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바울서신 성경공부 중에서 갈라디아서 저술 목적과 특징이라는 성경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저술 목적과 특징
1. 기본적인 배경
1) 서론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서신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사도가 실제로 가르친 것과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갈 1:12) 많은 사람들은 이 서신을 "짧은 로마서"로 서술했다. 실로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확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갈라디아서를 높이 평가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고, 신앙지도의 원천이 되었다. 종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에게 갈라디아서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성경적 진리의 자유와 부흥을 위한 더 위대한 선언서가 되었다. 이 서신은 루터가 가장 좋아했던 서신이었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힘과 자기의 개혁 사업을 위한 무기고를 발견했다. 갈라디아서는 자체 속에 지니고 있는 지극히 고차원적인 교리적 내용과 변증적 상격과 또한 시적 아름다움의 결여 때문에 항상 교회사의 몇몇 시대에 잘 알려지거나 열렬하게 총애를 받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초대교회가 그 속에 나타난 특수성을 알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갈라디아서의 교리적 내용과 특히 믿음으로서만이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강력한 기술과 변증, 그리고 율법주의의 어떤 형식에도 반대하는 영적 자유의 영광스러운 변호를 항상 존중해 왔다. 교회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에 대한 어떠한 공격에도 방어할 수 있는 항상 견고한 성채가 되어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처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도록 도와준 바울의 위대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
2) 저자
교회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음을 항상 믿어왔다. 한두 사람의 극단적인 급진주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갈라디아서의 순수성, 즉 이 서신이 사도바울에게서 생긴 사실을 공격한 일이 없다. 고대나 현대의 성경학자들은 다 같이 바울이 저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급진적인 비평가들은 바울의 특징뿐만 아니라 바울의 저작 성까지도 동의했다. 오늘날 저명한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에 대한 저들의 저서에서 이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명백한 이유는 고대의 증명과 문어체와 교리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배경과 문학적인 분석 등 모든 가능한 고찰을 통하여 이 서신은 의심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다. 브루노 바우어와 루돌프 슈텍을 위시하여 로만, 피어슨, 나버, 반 마넨 등으로 구성된 급진적 화란 학파는 본 서신이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 초대교회 안에서의 유대주의자들과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사이에 일어난 2세기의 분쟁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바울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 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름과 권위를 빌어 쓴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극단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이 저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내적 증거로는 본서의 1:1-3과 5:2절에서 본서의 저자가 사도바울임을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본 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성격과 사상이 바울의 저작임에 틀림없는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등의 서신에 나타난 것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본 서신이 완벽한 바울의 저작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에 걸쳐서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자서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방 선교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는 사실과 같은 실재적인 역사적 상황으로서만 설명이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외적 증거로서 1940년 무라토리에 의해 발견된 무라토리 단편과 A.D 4세기 초엽에 가이샤라의 주교로 있었던 신학자 유세비우스 및 심지어 A.D 1세기 경의 영지주의자인 마르시온뿐만 아니라 그 이후 19세기에 일어난 튜빙겐 학파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 서신이 바울의 저작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본 서신이 누구의 저작인가를 판명하는 문제가 나올 때마다 언제나 바울의 저작이라고 판명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시대를 일관하는 교회의 소신이며, 또한 오늘날에도 교회가 확신하는 바이다. 이제까지 이 견해가 오류에 속한다고 입증할만한 뚜렷한 시비 논증이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갈라디아 서신이 바울적인 핵심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표면에는 속사도 시대의 사이비 바울적인 껍질이 단단히 덮어 씌워져 있다는 타협적 제설들은 자체 모순의 부단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저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이 바울이라고 말한다(1:1,5:2) 본 서신은 분명히 하나의 단원으로 역어져 있다. 그것은 또한 바울이 생활하던 시대와 부합되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행 15:1, 고전 7:19절 참조) 뿐만 아니라 이 편지는 매우 인간적이며, 전체 내용이 그리스도 안의 한 사람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넓은 한 마음이 있으며, 너무나 깊이 사랑하기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자애로운 한 심정이 담겨있다. 그래서 갈 1:15,16, 2:20, 3:1, 4:19-20등에 나타난 바울은 명백하게 롬 9:2, 고전 9:22, 10:33, 고후 11:28, 12:15, 엡 4:1, 및 빌 3:18,19 등에 나오는 그 사람, 바로 다소의 바울이다.
