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대비해야 합니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은 두 부류로 분리될 것입니다. 하나는 들림을 받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상에 남겨질 것입니다. 지상에 남겨질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 심판과 지옥 형벌이 예비되어 있습니다(살후 1:7-9). 우리 성도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여 모두 천국에 입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랑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거기에 합당한 순결하고 선한 삶을 힘씁시다.

[룻기 4장 설교말씀] 룻과 보아스의 결혼과 다윗의 족보(룻 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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