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6장 신약 히브리어 주석 강해 중에서 스데반 집사의 사역과 체포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스데반 집사와 논쟁을 했지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공회에 서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려고 거짓 증인을 세우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세벨의 미혹에 넘어가 나봇을 죽이기 위해서 거짓 증인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악한 무리는 성도를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도 항상 복음에 깨어 있어서 거짓 증거 하는 자들의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도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의 사역과 체포(행 6:8-15)
행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6: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은 교회의 구제하는 일을 책임 맡은 자로서 근면 성실하게 책임을 감당하였다. 또한 그 문제를 훌륭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진력하는 고로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었다. 본문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그는 비범한 은사를 지닌 자였고 따라서 더 높은 직책을 맡는 것이 합당하였지만 집사직으로 불림을 받게 되자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같이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더욱 큰 것이 주어졌다. 우리는 그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줌으로 복음을 보급했다는 것은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가 본문에서 매우 명예스러운 직무를 수행하며 그 직책을 잘 감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고 했는데 말레라는 단어로서 칼 능동태 완료 시제를 사용한다. 은혜와 권능이 완료로 꽉 채워져 있다는 의미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내 안에 가득 채워져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함으로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였다(8절).
1. 그는 믿음과 능력이 충만하였다. 즉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이 믿음으로 그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다. 믿음이 충만한 자들은 능력도 충만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충만하였으므로 그에게 불신의 여지가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예언자들이 말하던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충만하였다(막 3:8).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시다."
2. 그러므로 그는 "큰 기사와 기적을 민간에" 즉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의 앞에서 행하였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그 기적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정밀한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비록 직책상 전도자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큰 기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적들은 명백한 성령의 은사였기 때문이다. 은사는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이 주어졌다(고전 12:10, 11). 그리고 이러한 표적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에게도 주어진다"(막 16:17).
행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그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변호하였고 기독교를 반박하는 일에 대하여 반론을 전개하였다(9,10절). 그는 고지에 선 논쟁자로서 복음을 옹호하였고 한편 다른 이들은 청지기나 하인처럼 그들의 들러리만 섰을 뿐이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게 하니 반대하는 자들이 이길 수가 없었다. 칼 능동태 완료 시제를 사용하니 절대 이기지 못했음을 말한다.
1. 본문은 그의 적들이 누구였는지를 말해 준다(9절). 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 즉 흩어진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이 본토 유대인들보다 그들 신앙에 더욱 열성인 것같이 보인다. 그들이 그들의 사는 낯선 땅에서 그들의 신앙을 행하고 고백하는 것을 유지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몇 마리의 참새떼 같은 처지였다. 또한 예루살렘을 계속 방문하는 데는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쉽고 값싸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더욱 유대주의를 철저히 고수하게 하였다. 그들은 "리버리노" 회당이라고 불리는 회당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로마인들은 "리버티(Liberti) 또는 리버디니(Libertini)라고 불렸다. 이들은 외국인으로서 로마에 귀화하였거나 노예로 태어나 석방되었거나 자유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리버디노인들이 바울처럼 로마의 시민권을 얻은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22:27, 28). 바울은 스데반과 논쟁하는 리버디노 회당에 속한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들까지 논쟁에 끌어들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스데반을 돌로 치고 그의 죽음을 허용하는 등의 일로 분주함을 보게 된다. 또한 구레네인과 알렉산드리아인의 회당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 회당에 대해서는 유대 저술가들도 말해 준다. 또 길리기아와 아시아의 회당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만일 로마의 시민으로서 바울이 리버디노인의 회당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는 길리기아의 한 도시인 다소 출신으로써 길리기아 회당에 속하였으리라. 어쩌면 그가 두 곳에 다 회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 출생하고 조국을 염두에 두고 살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자주 갔을 뿐만 아니라 거기 거하기도 하였다. 각 나라마다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런던에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교회가 있었던 것과 같다. 이러한 회당들은 이들 나라에 거하는 유대인들이 유대 학문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려고 보내는 학교였다. 이제 이들 회당의 교사들과 신앙인들은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보고 또 관리들이 그 성장을 묵인하자 곱음이 유대 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의 운동의 선함이 사람들이 신뢰를 받고 또한 사도들이 스스로 문제를 잘 다스려 나가자 질투를 느꼈다. 그러므로 그들은 논변의 힘으로 기독교를 붕괴시키려고 착수했던 것이다. 논변으로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며 어떤 종교이건 논쟁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소송을 일으키라……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모이라"(사 14:21). 그런데 왜 그들은 사도들과 논쟁하지 않고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는가?