3) 수신자.
본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갈 1:1-2). 옥중 서신인 에베소서를 제외하고는 본서가 특별히 교회의 한 집단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바울 서신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의 교회는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가? 과거 반세기 동안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본서의 연대와 독자를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먼저 갈라디아서가 어디로 보내졌느냐? 이른바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 중에 세운 로마의 행정지역으로서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것이냐? 아니면 갈라디아 인종의 영토에 있는 교회에 보내어진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의 행정지역으로 있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냈다는 것은 남부 갈라디아설이라고 하고, 바울이 갈라디아 종족들의 영토에 있는 갈라디아 종족들에게 보냈다는 것은 북부 갈라디아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인이라는 소리가, 로마의 행정적 지칭이냐 아니면, 종족적 지칭이냐 하는 문제가 대립된다.
그래서 이 두 견해의 주장을 말하고 어느 것이 유력하겠는가 보도록 하겠다.
(1) 북부 갈라디아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견해를 근거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갈라다아 사람들 이란 용어의 통속적 사용
북 갈라다아 지역에는 본래 부루기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고올족이 이들을 정복하고, B.C 3세기 말엽에 중앙 산악지역에 앙카라, 페시누스, 타바움, 등 세도시를 건립했다. 고올족은 자신들의 호칭을 자기들의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으로 삼기를 좋아했는데 여기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② 누가의 일반적 용법
누가는 밤빌리아, 비시디아, 그리고 루가오니아 등의 지명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모든 지명들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행 16:6절에서 바울과 그 일행이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통과하였다는 설명, 역시 누가가 그 지명들 역시 지리적 의미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럴 경우 갈라디아는 북부 갈라디아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③ 남부 갈라디아의 여러 도읍들에 관한 누가의 설명
누가는 안디옥을 언급하면서 비시디아라는 단어를 덧붙였으며(행 13:14) 루스드라와 더배는 루가오니아의 도시들로 묘사하였다(행 14:6) 이 같은 사실들은 갈라디아라는 지명 또한 로마의 행정구역의 명칭을 나타내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그 지역이 어디인가를 밝혀주기 위해 사용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명칭을 가진 행정구역은 실제로 지리적 구역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지역까지 확장되어 루가오니아, 비시디아, 그리고, 브루기아의 일부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누가가 모든 지역에 대해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④ 사도행전 16:6절의 의미
북부 갈라디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은 바울과 그의 일행이 브루기와와 갈라디아 지역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지역이 아니고 두 지역이 언급된 것을 볼 때 갈라디아는 브루기아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갈라디아란 명칭은 행정구역상의 명칭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되어 어 왔다.
⑤ 사도행전 18:23의 의미
이 구절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머문 뒤에 행한 선교활동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라이트푸트는 이 구절 역시 내용이 비슷한 행 16:6절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경우 바울은 이 여행 초기에 북쪽 지역을 방문했을 것이다. 만일 이 두 구절에 대한 이 같은 설명이 모두 옳다면, 사도행전은 북쪽 지역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을 것이라는 강한 추측과 함께 바울 사도가 그 지역을 두 차례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⑥ 주민들의 특성
라이트 푸트는 갈라디아서의 나타난 독자들의 특성이 고올족의 특성과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인들은 술 취함, 인색함, 분쟁, 자만심, 분냄, 방탕함, 변덕스러운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라이트추트에 따르면, 고올족은 변덕스러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인들은 북부 갈라디아에 정착했던 고올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지었다.
