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산상 수훈] “긍휼히 여기는 자”(마5:7)

체데크 2020. 5. 2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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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을 방문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팔복 중에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마5:7)

 

명제: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받는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은 형제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대로 인생을 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도 긍휼히 여기면서 인생을 살 때에 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구원받았다고 내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성화의 삶을 살아갈 것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주님께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만 받았다고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행동해야 할 지침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이 있을 수도 있고 어려운 환경이 나를 괴롭힐 때도 있습니다. 이런 고통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합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λαμβανω(람바노 2983) 담당하다, 취하다, 감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의 분량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담당의 몫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기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셔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 하고 명예의 자리에만 있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구원받은 백성들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짐이 나에게도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의 짐이 언제 있습니까? 바로 지금 현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십자가의 짐을 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감당할 십자가의 짐을 주셔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십자가의 짐이 없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나를 따르지’ ακολουθεω(아콜루데오 190) 따르다, 따라가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κελευθος(켈류도스) 길,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때 당시에는 엄청난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 법으로서 십자가를 자신이 메고 올라가 자신이 메고 온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수치이면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형을 받으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주님의 불명예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주님 때문에 수치당하고 고통당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똑같은 길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주님을 온전히 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의 삶을 포기하고 방종주의에 빠져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데 이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ελεημων(엘레에몬 1655) 자비로운 긍휼이 많은,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ελεεω(엘레에오 1653) 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긍휼은 육적인 것을 도와주는 긍휼도 있지만 영적인 것을 도와주는 긍휼도 있습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보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아직도 주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11: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있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셔서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긍휼을 입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선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긍휼을 입었는지라’ ελεεω(엘레에오 1653) 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선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하고 죄악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을 때에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가 실제적으로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죄악의 고통의 삶에서 살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와 긍휼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믿게 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서 명예와 부와 능력과 권세가 있어서 잘 나간다고 해도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의 긍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자들이 이런 긍휼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은 내가 받기 싫다고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아직도 모르는 자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을 형제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나만 영적으로 살아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형제들에게 내가 받았던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을 전파하라고 나를 먼저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전파하다 보면 시련이 올 수도 있고 핍박이 올 수도 있습니다. 빛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함을 전해주면 이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רחם(라함 7356) 사랑하는 마음, 태, 불쌍히 여김, 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관점에서 긍휼은 엄마의 태속에 아이가 있으므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아이를 위하여 온 정성을 쏟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들을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보살펴주고 주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를 도와주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장사를 하고 남은 음식이나 과일들을 문을 닫기 전에 가게 앞에 놓아두면 가난한 자들이 이 물건을 가지고 가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를 긍휼히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법칙을 깨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왕상3:26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이 말씀은 솔로몬이 두 여자의 아이를 놓고 재판하는 과정입니다.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실수로 죽이고 나서 옆에 있던 아이와 바꿔치기했습니다.. 이것을 안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가 혼비백산하여 아이를 달라하니 아이를 바꿔치기 한 여인이 자신의 아이라고 함으로 솔로몬 앞에서 재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솔로몬은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니 칼로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서로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때에 진짜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가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이며 당황스럽고 놀랐겠습니까?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단어가 רחם(라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이지 마시고 상대 여자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훔쳐간 여인의 입에서는 아이를 죽여서 내 것도 되지 말고 상대의 여인의 아이도 되지 말게 죽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내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짜 부모이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마음이 애끓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진정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들은 어떻습니까? 내 것도 되지 말게 하고 예수님 것도 되지 말게 하라고 말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래도 저래도 손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훔쳐간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손해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여도 그만 안 죽여도 그만입니다. 안 죽이면 자신의 아들이 될 것이며 죽인다고 해도 별로 손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죽이신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남을 위하여 죽이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마음도 불타오르는데 예수님을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고 있는 이 마음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에게 얼마 큼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위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일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는 백 데나리온의 빚 진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아직도 죄악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긍휼의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자체가 긍휼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긍휼을 선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마른 자”(마5:6)

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팔복 중에 의에 목마른 자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마른 자”(마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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