(1)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무식하고 몰상식한 자들로 경멸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상종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스데반은 학자로 성장하였으므로 그들의 적수로 삼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다고 본다.
(2) 다른 이는 그들이 사도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었던 스데반에게 대하는 것처럼 사도들에게는 자유스럽고 또 마구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3) 내 의견으로는 아마도 제자들은 공식적인 도전을 받은 것 같다. 그러자 제자들은 스데반을 그들의 대변자로서 선택 임명하였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논쟁에 참여하는 것을 합당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교회의 집사였고 매우 날카로운 젊은 이로 다방면으로 재주가 있었기에 사도들보다는 논쟁하는 데 더 자질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스데반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랐고 그가 개종하자 사울과 그 문하생들이 그를 탈선자로 간주하였고 특별한 증오심을 갖고 그를 대하였다고 한다.
(4) 또 그들이 스데반과 논쟁한 것은 그가 열성적으로 그들과 논쟁을 전개하였으며 그들에게 확신을 주려했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었던 사명이었다.
행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우리는 그가 논쟁을 통하여 얼마나 요령 있게 논리를 전개하였는가를 볼 수 있다(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감당치 못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논증하지도 못하였고 그의 말에 답변하지도 못했다. 그는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논조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였고 명쾌하고도 완벽하게 자신의 뜻을 나타냈으므로 그가 말한 데 대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설득당하여 신앙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혼란을 느꼈다. 그들이 그에게 항거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지 않고 그들이 "그가 성령과 지혜로 말함을 능히 당치 못하였다" 했다. 즉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지혜의 성령이 말씀하였던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약속이 성취되었다(눅 21:15). 그들은 스데반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그들 편에 유리한 입장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과 쟁변 하였고 이 성령은 결코 그들에게는 상대가 안 되는 적수였다. 스데반을 잡기 위해서 사람들을 매수했다고 했는데 (5496, 수트) 선동하다, 충동하다, 꾀다, 유인하다라는 뜻이다. 히필 사역능동을 사용했다. 이것은 스데반을 잡아서 죽이려고 유인했음을 말한다.
결국 그는 그의 피로써 복음을 굳건하게 하였는데 다음 장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의 적들이 복음에 대하여 취한 몇 개의 단계적 조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논쟁으로서는 그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그를 범인으로 기소하였고 그를 대항하여 거짓 증인을 세우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본문에 대해 박스터씨(Mr. Bax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는 적개심을 지닌 사람들과 변론한다. 그러면서도 상당수의 종교인들이 법이란 미명 하에 세계 도처에서 살해당하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기적의 섭리이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거짓 서원하는 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사람들을 시켜 거짓 증거 하게 하였다. 즉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지시하였고 또 그들을 시켜 말한 바를 서원하게 하였다. 스데반이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됨을 입증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더욱 격분하였다. 실상 그들은 그의 이런 지적에 대해서 최대로 사의를 표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그들의 적이 된 것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하였기 때문이요." 또 그 사실을 합증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제부터 그에 대한 그들의 획책을 고찰해 보자.