⑦ 이고니온을 떠난 뒤의 바울의 여정(행 16:6절 이하)
모패트는 누가가 사용한 통과했다는 말을 행 18:23에 사용된 같은 단어와 관련지어 볼 때 이 말은 복음을 전하며, 통과했다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어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바울이 북쪽 지역에 몇 개의 교회를 세웠다는 견해를 지지해 준다. 그리고 또 "금지된"의 의미를 살펴보면, 바울이 이미 루가오니아에 있었을 때, 아시아에서 활동을 성령께서 금지 하심으로 어쩔 수 없이 그는 북쪽 지역으로 밖에 갈 수 없었다.
⑧ 이 견해는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지지되어 왔다.
⑨ 본 서신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율법, 특히 할례 문제는 남 갈라디아에서 보다 이방인들이 대다수인 북부 갈라 다아 지역에 해당된다. 할례 문제는 유대인들이 많은 남 갈라디아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2) 남부 갈라디아설
19세기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고 내세운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사도행전 16:6절과 18:23절의 색다른 해석
램지에 의하면, 행 16:6절에 브루기아-갈라디아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의 로마 행정구역의 일부 지역에 브루기아인들이 살았으며, 지리적으로는 브루기아로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같은 내용인 18:23절은 갈라디아의 행정구역 안에 있는 여러 지역과 아시아의 행정구역에 인접해있는 브루기아란 지역의 일부를 나타낸다. 이 두 구절을 이같이 이해함으로써 램지는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북부 갈라디아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했다.
② 사도행전에 북부 갈라디아 교회들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
사도행전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바울에 관해 아주 강력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처럼 중요한 논쟁이 있었던 교회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는 점은 참으로 이상하다. 더구나 이 교회들은 누가가 바울의 전도활동, 초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교회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모패트는 여기에 대해 반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특히 남쪽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고 있으나, 북쪽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사실 때문에 남부 갈라디아설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③ 북부 갈라디아 지역의 고립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이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에 갈라디아 교회들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갈 4:13) 그러나 이러한 방문이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북쪽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매우 험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회복기의 환자로서 북쪽 지역보다는 남쪽 지역으로 여행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램지의 견해가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④ 바울이 사용한 행정구역의 명칭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을 언급할 때 교회가 위치해 있는 행정구역의 명칭들 곧 아가야, 아시아, 마케도니아 등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한 것도 그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누가는 지리적인 위치의 명칭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바울 역시 그와 같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바울은 여정을 기록할 때 누가와 비슷하게 기술했지만 그가 세운 여러 교회들은 제각기 그 교회가 속해있는 행정구역별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⑤ 남부 지역에 어울리는 갈라디아의 명칭
램지는 이 명칭 이외에 남쪽 지역에 사는 여러 사람들에게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이론을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이 명칭은 조금도 인종적인 의미는 갖지 않으면서 그 행정구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을 잘 묘사해 주는 명칭이라고 했다 더욱이 남부인들은 로마 시민권과 관련시켜 그 명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⑥ 사도행전 16:6절의 분사에 대한 다른 해석
에스위드는 이 구절의 분사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통과한 직후의 금지사항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다른 사례들을 인용하여 적절히 입증해 주었다.
⑦ 바나바에 대한 언급
갈 2장에 세 번이나 바나바의 이름이 언급되었다.(1,9,13절) 이것은 바나바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인 경우 그 교회들이 남쪽에 있는 교회 일 때 더욱 자연스럽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바나바가 바울과 동행한 것은 다만 제1차 전도여행 때였다.
⑧ 북부 갈라디아에서 온 구제 헌금의 모금 대표자가 없었다는 점
행 20:4 이하에서 바울 일행에 대한 언급은 둘 다 남 갈라디아에서 온 더배 사람 가이오와 루스드라에서 온 디모데였다. 그러나 북 갈라디아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가 이 구제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고전 16:1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가이오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의 대표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디모데가 이 교회를 대표한다고 보는 것이 매우 적절할 것이다. 분명히 고린도나 빌립보에서 온 대표에 관한 언급은 없다.
