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애통하는 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나누고자 합니다.
“애통하는 자”(마5:4)
♣명제: 심령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목적: 죄에 애통하는 자는 주님의 위로함을 받는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주시면서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속죄의 평강을 얻고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복으로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애통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애통을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지고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마음에 애통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한 마음에 위로를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πενθεω(펜데오 3996) 슬퍼하다, 근심하다, 한탄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ασχω(파스코 3958) 경험하다, 고난 받다, 괴로움을 받다, 상하다, 환난 당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외부적인 영향을 받아 내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환경에 의하여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악한 영향을 받아 괴롭힘을 받아 경험으로 체험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육적인 고난과 슬픔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영적인 애통과 고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의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가족 간의 사별을 통하여 슬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여 근심하며 슬퍼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은 외형적인 것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형적인 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9: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한 금식 일에 왜 너희 제자들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 일에는 애통해하면서 회개하고 옷을 찢고 경건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먹고 즐거워하고 있으니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바리새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슬퍼할 수 있느냐라는 단어가 πενθεω(펜데오)입니다.
그럼 우리가 언제 애통해해야 합니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졌을 때에 애통해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사라지고 기도의 응답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옷을 찢어가며 회개하고 애통해하며 슬퍼하고 한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를 해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애통이 언제 일어나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 나에게 이런 애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슬퍼할 일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적인 고통으로 인한 슬픔으로 인해 마음에 애끓는 고통이 일어나고 있는데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애끓는 한탄과 애통과 고통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재 우리는 애통함을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육신적인 애통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현재 물질이 들어오지 않아 애통해하고 고민하고 한탄하고 있습니까? 질병의 고통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명예를 얻어야 하는데 이런 세상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져 애통해 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을 애통해하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애통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단절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와 멀어진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영적으로 주님과 단절되어 구원의 확신도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내 영혼을 위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세상의 환란을 위해서는 한탄하고 괴로워하면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절대 슬퍼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이런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들은 절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세상이 주는 위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없다면 이 시간 빨리 애통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애통하다는 단어는 אבל(아벨 57) 슬퍼하는, 번뇌하는, 애곡 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애곡 하는 단어입니다. 가슴에 너무나 큰 상처가 있음으로 번뇌하고 애곡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스마엘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고 나서 죽은 것처럼 속여 자신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피 묻은 요셉의 채색 옷을 보여준 후에 야곱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위로를 받지 못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스올로 내려가 자신의 아들에게 갈 것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슬퍼하고 있는데 이 단어가 אבל(아벨)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극한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극한의 슬픔이 오면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사람의 위로는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애통해하고 슬퍼하고 극한의 고통을 느끼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마음에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더 좋아했으며 조롱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절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십자가에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마음에 자신의 자녀를 잃은 슬픔처럼 뼈저린 고통이 임하고 있습니까? 이런 자들이 정말 애통해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육체의 고통에 대하여는 애통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는 애끓는 슬픔과 비탄에 빠진 신앙생활을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육적인 가족의 죽음은 슬퍼하지만 정작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별 신경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의 죽음이 너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이런 애통함이 너에게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죄악 가운데 죽어있을 때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애통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애통해하고 주님의 죽음에 관하여 슬퍼하며 비탄하는 자들은 어떤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을’ παρακαλεω(파라칼레오 3870) 위로받다, 간구하다, 간청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αρα(파라 3844) ~곁에, ~가까이, ~와 함께, 라는 뜻과 καλεω(칼레오 2564) 부르다, 청함을 받다, 부르심을 입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애통해하는 자가 위로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주님의 곁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죽음에서 고통스럽게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죄악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입니다. 고아가 부모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하루하루 어떻게 생활을 할 것인지 앞길이 막막할 때에 이 고아를 불쌍히 여겨서 자신의 아들로 불러 자녀 삼아주신 것이 바로 애통함에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면 나는 하늘로부터 다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곁에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위로는 아무나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아니면 절대 위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위로를 받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주님 곁에 있으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의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우리에게 끼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고 말씀합니다. 속죄의 평강이며 주님 안에서의 위로이며 위안인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과 곁에 있으면 마음에 근심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부모도 없는 고아의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안식도 없고 평강도 없었습니다. 인생의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항상 내 곁에 함께 있으니 이제는 어떤 문제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보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슬프고 힘들어도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위로는 נחם(나함 5162) 위로받다, 회개하다, 한탄하다, 후회하다, 보응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나의 죄를 미워하고 내가 죄악 된 생활에서 살았던 삶을 한탄하고 후회하여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노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후회하고 한탄하게 했던 일들을 사용할 때도 쓰던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한탄이 있었으면 마음에 후회까지 들어올까요? 그래서 사람을 홍수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회개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니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내가 받기 싫다고 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기 싫다고 해도 회개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들어 주셔서 나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죄악의 자리에 앉지도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죄악으로 고통당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고통의 재를 뒤집어쓰는 것을 대신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에 엄청난 슬픔을 기쁨의 기름으로 대신하게 해 주시고 근심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통한 자들이 위로를 받는데 이제부터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에 애통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애통은 나의 육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애통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영적인 것을 가지고 애통해할 때에 하나님은 마음에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적 욕심을 가지고 애통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애통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없을 때에 애통해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떠났다면 내 마음에 슬퍼하고 비통해하며 주님이 내 안에 오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주님이 다신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마음만 슬프다고 애통이 아닙니다. 문제가 많다고 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애통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죽으신 그 고통을 내 마음에도 기억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사건을 놓고 마음에 뼈저리게 슬퍼하며 비통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까? 나의 부모나 자식을 놓고는 애통해하며 고민을 했을 때가 있지만 나의 영혼을 책임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사건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애통의 정의를 바꾸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나의 명예가 사라졌을 때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사라졌을 때에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망했을 때에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애통은 나의 영혼이 죽었을 때에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에 애통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사라졌을 때에 애통해야 합니다. 이런 애통을 할 때에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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