행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 그들은 가능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정부와 군중이 같이 그를 향하여 노를 발하도록 충동하였다. 만일 한 가지 수단으로 이길 수 없다면 다른 수단을 쓰려고 했던 것이다(12절). "그들이 백성들을 충동하여" 즉 그들은 산헤드린 회의가(가말리엘의 충고에 따라서) 스데반을 내버려 두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긴다면 그들은 그를 군중의 격분과 소요에 의해 처치하려 했다. 그들은 또한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선동함으로 해서 백성들이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그를 보호한다면 그들은 권력으로 그를 제압하려 하였다. 그들은 두 개의 화살로 겨냥하였기에 그들이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2. 그들은 그를 법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그가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다가와 그를 잡아 공회로 끌어갔다."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와 말 그대로 사자가 그의 먹이에게 덮쳐들 듯이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그를 횡포하게 다루므로 백성과 정부에게 그를 위험한 인물로 부각하려 하였고 그를 경계하지 않으면 그가 피신할 것을 두려워했고 또 폭력을 씀으로 그의 기세를 꺾으려 하였다. 그를 사로잡자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그를 공회로 끌고 갔다. 이 모든 일이 순간적이었으므로 그의 동료들이 아무도 그와 함께 가지 못하였던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제자들을 한 번에 많이 사로잡아 오면 이들이 서로 격려하여 용기를 얻게 됨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제자들을 하나씩 처치하려고 노력하였다.
3. 그들은 그를 모함할 증거를 미리 준비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전에 주님을 심판하였을 때처럼 고소할 이유를 찾지 못하여 그때서야 증인을 구하였던 식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이 계획들은 사전에 준비된 것이었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거슬러 또한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서원하도록 일러두었다(11, 13절). 그들은 스데반이 예수께서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루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14절). 아마 그가 그러한 취지를 말하였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를 대항하여 이 사실에 대해 서약한 자들은 거짓 증인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들의 증언에 다소 사실과 부합되는 점이 있었다 해도 그들은 그가 말한 것을 근거로 이를 잘못되고 악랄하게 이용하고 사실을 곡해하였기 때문이었다.
행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 그에 대한 일괄적인 문책은 그가 모독적인 언사를 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모독적인 언사를 마지 아니하는도다"하고 말하여 더욱 문제를 악화시키려 하였다. "그가 무리들 앞에서 흔히 이런 말을 하노라. 그가 어느 곳에 가든지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그의 생각을 주입시키려고 몰두하였도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가 관명을 항거하고 경고를 멸시하였다고 한다. "그에게 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으나 그래도 쉬지 않고 말하여 지금에 이르렀도다." 신성모독(경멸조로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가장 극악한 죄로 취급되었다. 스데반에게 이런 죄를 씌움으로 반면에 사람들에게 자기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명예롭게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투기로 하였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용사들과 순교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약 시대의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싫어하고 추방하는 이들은 바로 그들의 형제였고 "주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말하는 자들이었다. 그가 "모세와 하나님에게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모세를 모독하는 자들은(만일 그들이 모세의 글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므로)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말은 어디까지나 옳다. 성서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를 경멸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크신 뜻은 율법을 존귀하게 하고 영광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을 비방하고 경멸하는 자들은 곧 그의 이름을 경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과연 스데반이 모세를 모독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전도자들은 결코 모세를 경멸하는 것과 같이 들리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경외하는 심정으로 그의 글을 인용하였고 그 말씀에 호소하였으며 모세가 말한 것이 이루리라는 것 밖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모세를 모독하였다는 고소는 부당한 것이었다.
행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그러나 이러한 고소가 어떻게 지지를 받고 입증되었는지를 알아보자.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이 기소의 근거로 삼은 것은 "그가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모독적인 언사를 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세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들의 고소는 증거가 요구되자 점차로 줄어들었다.
① 그가 "이 거룩한 곳을 모독하였다"라고 고소되었다. 어떤 이는 이곳이 곧 예루살렘을 말한 것이라 이해한다. 이 도시는 거룩한 도성이요, 그들이 열심히 사모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본문은 거룩한 집인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봄이 옳겠다. 그리스도는 성전을 연상케 하는 곳에 대하여 말한 모독자로 정죄당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성전을 모독하고서도 성전의 명예에 관심이 있는 척하려 하였다.
② 그는 율법을 모독하였다고 고소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으로 여겼고 율법을 신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율법을 거역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롬 2:23).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은 이 고소를 성립시켰는가? 앞서 고찰한 대로 다시 그들의 고소는 그 기반이 약화되었다. 그들이 이제 그에 대하여 고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도 논란이 대상이 되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라고 그가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어떻게 그가 말하게 되었고 무엇이라고 설명하였는가를 그들 자신이 근거를 댈 자신은 없었다). 그가 성전과 율법을 모욕하는 말을 하였다고 고소할 수는 없었다. 제사장들 자신이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도적의 굴혈로 만들므로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전에 대하여 어떤 실언도 하지 않았고 제사장들보다는 오히려 그 근본 취지에 따라서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받들었던 사은 제쳐놓고 자기들이 성전을 명예롭게 하는 데 열성인 것으로 여겨지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그들처럼 율법을 모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 사실을 말하였다.