⑨ 갈라디아에 기록되어 있는 부수적인 내용들
갈 4:14절의 하나님의 천사는 아마 행 14:12의 간접적인 암시일 것이다. 또 주 에수의 흔적이란 표현은 돌로 맞는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남부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이 서신의 수신자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갈 2:5절은 예루살렘에서 할례 문제로 바울이 고전 분투한 것이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을 설립한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고"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암시해준다.
⑩ 유대 기독교인들의 활동
갈라디아서는 교회를 교란시키는 자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과 규례들을 지킬 것을 강요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활동이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보여주는 가설이 더욱 호평을 받았고 또 그 같은 가설은 남부 갈라디아설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은 북부와 같은 외진 지역보다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같은 여러 지역으로 바울을 미행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도행전은 그러한 유대주의자들이 남쪽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또 그들의 활동이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북부 갈라디아설과 남부 갈라디아설을 소개하였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신빙성이 있으며, 정확한 걸일까? 이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배경과 연대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그래도 부루스가 강력히 주장한 데로 남부 갈라디아설이 저울추가 조금 기울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더구나 사도행전에 보면, 남부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 이른바 북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바울 시대를 두고 말한다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바울이 여행한 것도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거기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더더구나 알지 못하고, 이런 이유들로 잠정적으로 남부 갈라디아설을 받아 들일수밖에 없다.
4) 기록된 시기와 장소
이 문제는 그렇게 쉽게 간단히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매우 복잡하다. 아울러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는 수신지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다. 그러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북부 갈라디아설에 따른 저작 연대
북부 갈라디아설의 입장에서는 이 서신이 매우 늦은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맨 먼저 제안된 저작 연대는 에베소 전도 사역 초기이다. 주로 갈 1:6의 타게오스라는 단어에 의해 갈라디아서가 바울이 방문한 직후에 신속하게 써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작 연대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직후에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라이트푸트는 갈라디아서가 로마서보다 먼저 써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같은 문제에 대해 로마서가 원숙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갈라디아서는 고린도 전후서가 기록된 후에 써졌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고린도서에는 유대인과의 논쟁에 관한 암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트푸트는 이 서신을 제3차 전도여행 말기에 고린도에 보낸 서신으로 보았다.
(2) 남부 갈라디아설에 따른 저작 연대
남부 갈라디아설은 이 서신이 일찍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본다. 남부 갈라디아설은 갈 4:13에 나오는 두 차례의 갈라디아 빙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저작설이 생긴다. 먼저 두 번째의 방문이 행 16:6절에 언급된 것과 일치한다면,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공회 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두 번째 방문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가는 길에 남쪽의 여러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방문했던 때인 행 14:21절에 언급된 사실과 일치한다면 저작 연대는 예루살렘 공회 이전으로 결국 AD 49년 경이될 것이다. 또한 갈라디아서 4:13절이 단지 한 번만의 방문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바른 저작 연대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이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언급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주의 깊게 고찰해 봄으로서 결정할 수 있다.
(3) 예루살렘 방문
여기에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먼저 견해는 갈라디아서의 2:1-10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 방문이었다는 견해이다. 이는 전통적인 견해로서 두 방문 간에 유사한 점들이 있다는 주장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사도행전이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자문을 구하고 있다. 또 두 경우 모두 그들은 강한 저항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유사점들은 남부 갈라디아서를 지지하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의 항의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북부 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 15장과 갈 2장의 내용을 같은 내용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분명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갈 2:1절의 "다시"라는 말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고, 더구나 갈 2장과 행 15장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한층 더 난점은 베드로와 바울 간의 논쟁이다. 그래서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갈 2장과 행 15장은 동일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갈 2:1-10이 사도행전 11:30절에 나오는 방문과 같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최근에 광범한 지지를 받는다. 갈 2:1절은 문자적으로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 견해는 갈라디아서에 예루살렘 공회의 법령들이 생략되어 있는 점에서 생기는 문제도 얼마든지 해결해 준다. 더욱이 안디옥 사건이 예루살렘 공회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라면, 베드로의 외식 행위의 책임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와 같은 가설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다.
