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신약의 팔복 중에서 온유한 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온유한 자를 헬레니즘 관점보다는 헤브라이즘 관점에서 보면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마5:5)
♣명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게 된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씀하시고 나서 애통하는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애통하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적인 삶을 위해서는 애통해 하지만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애통해하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해 애통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눈을 돌리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들도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헬라어로 온유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온유한’ πραυς(프라위스 4239)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동물에 관하여 사용할 때에는 길들일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온순하지 못한 짐승을 고삐를 매어 온순하게 만들어서 주인의 말을 잘 들을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사용할 때에는 화를 내지 않고 매정하지 않으면서 온유하고 온순한 사람을 말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온유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얌전하면서 말이 적고 남 앞에 서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능력이 있고 얼마든지 남 앞에 설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못한다고 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온유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헬레니즘 사상의 온유입니다. 사람에 바탕을 두고 말하는 온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겸손하게 있는 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온유입니다.
이제는 히브리적 개념의 온유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온유를 하나님의 사상으로 깨닫지 못하면 온유의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ענו(아나브 6035) 겸손한 자, 온유한 자, 가련한 자,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נה(아나 6031) 고난당하다, 괴로워하다, 욕보이다, 학대받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상대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을 위해 고난을 당할 때에 이것이 겸손한 자이며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과부나 고아를 이유 없이 해롭게 하거나 괴롭히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롭게 하지’ ענה(아나 6031)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고아나 과부는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아나 과부에게 절대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재력과 힘과 능력을 가지고 힘없는 고아나 과부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손해를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 한마디로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고 육체에 고통을 주지 말며 재산을 함부로 탈취하는 이런 일들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당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고아나 과부를 괴롭히면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헤브라이즘 개념의 온유는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이것이 온유입니다. 또한 이것이 겸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어 안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온유라는 단어가 ענו(아나브)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을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지만 선택받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학대받고 모욕을 당하므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이렇게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아무 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온유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온유하다는 것은 자신은 손해 볼 필요가 없지만 남을 위해 손해를 보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겸손이며 온유입니다. 내가 당연히 능력이 있어서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지만 내가 자신의 몸을 낮춘다고 생각하여 남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온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 남을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면 이것이 온유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을 섬기다가 손해를 보고 박해를 받았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민12:1-3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을 때에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 너하고만 말씀하시더냐! 미리암과 아론하고도 말씀하시지 않더냐! 라고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기록하기를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유하다는 단어가 ענו(아나브)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구스 여인을 취한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러나 미리암과 아론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모세를 비방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친족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서 광야의 40년 생활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면서 온유한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는 인생은 온유한 자가 아닙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런 자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업으로 받을’ κληρονομεω(클레로노메오 2816) 상속하다, 유업으로 받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이 세상의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온순하고 겸손한 자는 이 땅을 기업으로 상속을 받아 누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온순하며 아버지의 말을 잘 들으면 이 세상의 땅을 상속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도 많은 상속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말을 잘 들으면 얼마나 많은 상속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히브리적 개념의 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땅을 팔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 나봇입니다.
시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여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리로다’ ענג(아나그 6026) 즐거워하다, 기뻐하다, 라는 뜻입니다. 온유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땅을 차지하게 하셔서 풍성한 화평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자신에게 돌아온 땅을 차지하게 되는데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대 빼앗기지 않으며 기쁨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기뻐하면서 이 땅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 땅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땅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온유한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땅은 사라졌습니다. 이 땅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의 땅을 상속받기 위하여 고생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이 세상의 땅이라면 결국 완전하게 없어질 것에 힘을 쏟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 세상의 새로운 땅을 위해 인생을 투자할 때에 영원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없어졌고’ παρερχομαι(파렐코마이 3928) 없어지다, 버리다, 라는 뜻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기게 되니 이전 땅은 완전하게 사라지고 더 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처음 땅이 사라지게 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버리시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이 땅도 모두 부패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가는 땅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시키시고 새로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땅을 상속받기 위하여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주님이 나에게 주신 상속받을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기 위하여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는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헌신하고 손해 보는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땅을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땅’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ארץ(에레츠 776) 땅, 세계, 영토, 라는 뜻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게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영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레츠’의 히브리적 의미는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포수가 사냥하듯이 구원받은 백성들을 포획하여 하나님의 땅을 상속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서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부터는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원한 땅을 상속받아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주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땅을 상속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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