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9장 설교문 중에서 선택받은 자의 믿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선택받은 자의 믿음(마 9:20-22)
♣명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의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의 믿음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믿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금식에 대하여 논쟁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와 자신의 딸이 금방 죽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의 몸에 손만 얹어도 살아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관리의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접고 즉시 일어나 제자들과 관리를 따라나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혈루증을 12년 동안 앓던 여자가 관리의 집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겉옷 자락을 만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 병을 앓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을 탕진하였고 이미 부정한 자가 되어 세상에서는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연약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신 다는 소문이 혈루증을 앓던 여자에게도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겉옷을 붙잡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혈루증의 여인을 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도 이 여인처럼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았던 인생입니다. 혈루증을 앓으면서 부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던 여인처럼 나도 세상에서 죄악의 늪에 빠져 부정하게 된 채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부정한 자가 어떻게 당당하게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요? 이 시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혈루증의 여인이 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 9: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예수님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지나가실 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은 파격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고대 문화적 배경을 통해 볼 때 부정한 여인은 정결한 자를 함부로 만질 수도 없고 가까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레 13: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율법에서 나병에 걸려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면서 외쳐야 합니다. 자신은 부정하다 부정하다 이렇게 외쳐서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한 자들이 와서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는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피를 흘리는 부정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예수님께 나와 겉옷을 만지고 있습니다.
‘뒤로 와서’ נגש(나가쉬 5066) 가까이 가다, 접근하다, 달라붙다, 이끌어 오다, 라는 뜻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명의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의 평생소원은 혈루증을 고침 받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까이 접근하여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처럼 생각을 했지만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아시고 주님이 이 여인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이끌어내 주셨으며 예수님께로 달라붙을 정도로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여인은 절대 부정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정한 여인이 의로우신 예수님께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이 여인을 택정하시고 이 병을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께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의 뒤로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여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아시고 완전하게 고쳐주시기로 예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질병과 영혼의 구원 문제까지도 해결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겉옷’ בגד(베게드 899) 옷, 겉옷,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בגד(바가드 898) 배반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배반으로 속임으로 불성실하게 대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는 죄인의 모습으로 달리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겉옷은 혈루증 여인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죄도 예수님께서 미리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불성실 하게 대했으며 불순종한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회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영원히 죽어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이미 겉옷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를’ כנף(카나프 3671) 날개, 겉옷 자락, 광선,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כנף(카나프 3670) 덮다, 가리다, 숨기다, 은폐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붙잡았던 예수님의 겉옷 자락은 이미 이 여인의 모든 질병과 죄들을 예수님께서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질병을 덮어주시고 부정을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숨겨주셔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해주신 사건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모든 죄와 질병을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고 이 여인으로 하여금 믿음을 주셔서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능력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온 것입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비추리니’라는 단어가 똑같은 ‘카나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의로운 해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혈루증 여인에게 치료의 광선이 나간 것입니다.
그럼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겉옷 자락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겉옷 자락은 율법의 계명이며 율법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옷단 술을 말하고 있습니다.
(민 15: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셔서 그들의 겉옷에 술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고 했는데 이 의미는 유대인의 개념에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옷단 술은 율법이며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남자 중에 13세 이상이 되면 옷단 술을 달고 다녀야 합니다.
‘옷단 술’ ציצית(찌찌트 6734) 가장자리의 옷 술,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צוץ(추츠 6692) 빛나다, 꽃피다, 융성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옷단 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옷단 술과 같은 표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옷단 술을 일부러 길게 내려서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우월감에 있었기 때문에 했던 행동들입니다.
‘만지니’ נגע(나가 5060) 닿다, 이르다, 만지다, 라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단 술을 만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겉옷에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하는 옷단 술을 달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훌륭한 자의 옷단 술을 만지는 자는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때 당시의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단 술을 만지는 순간 즉시 피의 흐름이 멈추고 부정한 것이 예수님에게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움이 이 여인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겉옷을 만지는 것은 내가 만진 것인데 수동태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힘으로는 절대 만질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예수님의 옷단 술을 만지게 하셨기 때문에 만질 수가 있었고 만질 수 있는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만져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한 자들은 그 믿음까지도 주시고 예수님을 믿어 병을 고칠 수 있는 믿음도 주시고 죄악에서 구원받는 믿음도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믿을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병에서 놓임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아니면 이 혈루증 여인은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권능 속에 치료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이 여인은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ישע(야샤 3467) 자유롭게 되다, 해방되다, 보호되다, 구원받다, 라는 뜻입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마음에 믿음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여 주셔서 부정한 인생에서 자유로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고 죄악에서 해방되어 영원히 주님 안에서 보호받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 나온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 선택받고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며 구원도 하나님께서 수동태로 주셨기 때문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믿음이 대단해서 주님 앞에 나왔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나 큰 오산입니다. 나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부정한 자가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까? 작은 것에도 시험에 걸려 넘어지고 자신의 유익이 없으면 주님을 부인할 때가 얼마나 많고 불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무슨 나의 믿음이 크다고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하여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신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주님 앞에 나오면서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혈루증 여인을 알고 계셨고 그를 보시면서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ישע(야샤 3467) 해방하다, 석방하다, 보호하다, 유지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혈루증 여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영적인 죄악과 육신적인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더 이상 고통의 삶을 살지 않도록 완전하게 석방시켜 주셔서 계속적으로 주님의 은혜 안에서 보호함을 받고 더 이상 죄악과 질병이 다시 엄습하여 고통을 주지 않도록 의로운 상태로 유지시켜 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믿음이 커서 구원을 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구원받기로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이 여인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았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음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율법에는 주인의 허락 없이 옷단 술을 함부로 만지면 돌로 쳐서 죽이기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단 술을 허락도 없이 만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혈루증 여인은 평생 고민하던 병을 고침을 받았지만 율법에 적용되어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마음을 두렵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딸아!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그때 당시에 옷단 술의 주인인 자녀는 허락 없이 만져도 아무런 율법에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율법을 어기지도 않으시고 이 여인을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에 있지 않고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정죄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의 직분을 받아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혈루증 여인의 치료와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도 주님의 능력 가운데 혈루증과 같은 죄악 된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육신의 질병의 고통에 있다면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고 해방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미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고민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앞으로 나와 주님의 옷단 술을 만질 수 있는 믿음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혈루증 여인이 주님의 옷단 술을 붙잡고 구원받고 치료받은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옷단 술을 붙잡아 영원한 속죄의 은혜를 받고 지옥의 불 못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보호 안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영원한 속죄의 구원을 받았으니 주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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