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유대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듣고, 교회는 교회를 돕기 위해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 문제를 결정했다.
② 디도가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있었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제에 관한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③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바울을 무 할례자들의 사도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임무를 부여해 주었다.
④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함께 교제할 것을 권면하였다.
⑤ 베드로의 외식 사건 직후에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전도사역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⑥ 바울과 바나바의 지도를 받는 안디옥 교회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익명의 여러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대표자로 보냈다. 그래서 그 결정을 위한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주장들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공회가 소집되기 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오기 전에 보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도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그 시기를 대강 결정할 수밖에 없다. 첫째 이 서신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회가 있는 후에 기록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예루살렘 공회는 바울이 회심한 지 약 14-17년 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예루살렘 공회 연대는 AD48년이나 49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한 연대는 아무리 이르게 잡더라도 AD48년 이전이 될 수 없다. 둘째로 예루살렘 공회가 있는 다음에 베드로는 안디옥을 방문하였고, 이 방문 기간 중에 베드로는 바울로부터 면책을 받았다(갈 2:11-14)고 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앞서 말한 것보다 다소 이른 시기가 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섰을 당시 그는 자유의 몸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한 연대를 아무리 늦게 잡더라도 그가 이 자유를 잃은 이후는 될 수 없다. 그런데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그는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던 기간 중에 체포되었다. 이와 같이 보았을 때 최고 추정 연대와 최신 추정 연대 사이에는 8-9년의 기간이 게재된다. 바로 이 기간 중에 바울은 두 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였고, 이 기간 중에 아마도 본서 신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가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첫째는 사도행전 18:1-7절의 시기 다시 말해서 데살로니가 전서가 기록되기 전후에 고린도에서, 둘째는 사도행전 18:22절의 시기, 즉 안디옥에서, 셋째는 행 19장의 시기에 에베소에서 혹은 넷째로 행 20:1-3의 시기에 마게도냐나 아가야에서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 오랫동안 머무른 것을 참작해 볼 때 본서는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5) 주제 및 특징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은혜에 의한 구원을 뜻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사도의 가장 큰 염려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유일하고 참된 복음을 붙잡히는 일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한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모른다. 그 복음의 진수는 "사람이 의롭게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을 줄 아노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의 대 주제는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복음을 그 훼방자에 대항하여,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로마서의 주제이기도 한다. 그 장편의 서신과 이 단편 서신 사이에는 유사점들이 있다. 그런 반면 상이점도 있다. 로마서는 종요하고 장엄하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모든 죄인을 위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완전하고 값없는 구원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조용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때로 맹렬한 어조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그 훼방자들에 대항하여, 옹호하고 있다. 그 훼방자들에 대한 본 서신의 징계는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 수신자들은 훼방자들에게 귀가 솔깃하여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사도의 질책들은 준열한 것이며, 동시에 대조법을 따른 것인데 이것이 바로 본 서신의 특징이다. 아울러 본 서신은 거짓된 교리를 강하게 논박하는 성격을 띠고 있으며, 바울 서신들 중 고린도후서와 더불어 바울의 자서전적 특징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관한 핵심적 내용이 되는 율법과 복음의 의미와 그 관계를 명쾌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관한 교리와 더불어 신앙의 실천적인 면에 말하고 있는 올바른 기독교 윤리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본서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역사적인 배경
A.D 50년을 전후한 약 10여 년간의 초기 교회는 가끔 교리적인 큰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복음이 주로 유대인에 의하여 유대인에게 전파되었을 때는 교회가 평탄하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신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뿌리박기 시작하자 그리스도인과 모세의 율법 및 이미 하나의 제도가 되어 버린 유대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과 유대교의 특수한 전통과의 관계를 개의치 않고 교회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그 문을 열어 놓았던가? 교회의 범주를 모든 인류를 포옹할 만큼, 넓혔던가? 아니면, 교회는 단지 유대교를 이방 세계에로 확장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보다 자세히 말해서 이방인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었는가? 이방인 신자는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 토양에 정착했던 모든 곳에서 즉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점차 강력한 힘을 가지고 대두되었다.
