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8장 설교문 중에서 진리 안에서의 왕 같은 자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진리 안에서의 왕 같은 자유”(요8:32)
♣명제: 진리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다.
♣목적: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자는 죄의 종에서 벗어나 자유 함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선택받은 아담을 그곳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고 생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나님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니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으셔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록 미혹하였습니다. 여자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죽었으며 이것을 아담에게도 주어 함께 먹고 죽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좋았던 관계는 하루아침에 깨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셨고 이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버리시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되어 죽음의 길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지 않으시면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온 자들은 모두가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신은 아담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였으매’ άμαρτανω(하마르타노 264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복수, 3인칭) 빗나가다, 잘못하다, 죄를 범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실수를 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하여 원죄와 자 범죄를 지은 것을 말씀합니다. 이 죄를 아담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으로 온 모든 인간들도 이 죄에 해당됩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도 아담이 죄를 지을 때에 함께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면 내가 열심히 의롭게 살면 아담의 죄와는 상관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아담의 죄 가운데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도 아담의 죄로 인하여 원죄 가운데 죽었던 것입니다.
‘이르지 못하더니’ ύστερεω(휘스테레오 5302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복수, 3인칭) 부족하다, 결핍되다, 궁핍하다, 제외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의 인간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부족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의는 모두 사라져서 영적으로 진리의 말씀도 먹지 못하는 궁핍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 된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니 궁핍하고 구원에서 제외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하지만 절대 나갈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없고 인간의 행위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죽을 때까지 에덴동산을 다시는 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하늘의 비밀인 천국을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는 나갈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담으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짐을 받으신 분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원죄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인 여자를 붙잡아 예수님 앞에 세우고 율법으로 정죄를 하려고 합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율법에 속한 자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아무도 여자를 돌로 치지 못하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나가지 못했지만 주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간음한 여자처럼 죄가 있었습니다. 영원히 원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나가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구원의 빛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양과 염소를 가르시기 위해서입니다. 선택한 자를 부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을 부르시는데 빛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빛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말에 거하면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으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은’ πιστευω(피스튜오 4100 동사, 분사, 완료, 능동태, 목적격, 남성, 복수) 믿다, 신뢰하다, 맡기다, 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빠졌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삶과 영혼을 주님께 맡기며 의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옮겨진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입니다. 이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을 구원자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분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율법의 공동체에서 복음의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로 나오면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것을 포기하고 영적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런 자의 대표가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입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에서 확고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누리고 있던 율법의 삶을 모두 버렸습니다. 분토처럼 여기고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믿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현재는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구원과 행위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만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필요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없이는 절대 한 명도 원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있는 나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예수님이 나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면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기를 바랍니다.
‘진리’ αληθεια(알레데이아 225) 진리, 사실, 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확고한 사실에 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온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변함이 없고 영원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진리는 אמת(에메트 571) 신실, 성실, 확실함,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개념에 진리도 확실한 사실에 관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이 사실은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진리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진리라는 단어를 만들 때에 세 가지 단어의 앞 자를 조합하여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이라는 단어입니다. אלהים(엘로힘 430)의 א(알레프)를 선택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왕이라는 단어인 מלך(멜렉크 4428)의 מ(멤)을 선택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영원이라는 단어인 תמיד(타미드 8548)의 ת(타브)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진리라는 단어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영원히 나와 함께 존재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진리를 깨달은 자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알레프는 첫 번째 글자이며 멤은 중간글자이고 타브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같은 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 바로 진리이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알지니’ γινωσκω(기노스코 1097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디포, 복수, 2인칭) 알다, 이해하다, 알아듣다, 확신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인 나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아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믿어지고 이해가 되고 마음에 확신이 들어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앞으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너희가 나에 관하여 알면 자유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깨닫고 믿으면 이렇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간 디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믿었더니 자유롭게 되는 은혜가 나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말씀하는 문법입니다.
그럼 히브리어의 개념은 어떨까요? ידע(야다 3045 동사, 칼, 완료, 남성, 2인칭, 복수) 동침하다, 깨닫다, 기억하다, 부끄럽다, 분별하다,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안다는 개념은 신랑과 신부가 동침하여 한 몸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신랑 되신 예수님과 내가 한 몸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받고 더 이상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옷을 입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가 들어온 것은 죄를 짓고 난 후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난 후부터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신부가 신랑과 한 몸이 되면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부끄럽다거나 수치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신부가 신랑 앞에서 수치심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불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들도 율법적인 신앙에 빠져서 신랑 앞에 서면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동침하여 내 신랑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절대 부끄럽거나 수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에덴동산이 회복된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리라’ ελευθεροω(엘류데로오 1659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단수, 3인칭) 자유롭게 하다, 해방하다, 인도하다, 구해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구원할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고 죄에서 해방시켜주신 일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나니 죄에서 자유롭게 해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어의 자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약을 히브리어를 통해서 정확하게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어는 좀 더 구체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함께 사용하면 더 깊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שום(숨 7760 동사, 칼, 미완료, 남성, 2인칭, 복수. 남성, 2인칭, 복수) 세우다, 두다, 정하다, 보존하다, 거주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구원의 자리에 세워주시고 천국에 구원받은 자로 정하여 주님과 거주하게 해 주셔서 영원히 보존하여 지켜주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은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구원받은 백성들은 영원히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신다는 것을 미완료 시제를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자유 함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히브리어에는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בן חר(벤 1121 호르 2715) 귀족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은 귀족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부터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왕족으로 이미 창세전에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엡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귀족의 아들로 창세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택하사’ εκλεγω(에클레고 1586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단수, 3인칭) 골라내다, 선택하다, 취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전에 나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취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골라내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자신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중간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귀족의 아들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았던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의 후손으로 왔기 때문에 죄악에 물들어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귀족의 아들로 살았던 나를 귀족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원래 나는 귀족의 아들이었는데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이 없다 보니 종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종의 삶을 살면서 고통과 괴로움에 인생이 찌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귀족의 아들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이제부터 너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고 율법의 종의 삶이 아닌 복음의 귀족의 아들로 된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종의 모습을 하나씩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았던 추악한 삶을 버리고 왕족처럼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종의 모습을 버리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왕족이기 때문에 왕 같은 제사장처럼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바로 성화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성화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과 같은 누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왕의 신분을 되찾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과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아가시면서 이제부터는 누리는 축복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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