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9장 설교문 중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마9:14-17)
우리는 금식하면 떠오르는 것이 나의 문제가 풀어지지 않았을 때에 금식하려고 합니다. 육체인 고민과 삶에 고통이 찾아왔을 때에 금식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그런 종류의 금식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금식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금식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무가내의 금식은 성경의 본질을 벗어난 금식이 되기 때문에 정확하게 성경적 개념의 금식을 깨닫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이 시간 깨닫기를 바랍니다.
마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 당시에 많은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일주일에 두 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에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이들은 율법적 행위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금식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전통에 묶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전통에 묶여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유대인들처럼 전통에 묶여있다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전통이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선이 될 때에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마9: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이 날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입니다. 신랑을 잃어버릴 때에 육적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지기 위하여 육적 금식을 통하여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빼앗길’ απαιρω(아파이로 522) 빼앗기다, 가져가다, 잡아채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 빼앗길 날이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고난의 날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핍박과 곤란의 날이 찾아올 때에는 신랑을 빼앗기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강제로 신랑을 빼앗아 가고 물건을 강탈하듯이 잡아채 남겨두지 않고 가져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날이 와도 신랑을 빼앗기는 자가 있고 빼앗기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평소에 신랑이 없을 때마다 열심히 금식하여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이 온다고 하더라도 신랑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육적인 것에만 정신이 팔려 세상의 부귀영화만 바라보면서 금식한 자들은 마지막 날에 고난이 찾아왔을 때에는 신랑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만세전에 선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신랑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제는 이미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에게는 신랑을 빼앗기지 않도록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평소에 신랑이 나와 연합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금식을 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육적으로 열심히 먹으면서 영적으로 곤핍하여져도 신경을 쓰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다가 육적인 곤핍이 오니 그때서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면서 자신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을 빼앗길 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도래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날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가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 날이 되면 환란과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율법에 빠져 행위적인 금식만 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평소에 깨닫고 주님과 소통하기 위하여 금식한 자들은 이때에도 주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신랑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금식을 하셔야 합니까? 나의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금식을 하셔야 합니까? 나의 육체의 고민이 찾아왔다고 금식을 해야 합니까? 이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이 끊어지고 내 안에 주님과 연합되지 못했다고 생각이 들 때에 금식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금식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문제를 놓고 금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단식 투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아들이 오토바이를 사 달라고 졸라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오토바이를 사주면 사고 날 것이 불 보듯이 알기 때문에 사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 주지 않겠다고 하자 그때부터 아들은 밥도 먹지 않고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채워질 때까지 아버지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자신의 아들이 금식을 하면서 투쟁하듯이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하는데 사주자니 사고 날 것이 확실하고 안 사주자니 배고픔에 있는 아들의 처지를 볼 수가 없고 그래서 어쩔 수없이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사 준 그 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부딪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 이런 금식이 아버지를 기쁘게 한 금식입니까? 혹시 내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투쟁하듯이 금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예수님께서는 금식 이야기를 하시면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옷인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곳에 생베 조각인 십자가 복음을 붙이면 율법과 복음이 희석이 되어 망쳐버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금식도 전통적인 금식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랑을 접붙이게 되면 희석이 되어 둘 다 못쓰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럼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율법과 복음을 섞어서 혼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파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대인들처럼 전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현재 나의 옷은 율법이면서 한 구석에 생베 조각인 복음을 붙여놓고 이것이 복음을 전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한 부분만 복음으로 붙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부분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온전하게 주님과 연합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금식도 유대인의 전통에 빠져서 행위적인 금식을 하는 것처럼 율법의 금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금식도 해서는 안 됩니다. 신랑이 내 안에 없다고 생각이 될 때에 금식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있고 신랑이 있는데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전통에 묶여서 남들이 금식을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이런 식의 금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은 그대로 놔두고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혼인집의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심령에 신랑이 없다면 그때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해서 영적으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께서 금식을 말씀하시면서 포도주 가죽부대의 예화를 통해 깨달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두어야 만이 둘 다 보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고대 근동에서는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사용했습니다. 다리에서 목까지 가죽을 통째로 벗겨서 다리를 묶어 가죽부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곳에 포도주를 넣어 보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가 완전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낡은 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가 되면서 가스가 나오게 됩니다. 이 가스에 의하여 팽창이 되어 낡은 가죽부대는 터지게 됩니다. 하지만 새 가죽부대는 팽창을 해도 넉넉하게 팽창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터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낡은 율법에 매여 새로운 언약의 말씀인 새 포도주를 받아들여도 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새 언약을 받아들이려면 완전히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이 하는 금식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행위만 있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사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요한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이 이와 같습니다.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논쟁하고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사람을 치면서 금식한다고 거룩한 척하는 이런 금식은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금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금식은 십자가 복음의 말씀 안에서 새 언약의 금식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행위를 중요시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이런 금식은 옛 언약에 있는 금식입니다. 이런 금식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을 수 없는 금식입니다. 금식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금식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금식입니다. 금식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랑이 없는 금식은 신부로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금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금식을 할 때에 옛 언약의 낡은 부대에 묶여서 금식을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복음인 새 언약의 새 부대의 신앙을 가지고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금식이야말로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한 금식이요 주님의 피의 능력을 믿고 하는 금식입니다. 이런 금식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낡은 부대의 금식을 하니 금식을 자랑하면서 내가 40일 금식을 몇 번씩 했다고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금식을 하셨지만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금식할 때에 금식하는지도 모르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의 금식이 새 언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금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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