갈라디아서는 소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있었던 이러한 형태의 갈등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갈라디아서는 또한 그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어떻게 토론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같이 식사하는 것이 옳았는가? 또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었을까? 유대 전통이 선언했듯이 전통 유대인은 이러한 교제로 말미암아 더럽혀졌는가? 혹은 그렇지 않았는가? 얼마 동안 이러한 토론은 기독교의 통일성과 은혜를 전해주는 복음의 존속을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거의 혼자서 이러한 추세를 반대하고, 그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고 그 해결을 위한 바울의 안건이 지지를 받았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인 바울은 비 유대사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 율법에 합당한가 하는 문제들을 일부러 제시하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두 번에 걸친 설교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렇게 했다. 사도바울은 이 지역에서 오직 복음만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나 바울은 얼마 후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전에 그렇게도 잘 받아들였던 복음을 이제 막 저버리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율법화 주의자들인 유대교의 교사들이 그곳으로 왔다. 그들은 주의 형제 야고보가 보냈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이 교리상으로 잘못되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 아래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 한분만으로는 부족하고, 모세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소식을 듣자 바울은 의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버려두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것이 되고, 기독교의 특성을 상실하게 되고, 유대교 가운데 하난의 소종파가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화주의를 책망하고, 갈라디아 교회들을 되찾기 위해 이 서신을 쓴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도 권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답변하기를, 자기의 가르침이 다른 인간적인 권위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히 해준다는 점과, 때때로 다른 사도들이 그를 만났을 때마다, 그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며, 그는 베드로와 바나바까지도 포함한 다른 사도들이 가기를 주저했던 안디옥에 견고하게 머물러 있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또 그들은 대적하기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하여 바울은 문제는 누가 율법을 지키고, 누가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는 데 기초가 되는 진정한 근거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 근거로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다.
끝으로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방종하는 생활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그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결코 성도들을 율법에서 꾀어 내 무가치한 것으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도를 예수께로 인도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모습으로 그 성도 안에 거하시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성품을 그에게 주신다. 이러한 변화는 내적인 것이다.
3. 저술 목적
이 부분도 수신자에 따라서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남부 갈라디아설은 말하기를, 복음의 자유로부터 재빨리 이탈하는 갈라디아인들의 행위가 바울을 크게 자극했다. 바울은 공식적인 인사말이나, 감사를 표하지 않고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 또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특수하고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바울은 장차 교회사에 그리스도인의 자유헌장이 될 소중한 내용을 제시해 주었다.
북부 갈라디아설은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에 대해 약간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여러 갈라디아 교회들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규례를 받았으나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들로부터 은혜를 빼앗아 가는 것을 분명히 허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서신의 저작 연대가 예루살렘 공회 이후일 경우 그와 같은 가설은 남 갈라디아설에서 필요하게 된다.
아무튼, 유대주의자들의 술책은 바울 사도를 불신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주된 내용을 다루기 전에 자기를 넘어뜨리려는 여러 비난들에 대해 길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세례를 받았고, 성령도 체험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본래 이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들이 전에 신봉했던 율법적 의식을 결합시킨 형태로 복음을 재구성하기 쉬운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율법주의를 강조하였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대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파급된 유대주의 선동가들의 해독을 제거하고, 나아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재 강조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이 순전한 신앙을 되찾기 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 기회에 자신을 비난하며,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서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이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임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기와 목적 속에서 본 서신을 저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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