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종려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성소의 찢어진 휘장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을 고난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소와 지성소가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들어가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든지 지성소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원문에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성도인 나를 살리기 위해서 휘장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가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지성소와 같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제사장인 나답과 아비후도 다른 불을 가지고 성막에 들어갔다가 불로 태워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소의 찢어진 휘장(마 27:50-51)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수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돌판에 새겨 주셨으며 이는 함부로 움직이거나 아무나 볼 수 없도록 성막을 지어 보관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시는 이 성막을 솔로몬의 시대에 와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모셔들이되 성전 안을 구별하여 언약궤를 모시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을 쳐두었습니다.
그 안에는 일 년에 1차 대제사장만 거룩히 준비하고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이 휘장은 거룩의 상징이요 구별의 표로서 지정된 날짜에 정한 사람만 그것도 속죄의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는 하나님의 제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를 범한 사람 사이에는 항상 이 휘장이 가로막되 이는 바로 아담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 속죄의 피를 흘리시기까지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이후부터 그 누구든지 이 죽어주신 예수님의 이름만 의지하면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 안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표니(롬 3:24) 어떤 지파 그 누구든지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 그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며 영생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활짝 열어 주신 것입니다.(요 3:16)
결국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시는 비할 데 없는 마음의 아프심이요,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드리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영생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찢어진 휘장 안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못했으니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던 당시의 대제사장 레위인은 물론, 서기관이나 혹 바리새인 그 누구도 이 찢어진 휘장 안을 공개하거나 거기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하지 않았으니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로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떠했을까요? 그 누구도 좋으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으라고 하였습니까? 그렇지 않았았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을 때 저들의 입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적을 친히 보았으면서도(행 2:6-11)
저들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고 오직 유대인을 중심 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니 아직도 저들의 마음에 휘장이 이방인에게는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주심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찢으셨으니 심지어 사랑하시는 일꾼 스데반을 죽음에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행 7:60) 이에 마지못해 사도 외에 평신도들이 유대 사마리아로 내려갔으니(행 8:14) 이렇게 복음이 좀 더 멀리 전해지는 길목에는 하나님 그리고 성도들의 마음에 고통과 스데반 집사와 같은 헌신의 제물에 마음의 휘장을 찢는 마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특히 사도들의 마음에 휘장이 활짝 열리어 복음이 주의 명하신 그대로 땅끝까지 가게 되었겠지요? 그런데 보십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찾으시어 환상을 주시는데 부정한 모든 것을 깨끗게 하시었으니 잡아먹으라(행 10:10) 하시었고 그 명령을 따라서 고넬료에 집에 가 복음을 전한 사실에 대하여 할례자들이 비난하였으니(행 11:2) 아직도 마음에 휘장은 남아 있는 것이요 그중에도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 사도도 동족에 대한 구원의 소망에 집착되어(롬 9:3) 이방으로 속히 떠나지를 못하고 머뭇거릴 때 하나님께서는 이 사도 바울의 마음의 휘장을 찢으실 필요가 있어 바로 동족 유대인의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셨으니(행 14:19)
할 수 없이 그가 지난날 선언한 그대로 아니 더 일찍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통해주신 사명 그대로(행 9:15) 이방인의 땅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제야 비로소 성전의 휘장처럼 예루살렘 교인들의 마음에 휘장도 그리고 사도들의 마음에 휘장도 찢어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족속 모든 땅에 모든 사람을 향해 막힌 것 없이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니 바울 사도는 전 세계를 향한 전도의 여행을 힘차게 달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고통의 문을 지난 후에 넓게 열려진 복음의 문을 오늘 우리에게서는 과연 어떠합니까? 이제 우리는 눈을 우리에 향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휘장이 열려져 있을까요? 가장 가깝게 나만을 생각하는 우리 마음에 휘장을 찢고 나를 포기하는 희생에서 좀 더 나아가면 내 교회만을 생각하는 또 다른 마음의 휘장도 찢어 이웃과 농. 어촌을 그리고 산간벽지를 향해 가슴을 여는 사랑, 더 멀게는 모든 족속이요 땅끝까지 가야 할 우리의 임무를 위해 단 한 번 마음의 휘장을 찢을 때 구원의 문은 더 넓게 열리되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찢어진 그 휘장처럼 위에서 아래까지 그리고 다시 땅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열릴 것입니다. 이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리고 교회들이 모두 마음 성전의(고전 3:16,17) 휘장을 넓게 찢는 이 운동에 참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그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심령도 찢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만 생각하는 신앙이었다면 주변을 바라보고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심령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주님과 함께 나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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