첫째, 그는 "나사렛 예수가 이곳" 즉 성전 또는 예루살렘을 "파괴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곳이 실로처럼 영존하지 못할 것이요,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성전의 특권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그 특혜를 계속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성전에 대한 모독일 수 있는가? 예언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갈대아인들에 의해 그 거룩한 처소가 파멸될 것이라는 같은 경고를 하지 않았는가? 또한 성전이 처음 건축되었을 때 하나님 자신이 같은 경고를 하여 이르시기를 "이 전이 비록 높을 지라도 무릇 그리고 지나가는 자가 놀라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대하 7:21) 말하리라 하셨다. 만일 그가 모독자라면 누가 경고를 하겠는가? 누가 그들에게 그들이 계속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나사렛 예수께서 이 성전과 민족을 멸하실 것이라 경고하겠는가? 그들은 오히려 이 경고자에게 감사해야 옳지 않겠는가? 서로 상반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의 신앙에 대한 비난을 당하게 되면 그들은 그 비난을 모독적인 언사라 하여 상대방의 신앙을 악랄하게 헐뜯는 경우가 있다.
둘째, 그는 이 예수가 "모세가 우리에게 주어진 규례를 고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메시아의 날이 임하면 모세의 규례가 바뀌고 실체가 임하므로 그림자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율법을 멸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코자 오시었다." 그러므로 그가 모세에 의해 주어진 몇몇 규례를 고치겠다 함은 더 나은 규례를 소개하고 이를 확고히 세우려는 것이며 만일 유대인들이 이 새로운 율법을 완고하게 거부하지 않고 형식적인 율법을 추종하지 않았다면 내가 확신하기로는 그들의 성전이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파멸을 막으려고 그들이 지금 같은 생활을 버리지 않으면 파멸할 것이라고 예고하였으나 그는 모독자라고 고소당하였다.
행6:15 공중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섰을 때 어떻게 그를 보호하시며 그의 곁에 같이 서 계셨는가를 보여 주는 징조가 있었음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 즉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낯선 사람을 보듯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뜻밖에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보였다." 판사가 죄수의 안색을 살펴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때로 그것은 죄수가 죄가 있는지 무죄한 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 법정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이 사실은 그가 특별히 기쁘고 쾌활한 안색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일말의 어떤 두려움이나 노여움도 없었음을 알려 준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였으므로 소환되었고 순교의 면류관 앞에 당당히 섰다. 그는 지금 이상으로 기뻤던 적이 전에 결코 없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동요되지 않는 고요와 담대한 용기와 또한 부드러움과 위엄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의 얼굴 전체에 퍼져있었다. 그가 천사처럼 보인다고 누구나 다 말하였다. 사두개인들도 그들 앞에 인간의 모습을 입은 천사를 봄으로 천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정도였다.
또한 그의 얼굴에는 기적적인 밝은 광채가 어리고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 광경은 마치 우리 구세주께서 변형되셨을 때의 모습과 같았고 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의 모습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한 증언의 명예를 높이시며 그러므로 그를 박해하며 심판하는 자들을 당황케 하신다. 그것으로 그들의 죄는 더욱 무겁게 되며 빛을 거슬러 행함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기적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를 정죄하려 하였다. 스데반이 자기 얼굴의 피부가 빛난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없었다. 그러나 "공회 중에 앉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았다." 그들은 서로 소곤거리며 그 사실 상대방에게 전하였을 것이며 그것을 보고 분명히 수치를 느꼈을 것이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법정에 서있는 그를 죄수 석에 앉으라고 명하지도 못하였다. 지혜와 거룩함이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그렇지만 이 지혜와 거룩함이 사람들을 격화된 냉대 속에서 건져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얼굴의 광체가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그가 모세에게 치욕적인 죄를 저질렀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영광을 그에게 입혔을 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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